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떠나요, 여행

by 한량

어릴 때 우리 집은 초등학교 중학교 내내 거의 주말마다 여행을 다녔다. 아마도 나의 한량 기질은 아빠한테서 온 듯, 우리 아빠는 산으로, 바다로, 계곡으로 계절마다 여행 다니는 걸 참 좋아하셨다.

그때는 지금처럼 온갖 핫플레이스며 유명 음식점, 지역 명물이 시시각각 올라오는 네이버나 인스타 같은 SNS는 없었지만, 대신 아빠에겐 <Car Life>라는 잡지가 있었다.

<Car Life>는 자동차 전문 잡지인데, 신차나 튜닝, 시승기 등 자동차 관련 정보뿐 아니라 드라이브 코스, 차로 갈 만한 여행지, 지역 맛집 같은 콘텐츠도 많이 담겨 있었다.


토요일에도 4교시까지 학교 수업이 있던 시절이라 여행은 공휴일이나 토요일 오후에 갈 때가 많았다. 아니면 일요일 새벽.

새벽 5시쯤 잠든 우리 삼 남매를 엄마가 깨우면 우리는 비몽사몽 차에 실리듯이 해서 여행을 가곤 했다. 한참 자다 일어나서 깨어 보면 동해안 일출 광경이 보일 때도 있고, 해안도로를 달리고 있기도 하고, 또 어떨 땐 <Car Life>에 소개된 어느 음식점 앞에 도착해 있기도 했다.

그때는 솔직히 새벽에 흔들어 깨우는 엄마한테 화를 낸 적도 있고, 자연이든 유적이든 하나라도 더 보여 주려고 애쓰시는 부모님께 고맙다는 생각도 못 했었다. 부모님이 해 주시는 모든 걸 그저 당연하다는 듯이 받았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은 내비게이션도 없이 지도와 <Car Life>만 들고 떠났던 그때 그 여행이 나의 유년 시절을 얼마나 풍성하게 채워 줬는지 새삼 부모님께 감사하다.


어릴 때부터 많이 다닌 가닥이 있어서 나는 지금도 여행 가는 걸 좋아한다. 사실 요즘에야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워낙 많고, 해외여행도 어지간히 많이 가니 여행을 취미라고 하기 조금 망설여진다.

내 주위만 해도 나보다 훨씬 더 여행을 자주 다니는 사람들이 많으니 말이다. 여행은 나에게 취미라기보다는 일상이고, 힐링이고, 추억인 것 같다. 어디가 되었든, 기간이 짧든 길든 간에 나는 한두 달에 한 번 어디라도 갔다 오지 않으면 마음이 갑갑해진다.


남다를 것까진 없지만, 나의 여행 스타일이 있다면 '빡빡하지 않은, 게으른 여행'이다. 나는 어디를 가든 일정을 많이 잡지 않는 편이다. 그리고 다른 가족과 함께 갈 때가 아니라면 우리 가족은 국내든 해외든 어딜 가나 아침에는 늦잠을 잔다(그래서 호텔 조식은 가급적 신청하지 않는다).

작년 여름 속초에 3박 4일 갔을 땐 바다에 발 담그고 조개잡이 좀 하고, LG트윈스 팬이 하는 오징어 난전에 갔었다. 그리고는 일찌감치 체크인을 하고 호텔에서 늘어지게 있다 왔다.

작년 11월에는 괴산에 있는 코오롱 캠핑장(텐트를 비롯한 모든 장비가 이미 갖춰져 있어서 먹을 것만 가져가면 된다)에 갔었는데, 도착했을 때가 이미 늦은 오후라 저녁에 고기 구워 먹고 아침에는 느지막이 일어나 텐트 안에서 뒹굴뒹굴하다 라면만 끓여 먹고 왔다.

가성비를 따진다면 간 김에 여기도 보고 저기도 보면 좋겠지만, 나는 여행에서나 인생에서나 한결같이 너무 힘들지 않고, 유유자적 즐기는 걸 선호한다. 그래서 패키지여행은 선호하지 않는다. 오전 11시쯤 모여서 오후 4시쯤에는 일정을 마쳐 주는 패키지가 있다면 모를까?


사실은 내가 게으르게 여행을 한다는 사실도 미처 인식하지 못했었는데, 3년쯤 전에 아들 친구 T의 가족과 함께 경주에 갔을 때 깊이 깨달았다. 그동안은 나 스스로 ‘나는 느슨하긴 하지만 계획을 세우는 스타일’이라고 자부했었는데, T의 엄마이자 나의 동네 절친 B와 비교하니 나는 전혀 계획적이지 못한 사람이었다. 1박 2일 경주 여행을 위해 B는 출발 전에 미리 여러 사이트를 비교해서 가이드를 섭외하고, 동선도 알뜰하게 짜고, 야경투어와 맛집 정보까지 완벽하게 준비했다.

