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과 가족
3번의 입퇴원과 끊임없는 질병과 고통에 시달린 3달의 시간은 나에게 많은 것을 알게 해 주었다. 내가 모르던 나를 많이 발견을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서 감을 잡을 수 있었고, 일종의 신념도 가지게 되었다. 맨프레드 교수님의 책을 번역하며 40대에 간단하게 심장이나 뇌에 문제가 생겨서 쓰러지는 것은 행운이라는 글귀를 보고 나도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곤 했다. 나에게도 그 행운이 찾아왔던 것인가 싶다. 실체는 모르고, “그럴 수 있겠다”싶었던 생각이 큰 의미로 다가왔다. 그것을 행운으로 만드는 것은 결국 나다. 나의 부모의 병에 대한 태도를 돌아보며, 나의 병에 대한 태도를 정립할 수 있었다.
나의 아버지는 40대에 직장을 그만둘 정도로 아프셨고, 한 달이 넘는 시간을 입원을 하시고서는 일을 접고 사셨다. 그는 늘 아팠고, 각종 질병에 시달리고, 나이가 점점 들면서는 1년에 몇 차례 입원은 아무것도 아닌 일들이 되어갔다. 내가 두 번의 유학을 갈 때마다 곧 아버지가 죽을 거 같으니 유학을 가지 말라고 반대하거나, 만류하셨다. 박사를 받은 지 10년이 다 되어가는데, 아버지는 아직 살아계신다. 그가 쏟아내는 독설과 오로지 본인에게만 향하는 연민은 나를 그에게서 멀어지게 했다. 그가 말하는 모든 원인은 “병”이었다. 30년이 넘었다. 나는 병, 아픔이라면 아주 지긋지긋했다. 40대 초반에 생긴 당뇨, 50대에는 뇌졸중을 겪었지만 마지막 입원을 하시기 전까지 술과 담배를 놓지 않았고, 운동을 하는 것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내가 첫 번째 자궁 근종 수술을 했을 때 나는 “그처럼” 앓아 누었다. 아픔을 느끼는 것이 내가 하는 전부였다. 그리고 한 달 후에 일어났을 때는 근육이 다 빠져서 조금만 서있거나 걸어도 다리가 아팠다. 힘들다 소리를 입에 달고 6개월을 지내고 나니 일상을 회복할 수 있었다.
5년 전 엄마는 대장암 4기 진단을 받자마자 금식으로 시작하여 수술과 항암제 치료를 받으셨다. 이듬해에는 뇌에 스탠스를 넣는 수술을 받으셨다. 이어지는 수술과 치료로 엄마의 체력은 바닥으로 떨어졌고, 각종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감기도 잘 안 걸리고, 늘 아빠의 병 뒤치다꺼리를 하던 엄마가 암에 걸린 것이다. 나의 기본 도식에 의하면 엄마는 앓아누워야 한다. 간병을 받아야 한다. 가족들이 혹은 가족 중 누군가가 자신을 희생하며 그를 돌보아야 한다. 각종 짜증과 독설을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고 참아주어야 한다. 하지만, 엄마는 그렇지 않으셨다.
엄마의 암 선고에 첫 번째 든 나의 감정은 슬픔이 아니라 분노였다. 나도 놀랐다. 엄마의 죽음이 두려운 나는 엄마에게 ‘그동안 이렇게 나를 섭섭하게 하고 그냥 죽을 거냐’고 화를 내며 따졌다. 나는 아픈 아빠를 위해 희생과 이해를 강요당하던 세월이 너무 화가 났다. 내가 결혼을 할 당시 우리 집은 서울 시내에 아파트가 몇 개가 있어도, 나에게 집이나 월세 보증금은커녕 신혼여행비도 해주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 이후 집안 식구들의 반대는 아랑곳하지 않고, 서서히 집을 팔아 주식으로 탕진하며, 사는 집을 제외한 모든 재산을 날렸다. 우리 식구 누구도 그 부를 누린 자가 없었다. 가난한 유학생활, 결혼 이후 계속된 월세 살이 등에 대한 원망이 쏟아졌다. 나는 내 아이가 한 끼 굶으면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데, 엄마 아빠는 집을 몇 채나 가지고 있으면서 월세 사는 딸이 불쌍하지도 않았냐고 울부짖었다. 시집 살이 1년 만에 별거를 하고, 10년의 결혼생활을 마감한 나는 집만 있었더도 시집살이 안 해도 되고, 이혼 안 할 수 있었다고 원망을 쏟아냈다. 번 모든 돈을 아버지에게 가져다주고, 아버지의 병을 핑계로 자식들이 필요한 것은 하나도 해주지 않은 것이 아니었냐고 말이다. 엄마가 죽고 나면 그 아버지를 떠맡아야 하는 것도 정말 미쳐버릴 일이었다. 엄마는 아빠처럼 그게 아픈 엄마에게 할 소리냐고 하시지 않았다. 대신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하셨다.
