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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정 Sep 13. 2020

두 달간 세 번의 입원과 퇴원

미드라이프 크라이시스

6월 말 어느 날. 눈을 뜨니 어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몸을 일으켜 화장실을 가려고 하는데 생전 처음 겪어 보는 세상이 뱅뱅 도는 기분이다. 벽을 짚지 않고서는 화장실에 갈 수 없었다. 시간은 6시 반. 오후에 그룹 코칭이 잡혀 있어서 그전에 해결을 하고 일정을 하기 위해서 서둘러 응급실에 가야겠다 생각이 들었다. 일반 병원이 열 때까지 기다리는 것보다 빨리 해결을 하기 위해서였다. 고3인 딸내미를 깨워서 함께 택시를 타고 대학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온종일을 응급실에서 보내고 밤 11시가 다 되어서 “뇌졸중 집중 치료실”에 입원을 했다. 그렇게 2달여에 걸친 크라이시스가 시작되었다. 

지금 돌아보면 그렇다. 시작은 자궁 선근종이다. 자궁 안에 뭔가 안 좋은 것이 있는 것은 알았다. 생리양이 많아지고, 생리통이 극심하다. 7년 전 자궁근종 수술을 한차례 한 적이 있어서, 다시 병원에 가면 또 수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끔찍했다. 근종 수술 후 한 달을 누워 지냈고, 체력을 회복하는 데까지는 근 6개월이 걸렸다. 그리고 나는 너무 바빴다. 아이를 키우고 이제야 일 답게 일을 하고 있었고, 인정을 받고 이곳저곳에서 나를 찾았다. 나는 일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리고 주택 구입 대출금도 갚아야 했다. 그렇게 이리저리 미루다가 출혈이 점점 심해져서 동네 산부인과를 찾았다. 근종이 제법 큰데 6개월 지켜보고 더 커지면 수술을 해야 할 것이라고 한다. 생리의 양이 많으니 피임약을 먹어보자고 했다. 그러면 생리의 양이 줄 것이라고 말이다. 

응급실에서 뇌 CT에 혈전이 보인다고 했다. 그런데 위험하지 않고, 어지러움은 귀에 문제가 있으니 동네 이비인후과에 가보라고 하면서 퇴원을 하라고 했다. 돌아서던 20대의 신경과 주치의 선생이 물었다. “혹시 피임약을 드시나요?” 하긴 다 큰 딸아이를 동행한 내가 피임약을 먹을 거란 생각을 진작에 못했을 수 있다. “네” 그러자, 잠시 후 다시 와서는 입원을 하라고 했다. 이렇게 큰 대학병원은 설명이 잘 없다. 검사와 진단, 그리고 처치. 

다음 날 극심한 빈혈, 자궁 근종, 뇌 혈전증, 메니에르 병 진단이 쏟아졌다. 어지러움은 귀와 관련된 메니에르 병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병은 중요하지도 않은지, 레지던트 선생이 보는 일반 진료로 진행을 했다. 피임약의 부작용이 혈전이 생기는 것이라고 한다. 피임약을 끊으면 피가 또 엄청 쏟아질 텐데, 빈혈이 극심하니 입원을 유지하며 지켜봐야 한다 했다. 그리고 자궁근종이 있으니 다음 주에 자궁을 적출하는 수술을 하고 퇴원하라고 한다. 코칭과 강의 일정이 계속 있는, 고3 딸을 둔 엄마인 나에게는 청천벽력이었다. 이미 두어 개의 일정을 조정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야 했었다. 지나치게 불친절한 산부인과 선생님에 대한 불신을 드러내고, 갖은 인맥을 동원하고, 주치의 선생을 엄청나게 열심히 설득해서 일단 닷새만에 퇴원을 했다. 수술은 너무 중요한 일정이 있으니, 그것만 마무리하고 마음 편히 해도 되지 않느냐고 말이다. 자궁 적출 수술 날짜를 잡고, 수술 전 검사를 모두 받고 수술 날짜에 입원 안내까지 받았다. 빈혈 때문에 수혈을 받고 가라고 해서, 짐을 쌌다가 다시 누웠다. 그러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수술은 취소되었다는 통보가 오고, 수혈도 취소가 되었다. 퇴원 후 외래에서 다시 수술 날짜를 잡으라고 한다. 이비인후과 약과 빈혈약부터 피와 혈관 관련된 약들을 처방받아 퇴원했다. 이비인후과 약은 부작용이 심했다. 하지만 불면, 심계 항진 등의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계속 투약을 해야 한단다. 

