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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정 Jun 08. 2020

진지한 삶의 기쁨

진지충을 위한 변명

중학생 시절 체육시간에 선생님이 시범을 보이신 탈춤 동작을 매우 열심히 따라 하고 있었다. 동작이 아주 컸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다가 뒤쪽에서 키득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뒤를 돌아보며 “왜?”라고 묻자 아이들은 “너무 진지해서”라고 대답했다. 내가 하는 동작이 웃긴가 싶었더니, 그게 아니라 하라는 대로 곧이곧대로 하는 모습이 웃기다는 것이다. 이게 요즘 얘기하는 진지충이다. 뭘 그렇게 진지하게 하냐고 비웃는 것이다. 나는 아직도 진지충이다. 


강의를 하면서 비전이나 가치의 중요성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먹고살기 힘든데 그게 뭐가 중요하냐? 그런 게 효과가 있기나 하냐? 그런 거 누가 신경 쓰냐? 고 한다. 하지만, 그 밑에 깔려있는 태도는 그날 진지한 태도를 비웃는 중학생들의 태도와 일맥상통한다. 뭘 그렇게 진지하게 사느냐는 것이다. '그냥 먹고사는 것이지 말이다'. 그리고, '저거는 먹고살만하니까 그런 거다'. '미국이니까 되는 거다'. '나도 돈 있고, 저만큼 성공하면 그렇게 할 거다' 라고 말한다. 


그렇게 살 수도 있다. 대충 하는 것, 열심히 하지 않는 것이 쿨 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럼 나는 말한다. 

“우리 한번 사는 거다. 그냥 살다가 가면 억울하지 않나? 한 끼를 먹더라도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어차피 일터에서 일해야 하는 것 내가 원하는 꿈을 이루는 활동이라고 생각하고, 어차피 해야 하는 일 고객과 사회를 위해서 일한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좋나? 우리가 지금 굶어 죽는 세상도 아닌데, 먹고사는 것 때문에 내 삶을 내려놓으면 너무 속상하지 않나?”

나는 그런 인생의 주인의식이 없는 사람들의 생각이 노예 근성이 아닐까 생각한다. 시켜서 억지로 하는 인생, 저항만이 유일한 자신의 선택인 인생 말이다. 진지한 것을 유치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남들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에 슬쩍슬쩍 저항하는 삶이 멋지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어릴 때 저러더니, 나이 들어서 식당을 한대서 동창들이 가니까 다 상해가는 고기에 음식물 쓰레기 같은 음식 나오고, 심지어는 바가지까지 씌우더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는 이렇게 자신을 도와주려는 부자 친구들을 속여 돈을 남기는 것이 멋지다고 생각한다. 


5년 넘게 다닌 동네 미용실 원장님이 어느 날 일체 동물성 음식을 먹지 않는 비건(vegan)이라고 하신다. 우리 아이도 한때 비건을 했었기에 어려운 일이라고 맞장구를 쳤다. “그런데 너무 좋아요”라고 말씀하신다. 나는 떠보기 위해서 말했다. “그죠. 몸도 가벼워지고.” 그랬더니, “아니요, 그런 것보다 이런 삶이 좋아요.”라고 말씀하신다. 아이가 비건을 할 때, 수많은 저항에 부딪혀야만 했다. 남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아니고,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닌데 청소년 친구들은 방해를 하고 비웃었다. 비건으로 사는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환경에 조금이라도 덜 폐를 끼치고자 하는 마음이다. 자연의 일부인 우리가 조금이라도 이 자연을 유지하는 데 역할을 하자는 것이다. 다이어트나 건강의 이유가 아니라, 육식 특히 사육을 하는 시스템이 확장하는 것을 조금이라도 막아보기 위한 노력이다. 대의를 위해서 사는 사람이다. 원장님도 그런 노력을 하는 삶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액젓도 넣지 않은 김치를 담그고, 모임이나 외식도 자제한다. 절대로 쉽지 않다. 그렇게 자신의 신념을 실천하는 혹은 최소한 실천하려 노력하는 삶이 주는 만족도에 대해서 이야기하신 것이다. 이런 삶을 사는 사람들끼리는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아도 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신념을 중시하기에 다른 사람들의 의견도 존중한다. 그래서 보통은 다른 사람에게 이런 삶을 강요하거나 권유하지 않는다.

 

아이는 이제 비건은 아니지만, 최대한 친환경 친생명적인 삶을 살고자 한다. 오리털이 들어간 옷이나 가죽 옷을 입지 않는다. 나는 에코백과 장바구니를 적극 사용하고, 10년째 천 생리대를 사용하고 있다. 아이도 천기저귀로 키웠다. 그래도 페트병에 들어있는 생수를 마시고, 마켓 컬리를 이용한다. 100%는 아니다. 하지만, 이런 쓰레기를 줄이기 위한 노력을 하면서 내가 속한 지구와 자연에 대해서 생각하고, 그의 일원임을 인식한다. 그리고 내가 무언가를 노력하고 있는 삶에 대해 자긍심을 느낀다. 나하나 이런다고 세상이 뭐가 달라지냐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세상은 이런 진지충들이 지키고, 바꿔 나간다. 