대장암 수술 후 퇴원하실 때, 나와 올케가 고생했다며 수백만 원이 든 봉투를 건네셨다. 물론 간병인은 따로 있었다. 간병인 비용은 나와 동생이 나누어서 냈다. 가족을 돌보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고마워해야 할 일이라고 엄마는 생각하셨나 보다. 그리고 엄마가 운영하는 가게는 엄마 없이도 돌아갔다. 엄마가 없는 동안 이익을 거의 내지 못했다. 그래도 맡기고 엄마는 회복에 힘쓰셨다. 그리고 항암치료가 끝나면서 조금씩 가게를 돌보셨다. 일을 놓지 않았다.
어느 날 대학원 수업에 갈 준비를 하는데, 엄마가 다리가 이상하다며 응급실에 같이 가 달라고 하셨다. 웬만한 일 아니면 그런 부탁을 하는 엄마가 아니다. 정말 심각한가 보다 싶었다. 마침 수업은 특강이라서 다른 교수님을 초청했는데, 소개도 못 해 드리고 알아서 해달라고 부탁하고 엄마 곁을 지켰다. 허리 디스크란다. 허리가 오랫동안 안 좋으셔서,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하나의 병이 시작하면 줄줄이 병들이 딸려오는 것을 아버지를 통해서 보았다. 한 달 후 수술 날짜를 잡고 퇴원을 했다. 그런데 이 대단한 엄마는 한 달 만에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혼자서 각종 재활을 해서 디스크 완치를 해냈다. 입원하려고 병원에 갔다가 완치 판정을 받고 돌아오셨다.
신경과에 입원을 할 때 나는 이미 한 3일 정도 지속된 왼쪽 어깨와 목, 그리고 머리 쪽에 통증을 가지고 있었다. 간호사와 의사 선생님들을 볼 때마다 그 고통을 호소했다. 별말씀이 다들 없었다. 처치가 들어갔는지, 아니면 중요한 게 아니라서 대구가 없는 건지 갑갑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진통제가 내 몸에 흐르고 있었다. 나는 일어섰다. 그리고 병원 복도를 걸었다. 30분을 링거 거치대를 밀면서, 슬리퍼를 신고 걸었다. 그 고통이 사라졌다. 그리고 의학이 고치는 방법이 있고, 몸을 움직여 고치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어떤 의사들은 두 번째는 모르고 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게다가 대학병원에서 목숨이 오가는 심각한 병들을 다루는 사람들은 경미한 고통을 다루는 간단한 방법은 아예 관심도 없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자궁에 혹이 있다고 자궁을 적출하라고 한다. 의사 입장에서는 그렇다. 뿌리를 뽑아야 “완치”를 달성할 수 있으니 말이다. 처음 만났던 은퇴를 몇 년 앞둔 교수님은 환자가 들어와 앉아있는데도 핸드폰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컴퓨터 화면을 쓱 보더니 “아니, 이런 걸 왜 아직 갖고 있어. 드러내야 해!”라고 말했다. “무서워서요.” 대답했더니, “무섭긴 뭐가 무서워? 애 날 거야? 애 날 것도 아니면서 이런 걸…. 에잇” 마치 못 볼 것을 본 사람처럼 이야기했다. 너무 모욕적이었다. 진료 후 수술 날짜를 잡으라고 온 간호사에게 “수술을 하더라도 저 선생님에게는 안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선후배 위계가 강한 병원 의사 조직에 굉장히 많은 사람을 곤란하게 하면서 젊은 선생님으로 담당 선생님을 바꿨다. 그분은 친절하시긴 했지만, 하는 이야기는 같았다. 나는 두 번 산부인과 외래를 보았지만, 혹이 몇 개인지, 크기가 어떤지도 이야기를 듣지 못했고, 수술을 했을 때와 안 했을 때의 좋은 점이나 위험 요소 등에 대해서도 전혀 듣지 못했다. 나는 내가 어떻게 해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자궁을 떼어내는 것에 대해서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의사들에게 내 몸과 내 일상과 내 삶을 맡기기 싫었다. 의상 수선을 할 때도 저렇게 쉽게 말하지는 않겠다 싶었다.
