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 예방과 가족 단합, 보드게임

by 한량

신혼 때 남편과 나는 보드게임을 자주 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남편과 나는 취향이 참 다르다. 음악을 들어도 남편은 클래식 나는 대중가요, 책을 읽어도 남편은 역사나 경제 관련 책 나는 무조건 추리소설 이런 식이다.

나는 뮤지컬이나 콘서트 같은 공연을 좋아하지만, 남편은 공연장에서는 꾸벅꾸벅 졸고 공연 실황을 집에서 보는 걸 선호한다. 그래서 그나마 같이 할 만한 것을 찾은 게 바로 보드게임이었다.


보드게임을 할 때도 둘이 스타일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때 했던 게임 중에 '카르카손 더캐슬'이라는 게임이 있는데, 보드게임 중에 드물게도 2인용 게임이면서 너무 복잡하지도, 단순하지도 않은 적당한 수준의 전략 게임이다.

이 게임은 둘이 번갈아 가며 타일을 이용해서 길을 연결하고 영토를 확장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뭐든 속전속결인 성격 급한 나는 서너 가지 경우의 수를 생각해 보고 잽싸게 타일을 놓는데, 지공이 특기인 남편은 자기 차례만 되면 세월아 네월아 시간을 끌곤 했다. 매번 내가 "빨리 좀 해!!!!!" 하면서 버럭 하기를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신혼 때 이후로 남편과 보드게임을 더 이상 안 하게 된 건 내가 속이 터져 죽을 것 같아서이기도 했지만, 솔직히 말하면 나의 과도한 승부욕도 한몫했다.

한 번은 남편 친구네 부부가 우리 집에 놀러 와서 넷이 '루미큐브'를 했다. 루미큐브는 숫자 타일을 연속이나 그룹으로 묶어서 차례로 내려놓다가 모든 타일을 먼저 내려놓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다.

남편이 한 번, 남편 친구가 한 번 이기고 나니 그때부터 나는 속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게임을 시작한 때가 이미 자정쯤이라 다들 피곤해했지만, 이미 승부욕에 이글이글 불타오른 나는 "아무도 못 자!" 하면서 한참이나 게임을 강행했다.

때로는 과도하게 발동이 걸리는 나의 승부욕 탓에 나는 남편이랑 보드게임을 하다 지면 앵그리버드로 변신하곤 했고, 결국 남편과 나의 유일한 공통 관심사는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그 후로 보드게임을 즐겨했었다는 사실조차 잊고 지냈는데, 나를 보드게임과 다시 이어준 사람이 있었다. 첫째가 6살 되던 해에 우리 집은 새로 지은 아파트에 입주했다. 그쯤 나도 회사를 그만두는 바람에 새 아파트에서의 생활은 여러 가지 면에서 새로운 시작이었고, 괄목할 만한 일은 내향형 I인 내가 이웃과의 사교생활을 시작했다는 거다.

그때 알게 된 사람들 중 한 명이자 나에게 보드게임을 전수해 준 사람이 우리 아랫집에 살던 J언니였다. 그 집에도 마침 딸 하나, 아들 하나가 있었는데 그 집 애들이 우리 애들보다 딱 한 살씩 많아서 애들끼리도 금방 친해졌다.

J언니는 외향적인 극 E라 발이 넓어서 그 언니를 통해서 확장된 이웃만 해도 꽤 된다. 게다가 J언니는 노는 것도 나만큼이나 좋아하고, 취미도 비슷해서 우리는 애들만큼이나 죽이 잘 맞았다. 그중에서도 J언니와 내가 특히 잘 맞았던 취미가 보드게임이었다.


J언니네 집에는 거실 한 벽면이 다 보드게임일 정도로 보드게임이 많았다. 예전에 보드게임 수업을 하시는 선생님께 수업을 들으면서 하나씩 사 모았다고 했다. 그래서 나랑 애들이 놀러 가면 다 같이 하기도 하고, 딸들은 딸들끼리 아들들은 아들들끼리 언니랑 나는 우리끼리 보드게임을 하곤 했다.

그때 언니한테 배운 보드게임이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헥서스', '블로커스', '우봉고' 같은 퍼즐 게임류는 유치원생이나 초등 저학년 애들이랑 하기에 좋다. '러시아워'나 '초콜릿픽스' 같은 1인용 보드게임이 있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언니한테 배운 보드게임을 나도 사서 우리 애들이랑도 하고, 애 친구들이 놀러 오면 같이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나도 그때 보드게임을 벽면 가득은 아니지만. 벽면의 1/4 정도는 채울 정도로 사들였다.


보드게임이 좋은 점은 워낙 종류가 많다 보니 연령별, 성향별, 인원수별로 구미에 맞는 게임을 찾아 할 수 있다는 거다. 게다가 확장판이 있는 게임들도 있어서 기존 게임에 확장판을 더하면 게임의 난이도를 올리고 내용을 풍부하게 할 수 있다.