조직에서 비전도 그렇다. 비전은 문장이나 글귀가 아니다. 나를 이끄는 삶의 방향이다. 가치도 그렇다. 내가 희생을 하면서 지켜야 하는 중요한 것이다.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지켜야 하는 것이다. 핵심인재들은 입사를 할 때, 그 회사의 비전/미션/가치를 따진다고 하고, 일반 인력들은 급여와 복지 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결국 진지충들이 회사를 끌고 나가는 동력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지구와 조직의 비전을 고민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삶도 그렇게 살아간다. 정년을 앞둔 한 교수님께서 동년배들 단톡 방에 올라오는 글귀들이 거슬린다고 말씀하셨다. “인생 별거 없다. 놀아야 한다”는 글들이 올라오고 사람들이 그것에 동조하는 것이 싫다. 왜 인생이 별거가 없냐는 것이다. 고민하고, 정성 들여야 하고, 지켜야 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데 말이다. 그렇게 자신의 인생을 함부로 여기는 태도가 너무 짜증이 나는데, 그런 얘기하면 잘난 척한다면서 지청구나 먹으니 침묵하기로 하셨단다. 


미국이 세계를 이끄는 힘을 나는 이 진지함이라고 본다. 내가 본 미국 사람들은 참 진지하다. 미국 입시 컨설팅을 한 적이 있었다. 좋은 대학에 가려면 자기소개서에 “세상을 바꾸고 싶다”라고 쓰면 된다. 그것이 얼마나 진정성이 있는지를 보여주면 거의 붙는다. ‘열심히 시키는 대로 살아서 잘 먹고 잘 살고 싶어요’라는 이야기는 그 맥락에서 아예 이해가 안 될지도 모른다. 뉴욕 콜럼비아 대학 티처스 칼리지에서 박사 과정 할 때, 대학원 수업에 가끔 교사들이 수업을 들어온다. 우리는 학교 관련된 전공이 아니지만, 찾아 들어오는 교사들이 있다. 미국의 경우 교사는 단기 계약직이 많고, 그다지 처우가 좋지 못하다. 우리 학교는 게다가 등록금도 엄청나게 비싼 학교인데, 그 등록금을 본인이 내고 대학원을 다닌다. 그들의 모든 이야기는 “사회 변화”로 귀결한다. 한국에서 대학 다닐 때, 우리 학교 출신이신 교수님께서 수업시간에 하신 말씀이 기억이 난다. 그 대학원의 목표는 “할렘에서 대통령이 나오는 것”이다. 교육 기회균등과 양질의 교육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가보니 학교가 진짜 할렘 옆에 있었다. 그 말이 신선하게 충격적이어서 기억을 하고 있었다. 내가 박사 과정을 할 때, 오바마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 학교와 할렘은 그날 우주 대폭발과 같은 환희를 맞았다. 또, 그게 교육과 무슨 상관이냐며 빈정대고 깎아내리고자 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있다. 그들은 이런 삶, 가치와 비전을 가진 사람을 경험해 보지 못해서 그런다. “미슐랭 식당이 뭐가 맛있냐, 삼겹살에 김치가 최고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삼겹살에 김치 맛있다. 그러나, 시간과 정성을 가득 들이고 쉐프의 인생이 녹아 들어간 귀한 음식의 가치를 깎아 내릴 필요는 없다. 경험해 보지 못했으니 좋은 것을 모르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사실은 그런 삶이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에 하는 합리화인 경우가 많다. 그런 삶은 대단한 것일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환경운동을 하고, 자연인처럼 살아야만 세상을 바꾸는 것은 아니다. 종이컵 대신 머그 컵 한번 쓴 것으로도 가능하다. 낙숫물이 돌을 뚫는다. 그런 노력을 하는 것을 통해 자긍심을 가지고 살다 보면 그다음 단계를 고민해 볼 수가 있다. 


체육 선생님이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잘 배우고 잘하면 나에게 좋으니까 하는 거다. 어차피 해야 될 것, 열심히 하는데 돈드는 것도 아닌데 의미를 두고 열심히 한 거다. 최소한 시켜서 하는 것이나, 야단 맞을까봐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열심히 하기로 선택해서 하는 것이다. 빅터 프랭클은 인생에서 우리가 최후의 순간까지 선택할 수 있는 한가지가 삶에 대한 태도라고 하였다. 나는 열심히 사는 삶을 선택한 것이다. 의미없이 단순히 먹고만 살다 가기에는 우리의 삶이 너무 아깝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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