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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L POSTINO Apr 22. 2021

수치심과 죄의식의 공동체를 넘어서

오에 겐자부로, 『만엔 원년의 풋볼』


다카시의 귀향은 여동생에 대한 자신의 원죄를 응시하겠다는 무의식적 의지의 발현이자 억압된 것의 회귀였다. 다카시는 그가 스스로에 대해 말한 것처럼, “갈기갈기 찢겨 있”는 상태였다. 동생의 죽음이라는 엄존하는 과거 앞에서, ‘위악’을 통해 (자신은 원래 나쁜 인간이라고 스스로를 규정함으로써) 죄의식에서 벗어나려는 욕망과, 동시에 그런 자신을 처벌하고자 하는 욕망을 양가적으로 가짐으로써 분열을 겪고 있었던 것이다. 그랬던 그는 귀향을 통해 분열을 극복하고자 한다. 그것이 죽음을 통해서건 새 삶을 통해서건 말이다.


이를 위해 다카시는 만엔 원년에 있던 역사적 사건에 집중한다. 그럼으로써 만엔 원년의 봉기를 100년 뒤인 현재에서 다시 재현하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자신을 증조부의 동생에 동일시하고, 그리하여 거대한 ‘역사적’ 사건으로써 자신의 최후를 계획한다. 그러나 이것이 잘 되지 않자, 조선 옷을 입은 처녀를 자신이 죽였다는 식으로 악을 자처함으로써, 다시 한 번 자신의 자기처벌 욕망이 어긋나지 않도록 스스로를 궁지로 몰아넣는다.

그러나 미쓰사부로는 다카시의 그런 시도들을 냉소적으로 바라본다. 결국 이번에도 다카는 자기 처벌을 하지 못할 것이고, 또 그렇게 비겁하게 도망가 삶을 지속하게 될 것이라는 식으로 그를 발가벗긴다. 미쓰는 더욱 극심한 수치 속으로 다카를 몰아넣게 된다. 그러나 미쓰의 생각과는 달리, 다카는 자살해버린다. 그런데 이 때 다카의 죽음은, 그 자신이 계획한 자기 처벌의 완성은 아니다. 그보다는 커다란 수치심으로 인해, “절망 속에서 죽는다.” 사르트르의 말을 인용한 본 책 제12장의 제목—“절망 속에서 죽는다. 제군들은 지금도 이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까. 결코 그냥 죽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태어난 것을 후회하면서, 치욕과 증오와 공포 속에서 죽는 일이라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은 다카가 죽기 직전에 어떤 심정이었을지를 잘 보여준다.


이런 다카의 자살에서 또 한 가지 주목할 점은, 다카가 미쓰에게서 느끼는 과도한 수치심이 기인하는 지점이다. 어째서 작품 속에서 다카는 반복적으로 미쓰의 반응을 신경쓰고 그로부터 강한 열등감, 수치심 등을 느끼는가? 이는 그들이 속한 네도코로가(家)의 배경을 살펴보아야 한다. 미쓰와 다카가 어린 시절, 아버지는 갑자기 죽어버리고 어머니는 광기에 사로잡혔으며 첫째 형은 전쟁터에서 죽고 둘째인 S형은 조선인들에게 맞아 죽는다. 가부장의 자리가 부재할 뿐 아니라, 어머니나 형들 또한 그 자리를 대신하거나 보완할 수 없던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런 네도코로가에서 다카에게 미쓰가 가진 영향력은 그야말로 지대했다. 다카에게 미쓰는 가부장의 자리를 이어받는 자이자, 경쟁의 대상인 형제 사이였다. 다카는 미쓰에게 모종의 열패감과 같은 것을 느끼며 자란다.


그랬던 다카에게 자살은 그 자신의 파멸임과 동시에, (다카가 결코 스스로 죽을 수 없다고 이야기한) 미쓰가 전적으로 틀렸음을 보여준 것이다. 미쓰에 대한 다카의 이런 승리(?)는 미쓰로 하여금 더 이상 스스로의 주장에 천착할 수만은 없도록 만든다. 창문 뒤에서 가만히 세상을 관조하며 스스로의 내면으로 침잠해 들어가는 ‘창문형’ 인간이었던 미쓰는, 그야말로 창문이 깨져버린 경험을 한 것이다. 창문 뒤에서 가만히 자폐적으로 천착하는 행위에서 무언가 의미있는 것을 찾아낼 가능성이 사라진 것이다. 자신의 완전한 오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럼으로써 새로운 가능성의 모색 또한 가능해진다. 다카의 참혹한 죽음을 통해 역설적인 신생의 가능성이 마련된 것이다.


네도코로가가 골짜기 마을의 실질적인 지배 계층이었음을 생각하면, 다카와 미쓰 사이에 있던 일련의 사건들과 미쓰의 신생의 가능성의 의미는, 골짜기 마을 전체로도 확대 적용될 수 있다. 또한 이는 작품의 테두리를 넘어 당대 전후 일본 공동체의 문제로도, 더 나아가 신생을 꿈꾸는 모든 공동체에게로 확대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일종의 죄의식, 부채 의식을 가진 부채의 공동체는 한계를 가진다. 수치심과 죄의식을 직면하고 그 매듭을 풀어야 재생과 신생의 길로 나갈 수 있음을, 이 소설은 보여준다.


(덧, 다만 신생의 공동체 건설에서 여성은 항상 그 가능성을 ‘잉태’하는 어머니의 모습으로 묘사되어야만 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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