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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호 Jul 09. 2022

내가 '책 사고 안 읽기'를 반복했던 이유

책장을 정리하며 - 책 버리고, 힘 빼고

읽지 않은 책들의 무덤이 되어가는 책꽂이를 볼 때마다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책을 읽지 않았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끼는 것 같기도 하고, 잘 정리된 책꽂이를 보며 묘한 쾌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럼에도 책을 읽어야 한다는 부담은 계속됐고, 그럴수록 책장을 펼치는 일이 점점 더 힘들어졌다. 끝까지 완독해야 한다는 압박이 시작조차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동시에 책을 읽지 않은 죄를 사할 수라도 있는 냥 새책을 사재꼈다. 하지만 책을 사모으는 일은 결코 면죄부가 될 수 없었다. 오히려 나의 죄를 점점 더 무겁게 할 뿐이었다. 


독서에 대한 갈망은 어디서부터 왔을까. 그 근원을 찾아야 했다. 


하나는 '나는 부족하다'는 신념이었다. 아는 게 없어서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대화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끊임없이 공부해야 한다고 여겼다. 이슈가 되는 일이 있거나 관심사가 생기면 관련된 책부터 사모았다. 그리고 닥치는 대로 읽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며 깨닫는 것은 내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는 사실의 재확인이었다. 알고 배우려고 할수록 내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반추하게 만드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졌다. 책을 읽어도 '나는 부족하다'는 신념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더 강해졌으므로 책을 더 사모아서 그것을 없애려 하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이젠 자포자기의 심정이 됐다. 내가 책 읽어서 뭐 해. 어차피 나는 부족하고 못난 사람인데. 근데 마음에 구멍이 났으니 그걸 안 채우고 배길 수가 있나. 책은 또 사는 거지. 그렇게 '사고 안 읽기'를 반복했다.


다른 하나는 '전공을 살려야 한다'는 신념 혹은 '저항감'이었다. 나는 국문학을 전공했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그거 해서 뭐 먹고 살 거냐'는 조언이나 잔소리 즈음되는 걸 항시 들으며 살았다. 내 마음속에서는 '국문학을 전공해서도 먹고살 수 있다는 걸 보여줄 거야!'라는 마음이 싹트기 시작했다. 어쩐지 그 말을 반박하고 싶었다. 그렇게 본격적으로 책을 사 모으기 시작했다. 수업 시간에 과제가 하나 있으면 그 작가의 책을 다 사서 읽어야만 속이 후련했고, 책의 어느 부분이 언급되면 책을 사서 원문을 확인해야 안심이 됐다. 그래야 '진짜 국문과'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졸업이 다가오고, 졸업을 한 후 서른이 다가오면서 공포는 현실이 되어 다가왔다. 


'아? 나 진짜 뭐 먹고살지?'


창작을 끝내주게 잘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에세이를 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냉철한 분석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글쓰기 실력과 미련만 남았다. 그러니 할 수 있는 건 책을 사 모으는 것 밖에 남지 않았다. 누구를 붙잡고 물어봐도 '다독, 다작, 다상량'말고는 답이 없다고 했으니까. 다작은 하기 싫고, 쓸 말도 없으니 다독을 먼저 하는 수밖에. 근데 다독을 하려면 책이 있어야 하네? 그럼 책을 사야겠다. 그렇게 리뷰를 쓰거나 비평을 한다고 해놓고 책을 사기는 했는데, 글을 쓴다고 생각하니 또 부담이 됐다. 그렇게 '책 사고 안 읽기'를 다시 반복.


그래서 나는 오늘 책장 정리를 했다. 다시는 펴보지 않을 책들, 시간이 많이 흘러서 시의성을 읽은 책들은 과감히 버리기로 했다. 글이 안 써진다고 힘줘봐야 쥐어 짜낸 거 읽는 사람들도 다 안다. 어딘가 불편하고 묘하게 매력이 없다. 그런 글은 다작해봐야 글이 안 써진다고 스트레스만 받을 뿐. 힘을 너무 주고 운동하면 부상당한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힘을 너무 주니까 '안 읽고 안 쓰기'라는 딜레마에 빠져버렸다. 글쓰기 근육 좀 풀고, 충분히 쉬었다가 부담 없는 선에서 재활 훈련부터 해야곘다. 글이 안 써진다면 너무 힘주지 말고, 슬슬 다치지 않게 조심조심 써 보자.


떠나는 길 얼굴 보기는 너무 슬퍼서 뒤돌아 보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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