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무진기행」[2] 속 동질성 확대와 이질성 축소의 메커니즘
본 글은 2020-2 연세대학교에서 진행된 현대사회와문학 강의의 기말 과제로 발표했던 글이다.
역사 속에서 그 가치가 인정되고, 후대에도 끊임없이 이에 대한 담론을 형성하는 것이 고전의 요건이라면, 김승옥의 작품들은 이제는 가히 한국 문학의 고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김승옥은 그의 첫 작품 「생명연습」으로 등단할 때부터 문단 내의 많은 주목을 받았다. 당시 그의 작품에 대한 평가를 잘 드러내는 키워드는, “감수성의 혁명”[3]과 “자기세계”[4]일 것이다. 이러한 표현들은 김승옥 소설 속 인물이, 자신만의 언어를 통해 고유한 세계를 구축함으로써 ‘개인’과 ‘내면’의 발견을 가능하게 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고전의 요건이 후대의 끊임없는 담론 형성이라면, 기존의 관점은 새로운 관점에 의해 비판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김승옥의 “텍스트에서 주체의 내면이 형성되는 과정”은 “어머니나 누이를 부정하고 살해하는 방식을 통해 이루어지며, 이에 대한 죄의식이 김승옥 인물들의 내면성, 즉 <자기 세계>의 핵심을 이룬다”라는 장세진[5]의 지적이나, “주인공들의 입사 과정에서 여성이 마치 희생 제물처럼 바쳐지는 양상이 매우 자주 나타난다”라는 강지윤[6]의 지적은 대표적인 예시이다. 특히 다음과 같은 강지윤의 비판은 주목할 만하다.
김승옥은 「무진기행」에서 남성이 여성으로부터 주변적 존재로서의 동질감을 느낀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얼마나 자기기만의 형태에 불과하기 쉬운지를 보여줬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남성 주체의 미학화는 여성의 타자성을 남성의 자기동일성 내부로 회수하는 일에 멈추고 만 혐의가 적지 않다. 이 분열 사이에서 마치 불가항력의 포로가 되어 버린 것처럼 느끼는 남성주체의 심리가 작품을 전체적으로 지배하기 때문에 여성의 타자성은 후경으로 물러난다.[7]
그렇다면 강지윤이 지적한 바와 같은 문제가 일어나는 까닭은 무엇인가? 어째서 타자의 후경화 문제가 발생하는가? 본고는 그것의 발생지점을 탐색함으로써, 고전으로서의 김승옥에 대한 후대의 담론을 이어나가고자 하는 시도의 일환이다. 덧붙이자면 앞서 언급한 장세진과 강지윤의 지적이 주로 여성의 타자성에 주목하였으나, 필자는 여성의 타자성이 아닌 타자성에 대해서도 주목하고자 함을 밝힌다.
이 두 소설에서 타자의 후경화라는 혐의는, 비단 1인칭 주인공의 시선에서 비롯된 것만으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이것은 두 소설에서 등장하는 타자들이 ‘유의미한 타자’—즉 주인공에게 주요한 영향을 줄 수 있는—였다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필자는 그 타자들이 ‘유의미’해질 수 없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파악하였다. 타자가 문제적인, 따라서 유의미한 것은 본질적으로 그가 가진 이질성 때문이다. 갈등, 균열과 같은 문제는 동질적인 것 내에서는 발생하지 않는다. 그런데 김승옥의 화자들은 이러한 이질성에 마주하기보다는, 타자에게서 자신과의 동질성만을 발견하고자 한다. 그들은 타자들이 가진 이질성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한 상태로, 타자들을 동일시함으로써 자신의 자아 내부로 포섭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그 타자가 가진 이질적인 특성은 무시되고, 그는 화자의 자기 세계 구축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된다.
