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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호 Sep 19. 2023

질병과 장애는 집 안에 머물러 주세요

9월 18일 한국피플퍼스트 소속 활동가들이 고용노동부 장관 면담을 요구하며 장애인고용공단을 점거했다. 23억 100만 원이었던 ‘중증장애인지역맞춤형취업지원’ 올해 예산을 기획재정부가 전액 삭감한 예산안을 국회에 제출했기 때문이다. 이에 경찰은 활동가 25명을 연행했다.


고용노동부에서는 예산 삭감 이유로 실적 저조, 유사·중복 사업이라는 이유를 들었다. 하지만 장애인 취업 문 자체가 좁은 사회에서 미취업의 책임을 중증장애인 동료지원가 개인에게 전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게다가 고용노동부가 요구하는 실적을 채우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고, 임금 또한 지나치게 낮았다. 동료지원가들은 올해 기준 187명이 한 달에 89만 원을 받으며 60시간을 노동한다. 제도 개선 요구에도 변화가 없어 2019년에는 동료지원가가 목숨을 끊는 사건도 있었다. 당시 임금은 4대 보험을 포함해 60시간 기준 65만 9,650원이었다. 관련 내용은 비마이너 기사에 잘 설명돼 있다.


UN장애인권리협약 긴급 상황을 포함한 탈시설화에 관한 지침(2022)은 ‘당사국은 동료지원, 자기옹호, 지원집단과 기타 지원 네트워크와 자립생활센터에 투자해야 한다. 당사국은 이러한 지원 네트워크 개발을 장려하고 인권, 권익옹호, 위기지원 교육을 만들 때, 이에 대한 재정적 지원과 자금 접근을 제공해야 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동료지원’이라는 단어 사용으로 동료지원가의 필요성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럼에도 기재부는 중증장애인지역맞춤형취업지원 사업 예산을 전액 삭감했다.


한국은 2008년 12월 UN장애인권리협약(이하 UNCRPD)을 비준했다. 즉, 국제법인 UNCRPD는 헌법 제6조 1항에 따라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지닌다. 또한 2022년 12월 8일, 제400회 국회(정기회) 제 14차 본회의에서 197인 중 196인의 찬성으로 UNCRPD 선택 의정서 가입 동의안을 가결했다. ‘선택의정서’는 협약에서 규정한 권리를 침해받은 자가 UN장애인권리위원회에 권리구제를 요청할 수 있음을 명시한 부속문서다. 참고로 이 동의안이 가결되는데 14년이 걸렸다. 한국 정부가 국제 인권 규범을 준수하겠다는 의지를 국제사회에 밝힌 것이 요식행위가 아니었길 바란다.


동료지원가의 필요성은 심리사회적 장애에도 적용된다. 일례로 보건복지부는 ‘동료지원가 양성 표준교육과정’을 개발하고 운영 체계를 구축해 동료지원가를 양성하고 있다. 나도 국가 주도의 동료지원가 제도 마련, 자립생활센터 운영, 당사자가 교육하는 학교, 직장에서의 정신질환 교육 의무화를 통해 정신질환 및 고립·은둔 청년에 대한 편견을 해소하고, 당사자 맞춤형 일자리를 창출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노동은 자립을 위한 경제적 여건을 마련하는 동시에 지역사회와 함께하고, 관계 속에서 자신의 자아를 실현하는 방식이 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비마이너 기사에 따르면 2년 전부터 동료지원가로 활동하고 있는 활동가는 “저에게 동료지원가는 단순한 일자리가 아닙니다. 동료 당사자분들과 함께 활동하면서 제게 있던 우울감도 많이 해결됐습니다. ‘항상 내가 집에만 박혀 살아야 하나, 남들은 다 돈 버는데 나는 쓸모없게 살아야 하는구나…’ 이 일을 하며 그런 생각을 조금이나마 떨칠 수 있었는데 이제 다시 집안에만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너무 무섭습니다. 그런 무서움을 다른 분들도 느끼고 있습니다. 함께 싸워주십시오.”(강혜민 기자, ‘내년도 동료지원가 예산 전액 삭감, 발달장애인 활동가 25명 폭력 연행’, 비마이너, 2023.09.18.)라고 말했다. 활동가의 말처럼 일자리는 단순히 돈벌이에 그치지 않는다. 우울감과 자존감, 고립을 비롯한 심리사회적 요인들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올해는 한국정신장애연대 카미에서 실시한 동료지원가 양성과정 교육을 이수했다. 현장을 경험하지 않은 정책 제안은 탁상공론에 그칠 뿐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동료지원가를 채용하는 곳이 얼마 없다. 올해 4월 정신건강복지센터에서 일하는 동료지원가에게 급여를 지원하도록 하는 개정안이 채택됐지만 공포 후 2년 후에 시행되며, 관련 예산이 삭감되고 있는 정책 기조를 고려한다면 해당 정책이 자리 잡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간신히 집 밖으로 나온 당사자들이 다시 집 안으로 내몰린다. 숫자와 예산이 말한다. 질병과 장애는 집 안에 머물라고. 보이지 않는 곳으로.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으로.



* 관련 기사

1. 강혜민 기자, '내년도 동료지원가 예산 전액 삭감, 발달장애인 활동가 25명 폭력 연행', 비마이너, 2023.09.18, URL : https://www.beminor.com/news/articleView.html?idxno=25434


2. 강혜민 기자, '[인터뷰] 발달장애인이 수갑 차고 장애인고용공단을 점거한 이유', 비마이너, 2023.09.18., URL : , https://www.beminor.com/news/articleView.html?idxno=25435


3. 강혜민 기자, '동료지원가 예산 23억 전액 삭감, 장애인 187명 해고 위기', 비마이너, 2023.09.12, URL : https://www.beminor.com/news/articleView.html?idxno=25419


4. 이가연 기자, '과도한 업무에 시달리던 동료지원가 스스로 목숨 끊어', 비마이너, 2019.12.09., URL : https://www.beminor.com/news/articleView.html?idxno=14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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