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보다

To Kill Bill은 하나의 신화다

쿠엔틴 타란티노, 「킬빌 - 1부」, 「킬빌 - 2부」

by IL POSTINO


킬 빌 속 세계관(1): 분별되지 않는 삶과 죽음


영화가 삶과 죽음을 다루는 방식은 어딘가 새롭다.

빌은 키도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카펫에 누워 퍼덕거리는 물고기.
퍼덕거리지 않는 물고기.
삶과 죽음에 대한 이보다 완벽한 이미지가 있을까?

영화는 이 둘을 분별하지 않는다. 이는 도가의 세계관과 유사하다.

삶과 죽음이 전적으로 같다고 말하진 않지만, 그럼에도 이 둘은 크게 분별되지 않는다.


잠시 장자의 이야기를 해보자.

장자의 아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황제는 조문을 왔다. 그런데 황제는 장자를 보자 아연실색하였다.

슬퍼하지는 못할 망정 노래를 부르고 있던 것이다.

이를 본 황제가 장자에게 경위를 묻자 장자는 대답하였고, 다음은 장자가 한 말의 일부분이다.

죽음은 어느 날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왜 노래를 부르면 안 되는 겁니까?
죽음이 찾아왔을 때 노래를 부를 수 없는 사람은 살아서도 노래를 부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삶은 끊임없는 죽음이기 때문이지요.
매 순간 어딘가에서 사람이 죽어갑니다. 삶은 끊임없는 죽음입니다.
제가 죽음의 순간에 노래를 부를 수 없다면 살아서도 노래를 부를 수 없지요.
삶과 죽음은 서로 다른 게 아니지요. 삶과 죽음은 하나입니다.
우리가 태어나는 순간 죽음도 함께 태어납니다.
우리는 삶 속에서 자라고 있으면서 동시에 죽음 속에서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이란 건 삶의 절정입니다. 그런데 왜 노래를 불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까?


빌은 금붕어를 밟아죽인 비비에게 묻는다.

“에밀리오(금붕어)를 사랑하지?”

비비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언뜻 들어 모순되어 보이는 이 장면은 도가적인 입장에서 보았을 때 이해할 수 있을 만한 것이 된다.


킬 빌 속 세계관(2): 죽음과 복수


영화를 이끌어가는 복수라는 축 또한 이런 세계관에 맞물려 이해할 수 있다.

죽음은 본디 비가역적인 현상이다.

따라서 죽음에 대한 복수는 굉장히 복잡하게 다루어져야 할 문제이다.

(죽음이 아니어도 복수는 쉽지 않은 문제이지만, 죽음의 개입 여부는 이를 더 골치아프게 만든다)


죽임을 당한 당사자가 이미 죽었다면,

누가 그 죽음에 대해 복수할 것인가? 복수에 감정이 개입될 수 있는가? 피해를 당한 만큼 ‘정확히’ 복수해주는 것이 가능한가? 복수에 대한 복수는 정당한가? 복수는 정의로운 행위인가? 애초에 복수라는 행위가 정당화될 수나 있긴 한 것인가? 복수 대신, 용서는 불가능한 것인가?


이와 같이 죽음에 대한 복수는 거의 항상 균형을 맞출 수 없는 축이지만,

킬 빌 속 세계관에서 이루어지는 복수는 다르다.

더 브라이드는 그 자신이 죽음을 당했으면서 복수의 주체이기도 한, 역설적인 존재이다.

또한 앞서 말했듯이, 영화의 세계관 속에서 삶과 죽음의 구별은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처리된다.

삶과 죽음 모두, ‘가볍게’ 여겨진다. 이로써 복수는 죽음의 비가역성이라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된다.


이처럼 더 이상 죽음으로써의 복수가 항구의 처벌이 되지 않을 때 비로소, 복수라는 행위는 복수할 ‘대상’이 아닌, ‘복수 대상의 행위’에 대한 복수로서 거듭난다.



신성한 통과 의례: 'to kill bill'


결국 끝내 복수를 하는 신부(Bride).

빌을 보내주는 키도(Kiddo).

환호로 흐느끼는 블랙 맘바(Black Mamba).

새끼 사자를 다시 만난 암사자 Mommy(XX).

이 모두가 한 여자의 이름. 자아를 찾아가는 한 여자의 신화적 이야기.

‘kill bill’은 이를 위해 실행되는 신성한 의식.



형식적인 측면


여러 동양화들을 오려붙인 세련된 모자이크;

쿵푸, 삶과 죽음이 다뤄지는 방식. 이소룡 오마주, 기, 검객들의 승부 등.


그 틀이 되는 여러 챕터의 활용이라는, 극적인 형식의 차용.

전에 없던 새로운 방식의 액션과 사운드의 활용. 그가 거장인 또 하나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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