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부부의 세계"가 다시 한번 나에게
“어느 한순간이라도 다르게 할 수 있었을까?”
부부의 세계 마지막 회에 나왔던 주인공 내레이션 중 한 대사이다.
지난 10년간 내가 나에게 끊임없이 물었던 질문이다. 실은 거의 모든 아침을 이 질문으로 시작하고 하루를 닫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른의 삶이란 이런 회한과 삶의 한계를 받아들이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한다. 어떤 날은 되돌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런 저런 궁리를 하기도 하고, 어떤 날은 지금 상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는 삶의 긍정성을 보기도 한다.
인생에 큰 결정을, 그것도 사회적으로 봤을 때 모자란 결정을 하고 사는 사람은 그렇다. 평화로워 보이는 일상에서도 끝도 없이 사회적 담론과 나의 가치관의 전쟁을 치러야 한다. 비슷한 불행과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사회적으로 세이프 존에 사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나의 삶에 대한 갈등을 겪는다. 나는 이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고, 대학에 겸임교수를 하며 사업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어느 하나 100%가 아니다.
이혼을 하기 전까지 내 인생은 완벽해 보였다. 나는 미국 유학파에 삼성전자 출신이다. 남편은 자그마치 서울 의대를 나온 사립대 의대 교수이고, 소문난 애처가였다. 나는 콜럼비아 대학에서 박사과정 중이었고, 그림과 같은 딸아이를 뉴욕 한복판에서 키우고 있었다. 뉴욕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그 어렵다는 사립학교 전학을 시켰다. 나의 인생은 완벽해 “보였다.” 그러나 그러한 인생은 그렇지 못한 사람에 의해 흔들리게 마련이다. 내가 다 가진 인생은 모두 나의 피땀의 결과가 아니다. 그런데 그것을 알지 못했다. 운이 좋았던 것이지만, 내가 들인 노력에 도취되어 나는 모든 것이 다 내 것인 줄 알았다. 나는 모든 것에 완벽한 나에게 도취되어 있었다. 일, 가정 모든 것에 말이다. 덕분에 부부 생활이 망가진 것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 정신과 의사가 말했다. 외도는 파탄의 원인이 아니라, 증상이라고. 나의 결혼에 외도는 없었지만, 결혼 생활은 상당 부분 균열이 가 있었다. 부부는 둘 다 너무 바빴다. 종합병원에서 수련하는 남편은 매일 12시가 넘어 귀가를 하고 7시에 출근을 했다. 금요일 저녁엔 술에 떡이 되어 들어왔고 일요일까지 숙취에 시달렸다. 주말엔 매주 시집에 가서 자거나, 그의 어머니의 교회에 갔다. 나는 천주교인이다. 나는 책을 쓰고 기업 강의를 하며 생계를 이어갔고, 사람 한번 쓰지 않으며 아이를 키우고 늘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는 살림과 며느리 노릇을 했다. 나는 결혼 생활 10년간 단 한 번도 나 혼자 사적인 외출을 해 본 적이 없다. 친구들과 술을 마시거나, 놀러 간 적도 없다. 행복하지 않았다. 결혼 생활 중 찍은 사진들이 그것을 증명해준다. 어색하고, 궁색한 표정들. 나는 탈출 혹은 보상으로 아이와 둘이 박사 유학을 감행했다.
완벽함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외로움과 완벽을 위한 중노동이었다. 속을 모르는 겉으로 완벽함을 자랑하는 부부를 흔들고 싶은 사람들은 많다. 이런 존재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 박탈감을 준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구원하기 위하여 이러한 완벽해 보이는 존재들이 깨지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들이 본격적으로 흔들 때, 단단하지 않았던 결혼 관계는 깨지고 말았다. 완벽했던 가정은 깨져서 이혼녀, 이혼남, 그리고 이혼 가정 아이가 되었다. 이 두 세계의 간극은 매우 크다. 내 수업을 들은 이후로 지난 7년간 매년 나에게 문자로 때때마다 인사를 하던 학생이 결혼을 한다며 나에게 문자로 주례를 부탁했다. 내가 이혼을 했다고 하자, 3시간 동안 답이 없다. 아마 그 시간 동안 그 당황스러움, 미안함, 실망감을 수습했어야 할 것이다. 그 시간 동안 이혼 때문에 나를 절대적으로 존경하는 이를 잃게 되어도 나는 상관없다고 나를 교육시키고 있었다. 나는 지금 이 세계가 아직도 낯설다. 아직도 받아들이기 어렵다. 나는 아직도 이 상황을 되돌릴 수 있을까 궁리를 하곤 한다.