필자는 그 분석 대상으로, 이 문제가 잘 드러나 있는 작품인 김승옥의 「역사力士」와 「무진기행霧津紀行」을 택하였다. 필자는 이 두 작품에서 각각 어떤 식으로 화자가 (「역사力士」에서는 액자 속 화자가) 동질성에 주목하고 이질성을 경시하는지에 대해 각각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이를 종합하여 어떻게 이러한 화자의 태도가 타자의 후경화에 기여하게 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역사力士」는 액자식 구성을 가진 작품으로, 한 인물이 서울에서 하숙을 하던 젊은이에게서 들은 내용을 전해주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 젊은이는 서울의 빈민가 창신동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는 창신동의 방 안에서 절망감과 무력감을 느끼며 “자기는 이 넓은 세계 속에서 더럽기 짝이 없는 이 방만을 겨우 차지할 수밖에 없느냐는 자기 혐오(190)”를 느낀다. 그는 자기가 하숙을 들기 전부터 그 방 벽에 있던 “창신동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개새끼들이외다(190)”라는 낙서를 사랑한다. 이것은 두 가지 의미하는 바가 있다. 첫째 창신동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런 낙서를 하지 않고서는 배겨나지 못했을 것(190)”이라는 점, 둘째 그가 자신도 그에 해당된다는 동질감을 느꼈다는 사실이다. 그랬던 그는 친구의 도움으로 창신동을 벗어나 양옥집으로 하숙을 옮기게 된다. 양옥집은 창신동과 달리 질서와 규칙에 따라 움직인다. 그는 양옥집의 생활에 권태와 혐오감을 느끼고 창신동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그들에게 동질감을 느낀다.
그러나 그가 창신동에 대해 느끼는 동질감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과 창신동의 삶에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이질성이 존재한다.
그 친구는 (중략) 자기 친척 중에서 퍽 가풍이 좋은 집안이 하나 있는데 거기에 자기가 나의 하숙을 부탁해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고마운 얘기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 나 자신도 나의 무궤도하고 부랑아 같은 생활태도를 비록 내 천성의 게으름과 가난한 자들의 특징인 금전의 낭비벽, 그리고 이제는 돌아갈 고향도 없이 죽는 날까지 이 서울에서 내 힘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절망감에다가 핑계를 대고 변명해보려 했지만 아직 젊다는 이유 하나만으로써도 내 생활태도 개선의 가능은 충분하다는 점에 생각이 미치면 나도 나 자신의 기만을 인정치 않을 수 없곤 했던 참이라 그 친구의 의견을 고맙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194-195)
그는 친구의 도움으로 양옥집으로 향하게 되면서, 그가 창신동의 자기파괴적 특성으로부터 느꼈던 동질감이 실은 자기변명 혹은 자기기만적인 것이었음을 드러낸다. 또한 그가 양옥집의 생활 속에서 창신동의 얼굴들을 떠올리며 동질감을 느끼는 것은 사실이나, 그는 자신이 “결코 그곳(창신동)으로 돌아가지는 않으리라는 걸 잘 알고(괄호는 인용자가 침, 216)”있다. 그러나 그는 이 이상 이질성에 대해 깊게 생각해보지는 않는다.
이질성을 마주하지 않으려는 화자의 태도는 그가 서씨의 곡예를 볼 때 더 명확히 드러난다. 그는 이를 보며 감동과 전율을 느끼다가, 점점 “귀기에 찬 광경을 본 무서움에(210)” 떨게 된다. 그는 “서씨가 간직하고 있는 자기”, “그와 접촉하면 할수록 빨려들어갈 수 있었던 깊이(211)”에 무서움을 느낀 것이다. 그는 그리고 스스로 다음과 같이 시인한다.
그 집—그날 많은 얼굴들이 살던 그 집에서 나는 나 자신 속에서 꿈틀거리는 안주에의 동경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그 사람들의 헤어날 길 없는 생활 속에 내가 휩쓸려 들어가게 되는 것이 무서웠기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211)
이것은 서씨에게서 드러나는 강한 이질성을 의도적으로 회피하려는 화자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
이러한 그의 동질성 확대와 이질성 축소는 일종의 자기기만이다. 그의 자기기만적 측면이 가장 단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은, 그가 양옥의 식구들에게 먹일 흥분제를 사오는 장면이다.
나는 나 자신이 이 평온한, 부자유하게 평온한 마을을 해방시켜주러 온 악마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고 어쩐지 그것이 나를 즐겁게 했다. 혹은 그 빈민가가 파견한 척후인지도 몰라, 라고 생각하며 나는 그 빈민가에 대하여 요 며칠 동안 지니고 있던 죄의식 비슷한 것이 사라져 있음을 깨달았다. 일종의 비겁한 보상행위라고 누가 곁에서 말했다면 나는 정말 즐거워서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을 것이다. (216)
그는 질서와 규칙의 지배를 받는 “정식의 생활正式(198)”에 반감을 가진다. 그리고 자신을 창신동의 “척후”로 여기며 또다시 창신동의 삶에 대한 동일시를 보인다. 그러면서 그는 즐거움을 느끼고 창신동 사람들에 대한 부채감에서 벗어난다. 이 부채감은 창신동 사람들의 삶과 자신이 현재 영위하고 있는 양옥의 삶의 이질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그는 그 자신의 동일시가 “일종의 비겁한 보상행위”임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행위가 가진 기만성을 문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자기기만적 측면에 도취될 따름이다.
