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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지원 Jan 23. 2024

ADHD와 글쓰기

24.1.21. 토막글 

ADHD 약을 처방받아 먹기 시작한 지 1년쯤 되었다. 처음 진단받았을 때만 해도 내게 뭔가 큰 일이 일어난 것만 같았고, 앞으로의 생활에 큰 변화가 생길 것처럼 느껴졌다. 정신과 진료가 더 이상 흠이 되지 않는 사회에 살고 있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으면서도 선뜻 남에게 말하기는 꺼려졌다. 


하지만 이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별로 친하지도 않은 사이에 누군가의 내밀한 가정사나 지병, 존재론적인 고민을 듣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런 비밀을 공유한다는 것은 공유하는 입장에서는 누군가를 자신의 바운더리 안에 들이는 것을 허용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공유받는 입장에서 그런 관계를 원했느냐고 물으면, 글쎄다. 원치 않은 호의는 폭력이 될 수 있지 않은가?


‘메디키넷리타드’라는 이름도 생소한 약을 처방받았다는 것은 뭔가 내 스스로가 특별한 사람이 된 것처럼 만들어주는 힘이 있었다. 게다가 나는 다른 사람들과의 ‘다름’을 특별함으로 받아들이는 성정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가 성인 ADHD로 진단받았다는 사실은 부정적이라기보다 긍정적인 느낌으로 다가왔다.  일상생활에서 느꼈던 모든 어려움이 사실은 네가 특별해서 그렇다고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이건 내가 그렇게 경계해 마지않던, 그러나 누구나 가지고 있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는 ‘특별해지고 싶은 욕망’을 채워주는 힘이 있었다. 남들에게 함부로 공유할 수는 없는, 나 혼자만 알고 있어야 하는 특별한 비밀 한 가지를 갖게 된 셈이다.


온라인에서는 ADHD 진단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감정을 토로한다. ADHD로 진단받는다는 것은 나태함, 산만함, 집중력 부족 등 우리 사회에서 부정적으로 여겨지는 많은 특성들이 사실 내 잘못된 선택과 행동의 결과인 것이 아니라 내가 어쩔 수 없는 내 뇌의 결함이었다는 점을 인정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ADHD 환자들은 삶을 둘러싼 무력감이 사라지고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인정할 수 있게 된다. 요컨대 내가 산만하고 나태했던 것은 내 잘못이 아니었고, 나는 원래 ‘조금 그런’ 사람이었던 것이다. 같은 노력을 들이더라도 ADHD 환자들은 다른 사람들만큼 집중력을 발휘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내가 덜 노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해도 퍼포먼스가 나오지 않는 것을 어쩌란 말인가. 우리는 500ml밖에 들어가지 않는 밀폐용기에 ‘왜 1L까지 들어가지 않는 거야?’라고 나무라지 않는다.  500ml까지밖에 들어가지 않는 것을 어쩌란 말인가.


성실함과 신중함은 근대 사회에서 더 높은 생산성을 달성하기 위해 요구되던 특성이었다. 선사 시대의 원시인 사회에서 한 곳에 앉아서 책을 오래 읽을 수 있는 집중력이 최고의 미덕으로 여겨졌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다. ‘집중력이 좋아야 한다’라는 명제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달라지는, 현재에 한해 임시로 참인 명제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면 나를 옭아매고 있었던 구속조건은 사라진다. 이러한 사실은 결국 근본적인 의문으로 환원된다. 우리는 집중력이 좋아야 ‘하는가?’


물론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해서 모든 것이 바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우리는 현대 사회를 살고 있고, 그것도 대자연 속 어느 한적한 시골 마을에 사는 것 대신 서울이라는 대도시에서 더 나은 연봉, 더 나은 거주지를 위해 경쟁하는 것을 의무로 생각하는 집단에 속해 있기를 선택했다. (마음만 먹으면 이러한 집단에 속하지 않겠다는 선택을 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의미이다.) 내가 선택한 길을 위해, 선사 시대의 원시인과 달리 나는 한 곳에 앉아서 오랜 시간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메디키넷리타드와 콘서타는 나의 ‘조금은 성가신’ 특별함을 누그러뜨리면서도 내가 원만하게 기능하도록 하는 구세주였다. 그래서 나는 자신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들에게 ADHD와 관련해서 최소한 정신과적 진료를 한 번이라도 받는 것을 적극적으로 추천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지킬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에서 원활하게 기능하며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약도 주니까. 기회가 된다면 약을 복용할 때의 감각에 관해서도 언젠가 글로 남겨 볼 예정이다.


ADHD의 성가신 점 중 하나는 생각이 미친 듯이 솟아오르다가도 다른 생각이 비집고 들어오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뚝 끊겨버린다는 점이다. 그래서 친구들과 대화하다가 뭔가 좋은 문장이 생각나거나 일상생활 속에서 문득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더라도 그에 관한 생각을 이어가기가 힘들다. 다른 사람들보다 기억을 보관하고 있는 공간이 작아서, 오래된 생각이 새로운 생각에 쉽게 밀려나가버리는 것 같다. 짧은 글을 쓰기로 다짐한 것도 그 때문이다. 작고 소중한 집중력으로 써내려갈 수 있는 분량의, 하지만 그때 당시의 떠오르는 생각은 정리할 수 있을 만한 정도의 짧은 글. 


새로움을 추구하는 성격은 종종 이전의 마음가짐과 생각을 희석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인간을 과거에서부터 이어지는 일관된 생각과 연속적인 경험의 집합체로 정의한다면 ADHD 유병자는 바로 그 점에서 필연적으로 과거의 자신과의 연결성이 약할 수밖에 없다. 매일 새로운 생각이 떠올라 이전의 기억이 희석되고, 이전의 내가 했던 생각이 과연 현재에도 유효한지 확신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글쓰기는 기억을 아웃소싱하는 편리한 방법이자 '나'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시도이다.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지만, 한번 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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