“어느 한순간이라도 다르게 할 수 있었을까?”하는 질문은 “지금이라도 다르게 할 수 있을까?”하는 질문에 이르게 한다. 늘 대답은 같다. 다시 그 외롭고, 억압적인, 그리고 신체적으로 너무나도 벅찬 삶에 들어간다면 우선 살기 위해서라도 그 물 밖으로 뛰쳐나왔을 것이다. 그래도 다음 날 또 같은 질문을 한다.
뉴욕 유학을 마치고 논문을 쓰는 동안 시집에 얹혀살았다. 논문을 쓰는 동안 시누이에게 쫓겨나고, 남편으로부터 이혼 소장이 왔다. 아이와 집을 나오고, 대학원 강의를 하여 번 돈으로 이혼 소송에 반소를 제기하였다. 대학에 비정년 교수가 되었다. 박사를 하고 나면 보통 2년 동안 연구 업적을 쌓아 정년 자리를 잡아야 한다. 아이는 4시 20분에 학교에서 돌아왔다. 나는 매일 그 시간에 맞춰 퇴근을 했다. 이혼 소송이 진행되는 동안 아이를 데리고 가겠다는 남편의 엄포는 하루하루 실질적인 위협이었다. 아이를 등하굣길에 빼앗길까 봐, 아이가 홀로 외로울까 봐 나는 그 시간에 맞춰 귀가를 했다. 저녁에 어딜 나가더라도 아이가 들어오는 것을 확인해야 했다. 매일 바들바들 떨었다. 버스를 타고 하교를 하던 아이가 한 정거장 전 정류장에서 삶은 옥수수를 팔고 있는 것을 보았다. 엄마를 사다 주려고 내렸다가 길을 잃었다. 연락할 길이 없는 열살짜리 아이가 한 시간 반이나 지나서 집에 돌아왔다. 엄마를 위로하고 싶었던 딸아이를 붙잡고 야단을 치며 오열을 했다. 아이는 미안하다고 했다. 그 한시간 반. 나는 죽었었다.
전 남편은 법정에서 “능력이 안 돼서 정년직을 못 한 것이면서 애 핑계를 댄다”라고 했다. 펠로우를 마치면서 그 흔한 임상강사, 임상교수 한번 거치지 않고 바로 정년직 교수가 된 그가 말했다. 그가 교수가 된 것은 그가 서울대를 나온 뛰어난 사람이기 때문에 가능했지, 내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 "의사가 된 것은 내 노력이지만, 교수가 된 것은 당신 덕"이라던 말은 거짓이었는지. “내가 돈을 벌지 않았으면 당신은 대학병원이 아니라 페이닥터를 하며 돈을 벌어와야 했고, 내가 애를 키우지 않았다면 당신은 애가 없다.”라고 아무리 외쳐봐야 소용이 없었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른다.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그가 하는 대학병원 의사 일이 세상에서 가장 고결하고 가치 있는 일이라는 찬사에 도취되어 다른 사람의 인생은 다 피크닉 정도의 수고로만 보일 지도. 물려받은 것이 없이 시작한 월세 살림에 생계를 이어가고, 인정받던 직장생활 그만두고 사람 한번 쓰지 않고 살림하고, 아이를 홀로 키운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도 마누라가 있었으면 삼성전자 임원이 되어 있을 것이라는 것은 실패한 자의 과대망상적 가정에 불과했다.
이혼 소장에는 주부로서 의무를 다 하지 않은 책임을 물어 이혼을 요구하고 양육권을 주장하고 있었다. 나는 그 외로움, 중노동, 그리고 인정받지 못하는 삶에 다시 들어갈 수가 없다. 이혼을 판결한 판사는 소송을 당한 부부는 다시 살기 힘들다고 법적인 부분에는 문제가 없지만 두사람을 위해 이혼을 판결한다고 말했다. 이혼에 이르게 된 사건보다 이혼 소송이 더 큰 상처라고들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도 되돌릴 수 있을까 하는 망상에 시달린다.
