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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호 Nov 16. 2022

쏠까, 말까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 술, 그리고 사람. 그것들을 증오하고 혐오하지만 한편으로는 강한 끌림을 느낀다. 혹시 이번에는 다르지 않을까. 어쩌면 그것들이 나를 위로해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로 다가갔다가 아파하기를 반복한다. 나는 왜 어제 그렇게 술을 많이 마셨을까. 도대체 나는 그 사람이 불편할까. 유독 그 사람의 말에 더 큰 상처를 받을까. 다음 날 아침이면 도저히 넘어가지 않는 콩나물국밥을 앞에 두고 나의 깨어진 마음을 본다. 내 마음을 알아보고 싶지만 깨진 마음에 손을 대는 것만으로도 따끔거린다. 술에 취해서인지 사람에 취해서인지  깨어진 마음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부딪히며 내 마음 곳곳에 생채기를 낸다.


  술과 사람은 나를 모순되게 한다. 술자리에선 음료수만 홀짝이던 내가 밤새 술을 마시게도 하고, 여행은커녕 사람을 만나는 것도 싫어서 옷도, 음식도, 로또도 온라인으로 주문하는 내가 어느 날에는 사람을 만나러 지방으로 훌쩍 떠나게도 한다. 술이, 사람이 지긋지긋하게 싫고 무섭다가도 어느새 홀린 듯 다가가는 나는 내가 봐도 어딘가 이상하다. 술과 사람에 있어서는 도저히 적당히라는 걸 모른다. 손맛의 달인들은 ‘적당히’만으로도 척척 음식을 만들어 내던데. 나는 달인은커녕 일반인 수준도 되기 멀었다. 술과 사람에 있어서는 0과 1로만 이루어진 컴퓨터처럼 극단적인 방식밖에 취할 줄을 모른다.


  내가 술을 마시고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면 아쉬움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있다. 다른 사람들은 잘 만나고 다니면서 자신에게는 소홀하냐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또 어찌할 바를 모른다. 조금 더 어렸을 때는 나에게 아쉬움을 표하는 사람들과 일부러 약속을 잡았다. 그 사람들이 서운하지 않게 시간을 내고 연락을 했다. 하지만 나의 한정된 에너지로 할 수 있는 노-오력은 한계가 있었다. 아무리 미뤄봐야 언젠가는 막이 내릴 수밖에 없는 게 연극의 숙명이었다. 마음이 동하지 않는 관계를 의무감만으로 가져가는 건 상대와 나를 모두 속여야 하는 것이므로.


  방금 말했듯 나는 적당히를 모르는 사람이라 이런 상황을 대비한 무기가 있다. 주머니 속 에 언제나 ‘손절’이라는 무기를 넣어두고 방아쇠를 만지작거린다. 딱 한 발이면 된다. 일방적으로 관계를 끊어버릴 수 있는 강력한 무기다. 더 이상 감정소모를 하지 않아도 되고, 내가 왜 그와의 관계에 비교적 소홀한지 설명하거나 이해하려 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꺼내서 빵! 쏘기만 하면 된다. 손절이라는 총알을 맞은 사람이 아무리 나를 붙잡고 늘어져봐야 소용 없다. 그 관계는 숨만 붙어 있을 뿐이다. 결국 끝이 난다. 그렇게 이곳저곳 빵야빵야 총을 쏘며 살아왔다. 손절의 맛을 만끽해본 본 사람이라면 이 매력을 잊을 수가 없다.


  하지만 손절이 만족스럽기만 한 건 아니었다. 방아쇠를 당긴 나의 행동을 후회하고, 되돌릴 수 없음에 좌절하기도 했다. 내가 쐈으면 속이 시원하기라도 해야할텐데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찜찜했다. 왜 그럴까. 왜 그럴까. 이제야 생각해보니 이유도 모른 채 손절을 했다. 누군가 나에게 불편함과 섭섭함을 드러내면 나 또한 나의 마음을 내놓아야 하는데, 나는 그럴 용기가 없었다. 깨어진 마음을 잡는 것도, 드러내는 것도 너무 아파서 내 마음은 그대로 둔 채 관계를 스리슬쩍 놓아버리기를 반복했다.


  여전히 술과 사람 앞에서 모순덩어리가 되는 나는 ‘너 왜 그러냐’가 아니라, ‘너는 그렇구나’ 해줄 것 같은 사람을 애타게 찾고 있다. 새로운 관계에 쉽게 기대하고 쉽게 빠져든다. 그 과정에서 오래된 관계를 하나씩 잃어만 간다. 지나온 관계들이 나를 이해해 줄 수 없을 거라는 신념이 쌓이고 쌓여서 결국 털어버린다. 그 패턴을 반복하고 싶지 않지만 그렇다고 내 마음에 손을 넣어 깨진 마음을 꺼낼 자신도, 용기도, 의지도 없다. 비대해진 자아와 상처는 오늘도 내 안에 맴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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