「무진기행霧津紀行」은 무진과 서울을 오가는 윤희중의 여로를 따라 진행되는 서사이다. 무진은 그에게 상처의 공간이다. 그는 그곳에서 쓸쓸함을 느끼며 타자와의 접점을 희망한다. 그가 전 여인과 이별하고 폐병을 앓으며 일 년 동안 무진에 있을 때 썼던 편지에는 ‘쓸쓸하다’는 단어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가 별들을 보며 “나와 어느 별과 그리고 그 별과 또다른 별들 사이의 안타까운 거리”를 보며 “가슴이 터져버리는 것” 같고, “분해서 못 견디어”하는 것은 그런 쓸쓸함의 발로일 것이다(240).
윤희중의 타자에 대한 접촉 시도는, 그가 무진에서 만나게 되는 세 여자—미친 여자, 자살한 술집 여자, 하인숙—와의 관계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이 여자들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동일시를 시도한다. 그런데 그는 동일시를 통해 그녀들을 자의식의 내부로 포섭하며 자의식을 강화시킨다. 그 결과 그녀들은 ‘유의미한’ 타자가 되지 못하며 그의 자의식을 구축하기 위해 이용될 뿐이다. 이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자.
그는 역에 도착하자마자 한 미친 여자를 본다. 그는 그 여자가 무표정한 모습으로 비명을 지르는 것을 보며, 그로부터 무진의 골방 속에서 자신이 쓴 일기의 한 구절을 생각한다. 일기를 쓴 당시 그는, 어머니의 요구로 병역을 기피하며 골방 속에 숨어서 수음을 한다. 그러면서 그는 심한 자기 모멸과 오욕을 느긴다. 그가 떠올린 한 구절은 다음과 같다. “어머니, 혹시 제가 지금 미친다면 대강 다음과 같은 원인들 때문일 테니 그 점에 유의하셔서 저를 치료해보십시오……(227)” 그러나 광기에 가까이 다가갔다는 점을 제외하면 그의 과거와 미친 여자의 비명 사이에는 어떤 유사성도 드러나지 않는다. 그는 그녀가 어떠한 연유로 미치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그녀에 관해 그가 알 수 있는 것은, 구두닦이 아이들이 지껄이는 (신빙성이 없는) 소문들뿐이다. 또한 그는 그녀의 비명이 “좀 나이가 든 여드름쟁이 구두닦이 하나”가 “그 여자의 젖가슴을 손가락으로 집적거”리는 까닭에 나왔다는 점에는 관심이 없다(226). 그저 그녀의 비명에서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며 자의식에 몰두해 있을 뿐이다.
다음으로 그는 방죽길을 따라 걷다가 방죽 아래 있던 술집 여자의 시체를 본다. 그는 이를 보며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한다.
나는 문득, 내가 간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거리고 있었던 게 이 여자의 임종을 지켜주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통금 해제의 사이렌이 불고 이 여자는 약을 먹고 그제야 나는 슬며시 잠이 들었던 것만 같다. 갑자기 나는 이 여자가 나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아프긴 하지만 아끼지 않으면 안 될 내 몸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246)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그가 잠이 들지 못한 것과 이 여자의 죽음 사이에 어떠한 연관관계도 소설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순경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초여름이 되면 반드시 몇 명씩(245)” 죽는 술집 여자 중 하나이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불면이 이 여자의 임종을 지켜주기 위해서 그랬던 것이 아닌가, 하는 망상을 보인다. 그러면서 그 여자를 자신의 일부처럼 느낀다. 그가 이처럼 동일시의 근거를 찾는 방식은 터무니없게 느껴질 정도이다. 그럼에도 그는 애써 동일시를 시도한다. 이는 일종의 자의식 비대 현상으로도 보인다.
