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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정 May 04. 2020

나, 학생회장 엄마다.

아마 내가 가졌던 타이틀 중에 가장 세속적인 타이틀인 것 같다.


다음 학기부터 나, 학생회장 엄마다.


난 아이 학교 일에 정말 1도 관여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가고 나서는 선생님과 있는 정례 면담도 한 번도 간 적이 없으며, 심지어는 학부모들과 학교가 소통하고, 아이의 성적을 볼 수 있는 네트워크 아이디도 안 만들었다. 초등학교 졸업 이후 성적표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학생회장 선거 유세 동영상 찍는다고 하길래, 방에 들어가서 잤다. 오늘과 내일, 학교 선생님들과 온라인 면담하는 날이라고 스케줄 잡으라고 며칠 전부터 이메일에 문자가 왔다. 오늘 아이에게 "내가 뵙고 이야기 나눠야 할 선생님이 있니?" 아이는 없단다. 이것도 건너뛴다. 참고로 아이는 입시를 반년 앞두고 있다.


이미 축구부 주장, 중학교 배구부 학생 코치, National Honor Society (선출직이라는데 뭐 하는 건지 잘 모름), 기숙사 학생 대표, 자기가 직접 만든 동아리 action for change 회장까지 5-6개의 리더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데, 드디어 정점을 찍었다. 아이가 손을 들고 자신을 뽑아달라고 하였고, 고등학교 학생들이 투표로 뽑아주었다. 몇 년간 학생회 일을 해오던 친구들도 있는데, 그렇지 않았던 그녀가 선출되었다.

나는 리더십 코치이다. 아이 키울 때, 궁금한 것이 있으면 나는 관련 논문과 전문서적을 찾아보았다. 피아제의 인지 발달도 아이를 키우면서 제대로 공부해서, 아이와 이론을 더 잘 알 수 있게 되었다. 왼손잡이를 고쳐주어야 하나, 그대로 두어야 하나, 역시 관련 논문을 찾아서 그대로 두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관련된 수많은 잔소리도 다 막아주었다. 오바마도, 부시도 왼손잡이라고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내가 공부하고 아는 것이 리더십이니, 주로 그쪽으로 자연스럽게 키워졌을 것이다.


사람들은 엄마 아빠의 좋은 유전자와 환경을 타고났으니, 알아서 잘 클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왜 그 영향이 없겠는가? 하지만, 크는 동안은 나의 아이도 다른 아이들처럼 여러 위기와 힘든 과정이 있었다. 한국에서 중학교를 다니다가 아빠 따라 잠시 미국에 간다고 서류를 하러 갔더니, 아이의 영어 선생님이라는 교무주임 선생님은 "다시 우리 학교 다니려거든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하라"라고 나에게 말했다.

내가 아이가 미국 생활을 하고 대다수 아이들과 다른 초등학교를 다니다 와서 적응에 문제가 있었나 보다고 알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옆에 있는 선생님은 "한국에서 적응 잘하는 애들이 미국에 가서도 적응 잘한다. 한국에서 적응 못하는 애가 무슨 미국에서 적응을 할 수 있겠냐"라고 했다. 싸울 수 없어 서류만 들고 그냥 나왔다. 학부모에게 저런 이야기를 하는 선생이 아이에게는 대체 어떻게 해왔을까 눈물이 났다. 애가 왜 어깨가 오글아 들었는지 이해가 갔다. 필요 서류 중 하나인 성적표를 보게되었는데, 너무나 낮은 성적표를 보면서 화가 나기보다 이렇게 재미없는 그러면서 구박까지 받으며 학교 생활을 했을 아이때문에 가슴이 무너졌다. 


아니, 내가 낸 세금으로 운영되는 의무 교육 공립 중학교도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못 다니는가? 선생이라는 사람이 아이들 적응하는 걸 도와줄 생각은커녕 13살짜리 미래까지 저주하는가? 나는 아직도 분노가 치민다. 나 같은 학부모에게도 저렇게 하는데, 배움이 길지 않은 취약한 학부모에게 선생들이 도대체 어떻게 할까. 나는 우리나라 교육에 유감이 굉장히 많다.


아이가 중학교에 입학하던 해 3월 말에 엄마가 대장암 4기 수술을 받으셨다. 엄마가 수술하시던 날 동생은 멕시코 주재원을 떠났다. 아버지는 거동이 불편하시다. 엄마의 암 선고와 수술은 나에게 엄청난 정신적 충격이었다. 나는 내 슬픔과 화와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혀 나 조차도 주체가 안되었다. 나는 절대 엄마를 그냥 보낼 수가 없었다. 나는 실향민으로 무남독녀인 엄마의 활동이 가능한 유일한 법적 가족으로 1년을 겨우 겨우 버텼다. 아버지를 돌보던 엄마가 병원에 계시고 퇴원 후에도 몸이 성치 않으시니, 우리 집 살림을 도와주시는 분을 부모님 집에 보내드리고, 내가 살림까지 했어야 했다. 아이를 신경 쓸 틈이 없었다. 그동안 아이는 그런 학교 생활을 하고 있었다. 나는 교육학자로서 교육심리 전문가로서 어떻게든 정해진 시스템에서 잘 키워보고 싶었다. 하지만 울면서 아이를 외국인 학교를 보내기로 결심을 했다.


사춘기를 혹독하게 겪은 고등학교 시절에 둘 다 우울증 약을 먹으며 몇 달간 정신과에서 가족 치료도 받았다. 몇 달간 모두 최선을 다해 상담을 졸업을 했다. 불과 1년 전 일이다. 내가 모든 출장에 딸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이는 다음 생도 "내 엄마" 해달란다.

아이가 회장이 되었다고 하자, 이 모든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서 눈물이 난다. 엄마는 이제 재발 없이 수술을 받으신지 5주년이 되었다.


나 그래도 잘 살아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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