덕분에 우리 가족은 본의 아니게 무임승차로 1박 2일의 경주 역사 기행을 제대로 할 수 있었다. 불국사, 석굴암, 첨성대, 동궁과 월지, 대릉원, 경리단길 등 아침부터 밤까지 가이드를 따라다니며 바쁘게 돌아다니느라 조금 힘들긴 했지만 말이다. 아마 우리 식구끼리 갔다면 우리가 다닌 곳의 절반 정도나 다녔을까 싶다.


느긋한 여행을 좋아하는 우리 가족이 최근 몇 년간 가장 많이 간 곳은 자연휴양림이다. 산이 많은 우리나라의 특성상 국공립 자연휴양림이 전국 각지에 200곳 가까이 있다. 자연휴양림은 최소 산 중턱에, 어떤 곳은 산꼭대기에 있어서 호젓하고 한가롭다.

여름에는 계곡, 수영장이 있어서 좋고(벌레가 많은 건 감수해야 한다), 봄가을에는 산 자체가 꽃으로 단풍으로 수려하다. 겨울에는 춥지 않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는데, 산이니까 당연히 춥지만 대신에 숙소는 충분히 따뜻하다.

내가 나름 꽤 많은 자연휴양림을 섭렵해 본 결과, 가격이 호텔이나 리조트에 비해 저렴한 건 물론이고, 대부분의 휴양림이 관리가 잘 되어 있어서 깔끔하다. 복층으로 된 곳도 있고, 독채도 많고, 천문대나 전망대바베큐장, 놀이터 같은 시설물과 숲 체험 프로그램도 많다.


단점은 보통 휴양림은 산 위에 있고, 내부에 음식점이나 매점이 있는 경우가 드물어서 먹을 것을 바리바리 싸가야 한다는 거다. 밥 먹으러 간다고 왔다 갔다 하기에는 산길을 한참 가야 하기도 하고, 길이 좁기도 하고 금방 어두워져서 운전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고기, 라면, 쌈채소부터 시작해서 간식까지 잔뜩 싸가지고 올라가서 퇴실할 때까지 산에서 내려오지 않는다.


나는 그동안 속리산, 청주, 소백산, 무의도, 평창, 중미산, 진천 휴양림 등에 갔었는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은 단양에 있는 소백산 자연휴양림이다. 소백산 자연휴양림은 구역이 나뉘어 있는데 나는 그중에서도 정감록명당체험마을이 제일 좋다. 독채이고 시설이 좋기도 하지만 해발고도 480m 고지라 휴양림 중에서도 공기 맑고 한적하기로 최고다. 게다가 정감록 구역은 TV와 와이파이가 없어서 정말 오롯이 밥 먹고, 산책하고, 밤하늘에 별 보는 걸로 하루를 보내는 진정한 '쉼'이 가능하다. 꼬불꼬불한 산길을 하염없이 올라가는 건 감안해야 하지만, 그만한 가치가 차고 넘치게 있는 곳이다.

그동안 우리 가족은 주로 강원, 경기, 충청도 지역 휴양림 위주로만 가서 앞으로는 경상도, 전라도, 제주도까지 진출해 볼까 싶다. 좀 많긴 하지만 휴양림 도장 깨기도 재미있을 것 같다. 평생 걸리려나?


애들이 어릴 때는 나도 우리 부모님처럼 가족여행을 많이 다니려고 노력했는데, 사실 큰애가 고등학생이 되면서 점점 가족여행의 횟수는 줄어들고 있다. 여행 한 번 가려면 시험 기간, 수행평가 기간 다 제외하고, 학원을 너무 많이 빠지면 보강하느라 힘드니까 학원 스케줄도 고려해야 하니 말이다. K고등학생들도 물론 고생이 많지만, K 고등학생의 가족 또한 만만치 않다.

예전에는 1박 2일이라도 거의 한 달에 한 번쯤 갔다면 이젠 가족여행은 격월로 가기도 힘들어졌다. 대신 가끔은 아들이랑 나랑 둘이 가기도 하고, 내가 친구들이랑 여행을 가기도 하면서 나의 여행 횟수만큼은 은근슬쩍 유지 중이다.


어릴 때 가족들과 갔던 여행이 견문을 넓히고, 자연환경도 몸소 체험하는 등등 일종의 ‘체험학습’이었다면 내가 요즘 가는 여행은 ‘일상 탈출’의 의미가 큰 것 같다. 한 번씩 여행을 가면 꼭 뭘 하지 않아도 그저 집안일과 애들하고 지지고 볶는 일상에서 잠시 떨어져 나오는 것만으로도 몸도 마음도 막 건강해지는 느낌이 드니 말이다.

당장 애들한테 일어나라, 숙제해라, 이 닦아라 잔소리 안 하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인다. 애들은 모를 거다. 잔소리 듣는 것만큼이나 하는 것도 아주 진저리가 난다는 걸 말이다.

수요일 연재
이전 14화치매 예방과 가족 단합, 보드게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