그가 무진에서 만난 타자 중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하인숙이다. 그는 하인숙에게서 자신이 이전에 느꼈던 권태와 쓸쓸함을 발견하고 동질감을 느낀다. 하인숙과의 관계에서 그가 느끼는 동질감은, 앞의 두 경우와 달리 상당한 근거를 가진다. 하인숙은 강한 권태감으로 인해 ‘속물’들 앞에서 노래를 부른다. 또한 방죽을 걸으며 그들은 서로 외로움을 느끼고 있음을 확인한다. 그러나 결국 그는 아내의 전보를 받고 서울로 떠나버린다. 윤희중의 떠남은 하인숙에 대한 배반임과 동시에, 그와 그녀의 관계 뒤에 숨겨져 있던 강한 이질성을 드러낸다. 윤희중은 언제든 무진을 떠날 수 있고, 떠나게 될 자지만, 하인숙은 자기 마음대로 무진을 떠날 수 없는 자이다. 윤희중의 무진 방문(도피)은 서울로의 복귀를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하인숙은 자신의 힘으로 서울로 떠날 수 없다. 강지윤이 지적하고 있듯이, “어떤 능력과 개성을 가졌든 그녀의 운명은 윤희중의 처분에, 혹은 계속 운이 따라 주지 않는다면 세무서장의 처분에 맡겨져 있다는 것이 하나의 전제 조건처럼 놓여 있다.”[10] 여기서 또 한가지 주목할 점은, 윤희중이 이러한 자기기만적 모습을 인정하고 이로부터 “심한 부끄러움(256)”을 느낀다는 점이다. 이러한 그의 부끄러움은, 자신이 동일시한 타자(하인숙)에 대한 배반은 곧 자기 자신에 대한 배반이기도 한 까닭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발생한다. 그가 느끼는 부끄러움은 그의 동일시 시도에 드디어(!) 모종의 정당성을 부여해주는가? 이에 대해 답하기 위해 다시 한번 강지윤을 인용해보자.
그는 세상의 속됨을 바라보는 자이면서 스스로도 또 하나의 속절없는 속물이라는 사실 사이에, 힘의 남성 연대와 여성으로 대표되는 약자들의 세계 사이에, 즉 무진과 서울 사이에 끼어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이 분열에서 벗어나려 하기보다 그 안에 계속 머무르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이 분열은 고통스럽지만 또한 남성주인공이 자기동일성을 위해 의존하고 있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윤희중은 기만적인 자신을 혐오하면서도 동시에 스스로가 기대고 있는 분열이라는 조건 자체에 나르시즘적으로 고착되어 있는 셈이다.(195)
강지윤의 분석을 참고하면, 윤희중이 하인숙을 배반함으로써 심한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맞지만, 이는 결국 그의 자의식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작용함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윤희중은 하인숙과의 동질성에만 초점을 맞춤으로써 이질성을 외면하고, 그 결과 굉장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이 부끄러움마저도 결국 자신의 자아를 구축하는 데 활용될 뿐 결국 하인숙은 ‘유의미한 타자’가 되지 못하고 서사 내에서 무력한 타자로 후경화되는 것이다.
그처럼 타자와의 접점을 희망하던 윤희중은, 그럼에도 타자의 영향을 차단한 자폐적 구조를 보임으로써 결국 타자와의 유의미한 접촉에 실패한다. 그의 여로는 비대한 자아 속에서 서울과 무진을 오가는 폐곡선을 그릴 뿐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나에게 타자가 문제시되는 것은 본질적으로 이질성 때문이다. 갈등 균열 등은 동질적인 것끼리는 발생하지 않는다. 이 이질성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타자와의 관계 양상이 정해진다. 그런데 김승옥 소설 속의 (남성) 화자들은 타자의 이질성을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축소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그들은 타자로부터 자신과의 동질성만을 발견 및 확대하려 한다. 이는 자의식의 비대화를 유발하고, 그에 따라 화자들은 타자의 이질성은 외면한 채, 타자를 자의식의 내부로 포섭하고자 한다. 그 결과 타자들과의 만남은 존재하지만, 그 만남이 자신의 존재에게 본질적인 변화를 초래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타자들은 ‘유의미한’ 혹은 문제적인 타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화자들은 기존 자기의 자의식을 강화할 뿐이다. 이러한 그들의 시도는 기만적인데, 그들은 이러한 자기기만성을 인식하고 죄책감과 부끄러움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기만적인 자신을 혐오하면서도 동시에 스스로가 기대고 있는 분열이라는 조건 자체에 나르시즘적으로 고착되어” 있다. 그들이 느끼는 죄책감과 부끄러움마저도 결국 자신의 자아를 비대화하고 공고히 하는데 기여하게 되는 것이다.
