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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워킹맘은개뿔 Dec 07. 2021

승진에서 떨어진 날, 퐁퐁맛

그 날은 승진 인터뷰가 있는 날이었다. 인터뷰 날짜가 여름휴가와 겹쳤다. 푸껫의 모든 숙소를 뒤져서 가성비 최고로 잡은 풀빌라를 취소했다. 이 놈의 인터뷰 떨어지기만 해 봐라. 일찍 마감되는 숙소를 겨우 잡았는데, 너무 아쉬웠다. 나는 취소한 숙소를 아까워할 만큼 인터뷰를 여유롭게 생각했다. 승진이 되면 좋고, 아니면 말고. 그때는 심드렁했다. 하지만 막상 나만 똑! 떨어지고 보니….. 그건 정말로 먹어보기 전엔 알 수 없는 퐁퐁 트리오에 슈가버블 섞은 맛이었다. 입 열면 거품이 부글부글 끓어오를 것 같아서, 너무 쪽팔려서 그날은 입술을 억지로 동여맸다.


내가 인터뷰를 엉망으로 봤던가...

CEO를 비롯한 경영진들이 모두 둥그렇게 앉아 내가 낸 서류를 펑크낼 듯 쳐다보고 있었다. 갑자기 긴장되었다. 그러다가 자기소개를 한 순간 아…. 똥 됐다. 를 느꼈다. 마지막에 다소 감성적인 멘트로 마무리했는데 모든 임원들의 눈길이 썩어 있었기 때문이다. 회색의 조직 인간들은 뻘짓으로 무장된 나의 재기 발랄하고 초감성적인 문장을 이해하지 못했다. 단세포적인 사람들.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그렇게 틀에 박혀 지내는 것인가. 이런 4차 산업 시대에 말이지. 허튼소리를 지껄인 것에 대한 보답이었는지 임원들은 매우 공격적인 질문을 해댔다. 나는 나름 자신 있게 대답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느끼한 문장들 뿐이었다. 짧은 인터뷰를 마치고 뒤돌아 나오는데 실패의 직감이 무시무시하게 나를 감쌌다.  



결과는 예정된 날 아침 일찍 나왔다. 인사발령이 줄줄이 몇십 페이지였다. 황급히 CTLR F를 누르고 내 이름을 찾았다.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조용히 화장실로 갔다. 아까운 푸껫. 비행기 좌석도 호텔도 코스도 다 짜 놨는데…. 이제 바로 다시 예약해도 그 숙소가 없을 거다. 그런데 이번엔 인터뷰 보고 떨어진 사람은 거의 없네. 나 혼자인가 보다. 아 정말 쪽팔리다. 이럴 줄 알고 일부러 심드렁했던 건데 역시나 예감이 맞는구나. 남편은 눈치 없이 어떻게 됐냐고 왜 물어보고 지랄인가. 아 이대로 집으로 갔으면 좋겠다.


갑자기 후두둑 눈물이 떨어졌다. 아, 어떡해 자리로 돌아가야 하는데......

팀원들이 보는 듯 안 보는 듯 다 나를 쳐다볼 텐데. 나는 화장실 이후 그 날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화장실과 점심시간만 기억난다. 그 와중에 또 점심은 먹었다. 오래전 약속이라 취소하기 어려웠다. 메뉴는 샤브샤브. 그 날 동료는 아무 말없이 샤브샤브를 퍼 주었다. 국물이 목 뒤로 훌훌 넘어갔다. 눈물 대신 국물을 삼켰다. 이상하게 퐁퐁맛이 났다. 부엌세재를 뜨거운 물에 풀어 마시는 것 같았다. 싸구려 레몬이나, 자몽, 아니면 솔잎 같은 익숙한 향의 생경한 맛. 보기는 많이 봤지만 처음 마셔본 맛. 

그래, 그래도 점심은 먹어야 되니까. 밥 먹어야 또 먹고살지. 나는 퐁퐁물을 마셨다. 밥벌이는 구차했지만 점심밥은 위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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