나는 의사나 현 의료체계에 대한 불만이 있는 사람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믿을 만한 집단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 병원 출신 의사와 10년을 살았다. 난 그들은 그들의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유방암 전문의인 전남편은 자궁근종이 생기면 호르몬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고, 그러면 난소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자궁을 드러내면서 난소까지 드러내란다. 기가 막혀 말했다. “아이고, 왜 유방도 이제 애 날 거 아니라 쓸모도 없으니 유방도 잘라내라고 하지! 배 연 김에 맹장도 잘라내고.” 하지만, 내 몸은 내 것이고, 내 삶의 주인은 나다. 병을 일으키는 기관이 아니라, 내 살과 피이다. 애를 낳을 생각이 없더라도, 나는 자궁을 드러낼 생각이 없다. 여성성의 상징이기도 하고, 아이와 나의 연결을 의미하는 기관이다. 아이가 독립하여 나가도, 아이의 방을 정리하지 않는 부모의 마음 말이다. 인간의 존재의 이유가 종족번식이라는데, 자궁이 없어 종족 번식력이 0이 된 인간이 되고 싶지는 않다. 0.0000001과 0은 다르다. 결국, 나는 우선 자궁을 지키는 데에 성공을 했다.
암 같은 심각한 병이 아닌, 근종 수술만 하루에 몇 건씩 하는 근종 수술 전문가를 만나니 오히려 이야기가 잘 되었다. 자궁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되는 근종만 제거하고 지켜보고 최후의 순간에 결정을 내리는 것으로 이야기가 되었다. 운이 좋으면 폐경까지 그냥 갈 수 있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소 잡는 사람이 닭도 잘 잡는 것은 아니다. 평생 큰 병이 없어도 자주 아프고, 병원에서 하는 소위 “간단한” 검사와 “간단한” 병의 약 처방에도 일상이 무너지는 부작용을 모두 겪는 나 같은 약골은 내가 알아서 내가 더 잘 돌보아야 한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되었다. 의학이든, 사회 과학이든 결국은 확률에 관한 이야기이다. 의사는 그 확률에 의거하여 프로토콜대로 진행한다. 그런데 환자인 내가 그 평균의 인간이 아닌 게 문제다. 그리고 큰 병원 의사야 암도 아닌 근종으로 자궁 드러내고 3일 입원해서 퇴원하는 게 뭐가 대수이겠는가. 하지만, 치료의 부작용을 오롯이 견뎌내고, 일상이 무너지고, 평생 한 번 있는 고3을 전염병을 조심하느라 정상적으로 지내고 있지 못하는 딸아이를 엄마 수발까지 들게 해야 하는 나의 삶은 그들에게 고려 대상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한번 알게 되었다.
나는 이제 건강과 병에 관해서 어떤 것도 자신할 수가 없다. 계속 가료 중이다. 하지만, 두렵기보다는 내가 알아서 맞서서 다스려야 한다는 책임감, 그리고 내가 주인이 되어 다스릴 수 있다는 자신이 어느 정도 생겼다. 엄마가 아플 땐 나는 엄마가 의사 말을 무조건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디스크를 스스로 고쳐보겠다고 의기양양해서 나에게 중간보고를 하는 엄마가 솔직히 과학보다는 민간요법을 맹신하는 “무식한 노인네”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병원이, 의사가 하는 말이 오히려 스스로를 한계를 형성하고 병에 굴복하게 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10마일 달리기에서 인간의 한계가 40분으로 설정되자 40분 이하의 기록은 오랫동안 깨지지 않았다. 하지만, 한 명이 그 40분 기록을 깨자, 그 해에 10명이 넘는 선수가 40분 안쪽의 기록을 낸 것처럼 말이다. 나의 경험을 통해 엄마와 아빠의 병과 그 병을 대하는 태도를 돌아보고 그것이 나에게 의미하는 것을 찾게 되었다.
그러나 이 역시 프로세스 중이다. 삶에 내가 단정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 머리로 이해하는 것도 경험을 하게 되면 더 뼈저리게 느낄 수 있고, 그리고 그것이 성의 있는 경청자나 공감자에게도 사실은 공감할 수 있는 한계 밖의 것이라는 것도 머리에서 가슴으로 쑥 들어왔다. 내 아픔을 통해 가족과 다른 이들의 삶을 더욱 이해하고, 나의 모자람을, 인간의 한계를 하나하나 더듬어 가고 있다. 삶이 가을처럼 익어가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