퇴원 후 바로 산부인과를 찾았다. 7년 전 수술을 해주신 친절한 선생님은 내 사정을 이야기하니, 근종이 3개가 있는데, 출혈을 일으키는 선근종만 우선 간단히 제거하는 시술을 하고 나머지는 애 입시 끝나면 다시 보자고 해주셨다. 가장 빠른 시일에 시술 날짜를 잡았다. 며칠 후 다시 몸에 이상이 왔다. 조금만 걸어도 쓰러질 정도로 어지럽고 숨이 찼다. 단순히 체력이 떨어진 거라 생각했다. 그러다가 주방까지 걸어가서는 식탁에 엎어졌다. 물 잔 위에 얼굴을 박았다. 심각하다는 생각에 또다시 응급실에 들어갔다. 선천성 심장기형-부정맥이 있는데, 평소에는 심전도에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응급실 심전도에 부정맥이 떴다. 또 입원이다. 산부인과 시술은 미뤄졌다. 각종 검사를 했다. 큰 문제는 없으니 퇴원을 해도 좋다고 한다. 퇴원하기 전 날, 심장 조영 검사를 해보자고 한다. 아주 간단한 검사이고, 가능성은 낮지만 문제가 있으면 바로 조치도 가능하니, CT는 건너뛰고 진행하면 좋겠다고 했다. 오른쪽 팔 동맥에 카데터를 넣고 간단한 검사가 진행이 되었다. 그리고 다음 날 코딱지만 한 알약을 받아 퇴원을 했다. 또 자궁 시술 날짜를 잡았다. 

퇴원하고 3일째 되는 날부터 오른쪽 팔에 멍이 올라오면서 극심한 통증이 밀려왔다. 간호사실에 연락을 해도 이런 경우가 잘 없는데 아프면 타이레놀을 먹으란다. 아는 의사 선생님들도 그럴 수 있으니 타이레놀을 1,000 밀리그램씩 하루 세 번 먹으란다. 2주를 그렇게 버텼다. 오른손을 거의 쓸 수가 없었다. 숟가락을 겨우 쓰는 정도였다. 컴퓨터 자판은 물론, 카톡이나 문자도 거의 할 수가 없었다. 꼭 써야 할 때는 왼손으로 전화기를 움직여서 오른 손가락에 갖다 대는 수준이었다. 통증에 잠을 깨기 일쑤였다. 일상이 모두 무너졌다. 샤워도 제대로 못했다. 중간중간 병원에 갈 때면, 모든 의사 선생님들께 이 고통을 호소했으나, 그 누구도 그것에 대해서 말씀해주시는 분이 없었다. 너무 심해서 심장내과 예약을 잡아도 당장 진료를 볼 수가 없는 현실이다. 상황이 다 마무리되고 본 심장 내과 선생님도 “왜 그러지? 혈관이 가늘어서 그런가?”하고 만다. 

선근종 시술을 받아야 했다. 예약한 날 새벽에 일어나서 병원을 향했다. 전날 저녁 컨디션이 안 좋았는데, 스트레스 때문일 거다. 전날 그룹 코칭을 할 때, 좀 무리를 했나 보다 싶었다. 병원 입구에서 열화상 카메라를 지나 간호사실에 입원을 하러 올라갔다. 열이 39도를 넘는다. 시술이 불가능하다. 바로 돌아섰다. 동네에 중형 병원을 찾았다. 역시 입구에서 하는 비접촉 열검사는 통과다. 외래 접수를 하고 간호사실에 가니 열이 너무 높아서 진료를 받아줄 수 없고, 코로나 검사를 받으러 가라고 한다. 또 대학병원을 찾아 코로나 검사를 했다. 코로나는 음성이 나왔지만, 열이 높으면 시술을 할 수가 없다고 한다. 원인도 모르지만 열이 높으니 그 어떤 병원에서도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닷새를 또 쌩으로 타이레놀로 버티며 보냈다. 39도가 넘을 때도 있었고, 중간중간에 해열제 덕에 열이 내릴 때는 온몸이 땀범벅이 되었다. 머리가 한 움큼씩 빠졌다. 더 무서운 것은 이 고열의 원인을 알 길이 없다는 것이었다. 심각한 병이 고열로 시작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이 없었다. 어떤 병원에서는 패혈증 이야기까지 나온다. 