나는 정년직 교수가 되는 것을 포기해야만 했다. 적성에는 안 맞았지만 정말 원했다면 가능했을 것이다. 실제로 제의도 받았다. 아직도 사람들은 나에게 교수가 될 것을 권유하고 심지어는 종용하기도 한다. 주로 교수들이 그런다. 누군가가 자신의 직업을 꿈꾼다는 것은 그가 가진 것의 가치를 증명해주는 길일 테니 말이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다. 그러나 물려받은 재산이 없는 내가 아이와 둘이 살아가기 위해서 나는 교수가 되는 것보다 돈이 더 중요했다. 정확히 말하면 집이 더 중요했다. 작은 체구의 나와 딸아이가 치안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동네에 집이 필요했다. 이혼녀에 대한 편견을 대놓고 드러내지 않을 만큼 세련된 동네에 살아야 했다. 결혼 초부터 월세를 살아온 나는 집이 정말 갖고 싶었다. 예쁜 그릇을 만지작 거리면 사람들은 집 사면 사라고 했다. 이사하면서 깨진다고. 그 사기그릇 몇 푼이나 한다고. 예쁜 사기그릇을 사는 것조차 집이 없는 이들에게는 허용되지 않는다. 집을 사는 것이 교수 월급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교수를 하면서 기업 강의를 하면 되지 않느냐고 한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가정생활이 없다. 나는 아이를 돌볼 수가 없다. 처음부터 아이가 중요하지 않았다면, 나의 인생에 이런 선택은 아예 상정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혼 소송은 1년 반가량 이어졌다. 나눌 재산이 없는 사이에 쟁점은 양육권이었다. 이는 내 생명의 위협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 위협으로부터 아이를 지켜내고 양육권을 지켜냈다. 그리고 이혼 가정의 아이가 된 나의 딸에게 나는 모든 지극 정성을 쏟았다. 아이가 필요로 하는 것은 함께하는 시간이다. 나는 그 함께하는 시간의 절대치의 중요성을 결혼 생활을 통해 깨달았다. 아무리 겉으로 완벽해 보여도, 가족은, 관계는 함께하는 절대적인 시간을 요구한다. 퀄리티 타임은 차선에 불과하다.
나는 사실 교수가 아니라, 기업의 연수원장이 되고 싶어서 유학을 갔다. 아이를 키우면서 경력 단절이 되었고, 그것을 메우기 위해서 미국 박사가 좋겠다고 생각했다. 기업 임원들을 코칭을 할 때, 나는 극심한 심적 동요를 느낀다. 내가 꿈꾸던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상대하는 것이 존경심과 더불어 부러움과 질투를 만들어 내는 것은 당연하다. 박사를 마치고 일자리를 알아보았다. 삼성전자는 박사과정에 있는 동안 내가 일하던 본사 조직이 사라졌다. 함께 일하던 분들은 각기 다른 사업장이나 계열사로 흩어졌다. 인연이 있는 분들이 회사를 소개해 주셨다. 연수원은 거의 서울에 없다. 서울 한복판에 있는 사립학교를 다니는 딸아이를 어찌할 수가 없었다. 엄마 아빠의 잦은 이동으로 단 2년을 같은 학교나 유치원, 어린이 집을 다닌 적 없는 딸이 드디어 동네 친구가 생겼다고 좋아하는데, 부모의 이혼으로 결코 마음이 편하지 않을 이 상태에서 학교까지 옮기자고 할 수가 없었다. 고민하던 중 대학 비정년직 교수 자리에 운 좋게 들어갈 수가 있었다. 어떤 덜 떨어진 인간이 쥐 똥 만한 권력을 쥐고 정년직 교수 자리를 만들어 주겠다고, 성희롱에 연애를 건다. 그만두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기업도 입사를 한들, 임원 자리를 향해 나의 100% 이상을 바쳐야 하니, 그것도 홓로 아이를 키우는 나에게는 허락되지 않는다.
나는 어쩔 수 없었다. 다 내가 그 순간순간 숙고한 최선의 선택들이었다. 괴로워하는 나에게 정신과 선생님이 물었다. “아이 아빠와 삶을 바꾸시겠어요? 아이 양육권을 아이 아빠에게 주고, 양육비를 주면서 대학교수 생활을 하시면 행복하시겠어요?” “아니요” 나의 대답은 확실했다. 삶은 누구에게든 모든 것을 주지 않는다. 하나만 취해야 한다면, 아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이기에 내 삶은 다시 쓰인다 한들 이렇게 결말을 맺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도 욕심 많은 인간이어서인지, 나쁜 건 잘 잊고 좋은 것을 더 잘 기억하는 인간이어서인지, 오늘도 묻는다.
“어느 한순간이라도 다르게 할 수 있었을까?”
더 이상 이 질문을 하지 않는 그날, 내 삶과 화해하는 그날, 그날이 나 스스로를 용서하는 구원의 날이 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