타자가 가진 이질성은 흔히 문제시된다. 나 혹은 우리와, 타자 사이에서 발생하는 많은 갈등은 그로부터 비롯된다. 그러나 그렇기에 오히려 이질성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보아야 한다. 타자의 이질성을 무시한 채, 그 안의 동질성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은 유의미한 접점을 만들어내기 힘들다. 물론 이질적 타자와의 만남은 분명 문제적인 사건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도 가진다. 앞서 살펴본 김승옥의 두 소설의 화자는 자신의 자아를 확보하려는 시도를 통해, 오히려 비대해진 자아에 나르시즘적으로 갇혀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르트르의 말처럼 타자는 분명 지옥이지만, 동시에 나라는 감옥에서 벗어나는 출구일 수도 있음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1] 강지윤, 「감수성의 혁명과 반(反)혁명 – 김승옥의 「무진기행」과 ‘여성’이라는 암호」, 187.
강지윤은 「무진기행霧津紀行」이 남성 서술자의 내면 심리 서술에 치중함으로써, 인물들이 가진 타자성이 후경으로 물러나게 된다고 지적한다. 이 글의 제목이 그로부터 비롯되었음을 밝힌다. 그리고 후경으로 물러나게 된다는 것은 더 쉽게 말하자면 뒷전으로 물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2] 본고는 아래 단행본을 기준으로 함을 밝힌다.
[3] 유종호, 「감수성의 혁명 – 김승옥」(1966), 『비순수의 선언 – 유종호 전집』 1, 민음사, 1955.
[4] 김현, 「구원의 문학과 개인주의」(원문은 「자기세계의 의미」, 『한국단편문학대계』 12, 삼성출판사, 1969), 『김현 문학 전집 – 현대 한국문학의 이론/사회와 윤리』 2, 문학과 지성사, 1991.
[5] 장세진, 「’아비 부정; 혹은 1960년대 미적 주체의 모험」, 상허학회 엮음, 『1960년대 소설의 근대성과 주체』, 깊은 샘, 2004, 125.
장세진은 이 글에서, 당시 ‘아비 부정’이라는 모토를 내걸며 50년대 문학과의 단절을 외침으로써 근대적 내면성을 확보하고자 했던 60년대 4.19세대의 문학 중, 김승옥과 이제하의 작품에 주목한다. 그러면서 그는 김승옥의 문학에서 주체의 내면은 ‘아비 부정’보다는 모친이나 누이 살해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지적하였다.
[6] 강지윤, 「감수성의 혁명과 반(反)혁명 – 김승옥의 「무진기행」과 ‘여성’이라는 암호」, 187.
[7] 강지윤, 같은 글, 196.
[8] 이 절에서 「역사力士」의 일부분을 인용할 경우, 괄호 안에 쪽수만을 표기함을 밝힌다.
[9] 이 절에서 「무진기행霧津紀行」의 일부분을 인용할 경우, 괄호 안에 쪽수만을 표기함을 밝힌다.
[10] 강지윤, 같은 글, 192.
1. 기본 자료
김승옥, 「무진기행霧津紀行」, 『생명연습』, 문학동네, 2014.
_____, 「역사力士」, 『생명연습』, 문학동네, 2014.
2. 참고 문헌
강지윤, 「감수성의 혁명과 반(反)혁명 – 김승옥의 「무진기행」과 ‘여성’이라는 암호」
김현, 「구원의 문학과 개인주의」(원문은 「자기세계의 의미」, 『한국단편문학대계』 12, 삼성출판사, 1969), 『김현 문학 전집 – 현대 한국문학의 이론/사회와 윤리』 2, 문학과 지성사, 1991.
송태욱, 「김승옥과 고백의 문학」, 연세대학교 대학원 국어 국문학과, 2002.
유종호, 「감수성의 혁명 – 김승옥」(1966), 『비순수의 선언 – 유종호 전집』 1, 민음사, 1955.
장세진, 「’아비 부정; 혹은 1960년대 미적 주체의 모험」, 상허학회 엮음, 『1960년대 소설의 근대성과 주체』, 깊은 샘,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