해열제를 권장량의 두배를 먹으면 2-3시간은 작용을 하는데, 2-3시간 이후에는 열이 오른다. 집에 있을 때는 이 온탕과 냉탕을 오가며 버틴다. 하지만, 일은 그럴 수가 없지 않나. 이미 두배를 먹은 해열제를 또 먹을 수 없어서 복용 후 1-2시간 후에는 다른 성분의 해열제를 일반 권장량의 두배를 먹었다. 지인 의사들에게 묻지도 않았다. “일이 건강보다 중요하냐? 집에서 쉬어라.” 의사라면 그렇게 이야기하니까 말이다. 우리 코로나 방역처럼 말이다. 건강이 가장 중요하고, 목숨이 가장 중요하다는 가치를 가졌으니 의사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런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삶에 건강이 언제나 유일하게 중요한 요소는 아니다. 건강이 가장 중요할 수 있다. 하지만 2순위 3순위가 없는 건 아니다. 때론 2,3 순위가 1순위보다 중요하다. 나에게는 나를 믿어주는 고객들과의 약속. 그리고 고3인 딸아이의 뒷바라지가 죽을병이 아니면 우선순위가 되기도 한다. 

다행히 고열은 수그러들었다. 그리고 희한하게 팔의 통증도 사라졌다. 그리고 드디어 몇 차례를 미룬 선근종 시술을 했다. 수술장에서 마취과 선생님과 산부인과 선생님은 나의 부정맥 상태에 대해서 심각한 대화를 나누셨다. 100% 깨끗한 상태는 아니지만 마취과 선생님은 수술을 결정하셨고, 그렇게 시술을 마쳤다. 

지난 두 달간, 괜찮아진 것 같았지만 며칠 후 안 괜찮은 일들이 너무 많았다. 퇴원을 했지만, 퇴원을 한 것 같지가 않았다. 나는 나의 몸에 극도로 예민해져 있었다. 간간히 어지러움이 느껴지는 듯했고, 심장이 너무 뛰는 것 같기도 했다. 머릿속에 공기가 가득 찬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비명을 지르며 울기도 했다. 일반 병원이 문을 닫는 주말에는 아파서 응급실을 가고, 그리고 또 입원할까 봐 더더욱 예민해졌다. 시술 후 안정을 기다리는 일주일을 보내고 나서 나는 일어섰다. 사실 누워있는 것이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돌보아야 할 극심한 고통이 사라지자, 몸의 작은 불균형도 나에게 엄청난 공포를 몰고 왔다. 이러다가 공황장애가 오지 싶었다. 

강남에 있는 헬스장에 PT를 등록했다. 아직 동네에 다니던 필라테스 PT 가 몇 차례 남아있었지만, 뭔가 임팩트 있는 것을 하고 싶었다. 첫날 운동을 다녀와서 근육이 뭉치고, 근육통이 몰려왔다. 그래도 또 갔다. 그렇게 3번을 갔는데, 코로나 때문에 2.5단계 거리두기를 시행한다고 헬스장이 문을 닫아버렸다. 그래도 이렇게 일어섰는데, 여기서 또 멈출 수는 없었다. 하루에 1-2시간을 걸었다. 절친 교수님이 함께 해 주셨다. 빠르고 힘차게 걷는 그녀 옆에서 나는 힘들어 말 수가 줄었다. 하지만, 그렇게 걷고 들어오면 두려움 없이 잘 수가 있고, 몸에 예민해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머릿속에 공기가 가득 차는 듯한 느낌은 사라졌다. 어떤 한 병이 잦아든 모양이다. 며칠 지나자 비가 오면 우산을 들고서 걸었다. 그녀와 함께 걸을 때면, 중간에 신세계 강남점에 들러 VIP 고객 라운지에서 제공하는 디카페인 아이스 카푸치노를 얻어 마실 수 있었다. 이후 나 혼자 걸을 때도 집에 들어가는 길엔 커피숍에 들러 테이크 아웃을 해서 마셨다. 별도장을 받는 어린아이의 마음이 생겼다. 그리고 약간의 허기를 달래주기도 했다. 

그러면서 건강보조식품들을 먹기 시작했다. 신경과를 퇴원하면서 약사는 건강보조 식품을 먹지 말라고 했다. 독한 이비인후과 약을 끝내고, 이제 혈관 관련된 약만 먹고 있으니 괜찮으려나 싶었다. 몸에 기운이 없고, 머릿속은 탈모로 인해 휑하고, 얼굴은 계속 부어 있었다. 누구를 만나는 것이 두려울 정도였다. 음식으로는 해결이 안 되었다. 결국 각종 영양제 건강 보조식품을 털어 넣기 시작했다. 선물을 받아도 몇 번 먹고 방치해 두었던 영양제 들을 정리하고 먹을 수 있는 건 다 먹었다. 정말 신기하게 바로 다음날 얼굴에 부기가 쏙 빠졌다. 주름이 옅어지면서 부기가 빠지니, 희망이 보였다. 나는 그렇게 매일 오후 3가지 즙과 10알 정도의 영양제를 털어 넣고 2시간을 걷는다. 이제 “저 이제 괜찮아요.”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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