게임 규칙이 간단해서 유치원생도 할 수 있는 게임에는 똑같은 과일 다섯 개가 보이면 종을 치는 순발력 게임 '할리갈리', 원통에 막대를 가로질러 원숭이가 많이 걸리게 하는 '텀블링몽키', 두 장의 카드에서 같은 그림을 찾는 '도블' 같은 것들이 있다.

초등학생에게 적당한, 머리를 살짝 써야 하는 게임은 '블로커스', '헥서스', '우봉고', '루미큐브', 여러 명이 할 수 있는 계급 게임 '달무티' 같은 것들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게임은 '스플랜더'라는 전략 게임이다. 우리 가족이 지금도 여행 갈 때 가끔 챙겨 가는데, 자원과 귀족 카드를 모으면서 플레이를 하다 최종적으로 점수가 가장 높은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다. 초등학생부터 어른까지 모두가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확장판이 있어 게임을 업그레이드할 수 있다. 우리 동네 청소년문화센터에서는 스플렌더 대회도 열린다는데, 아직 가 본 적은 없다.


J언니와 아래 윗집 살던 아파트에서 큰애가 5학년 되던 해에 우리 가족은 다시 이사를 했다. 때마침 J언니네도 미국으로 이민을 가는 바람에 우리는 작별하게 되었다. 지금도 언니네가 한국에 오면 꼬박꼬박 만나긴 하지만, 아래위로 수시로 오르내리며 보드게임도 하고 같이 음식도 나눠 먹던 그 시절이 한 번씩 그리워진다.

우리 집이 이사를 하면서 첫째인 딸의 사춘기가 왔다. 지금 생각해 보면 딸의 사춘기는 그럭저럭 유순하게 지나갔지만, 한동안 방에 콕 박혀서 거실에 나오는 일이 드물었다. 그러면서 가족끼리 모여 앉아 보드게임을 하던 시절도 얼떨결에 끝나 버리고 말았다.

이제는 애들이랑 옹기종기 모여 보드게임을 하는 일이 연례행사처럼 되어 버렸다. 진짜 여행이나 가야 한 번씩 하는데, 그때조차 사춘기 딸을 게임에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내가 열심히 머리를 굴려야 한다. 지금까지는 이긴 순서대로 상금을 수여해 보기도 하고, 꼴찌 한 사람이 쓰레기를 버리거나 설거지를 하게 하면서 정말 꾸역꾸역 참가시키고 있다.


지금은 뜸해진 보드게임을 요즘 들어 다시 해 볼까 싶은 생각이 든다. 일단은 치매 예방에 좋을 것 같아서다. 얼마 전에 친구의 어머니가 경도인지장애 판정을 받으셨다. 치매로 가기 직전의 단계라 진행을 더디게 하기 위해서 병원에서 치료받고 계신다. 그 얘기를 듣고 친한 친구 일이라 착잡하기도 하고, 부모님 걱정도 되고,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는데, 요즘 들어 건망증이 심한 나도 살짝 겁이 난다.

온라인 마트에서 양파를 한 망 사놓고 다음 날 또 사서 어쩔 수 없이 양파장아찌를 담그기도 하고, 주차장에서 차를 어디 세웠는지 몰라서 한참 헤매다 찾고(하마터면 도난당한 줄 알고 신고할 뻔), 최근에는 2월 1일이 첫째 개학식 날인데 깜빡하고 여행 계획을 잡았다. 뒤늦게 알고 부랴부랴 비행기표는 취소했는데, 호텔은 환불 불가로 할인받은 거라 취소가 안 돼서 결국 둘째와 둘이서 여행을 가게 되었다. 일부러 그런 건 절대로 아니다!

치매 예방 차원에서 보드게임을 하면서 머릿속으로 경우의 수도 따져보고, 디테일도 기억하고, 전략도 세워 보면 좋지 않을까? 어른들이 치매 예방에 고스톱이 좋다고 하는데, 현대판 고스톱이 보드게임인 셈이다.


그리고 생각해 보면 나이가 들어도 할 수 있는 취미로 보드게임만 한 게 없다. 일단 가만히 앉아서 할 수 있으니 몸이 좀 불편해도 가능하고 체력 소모도 별로 없다.

보드게임을 몇 가지 구비하고 나면 더 이상 비용이 들지 않는 것도 장점이다. 게다가 기억력 감퇴가 걱정이면 메모리 게임을 하면 되고, 복잡한 규칙이 싫으면 쉽고 직관적인 게임들도 많으니 누구나 입맛대로 골라서 할 수 있다.


한동안은 보드게임을 할 일이 없어 당근마켓에 팔기도 하고 주변 사람들한테 나눠주기도 했는데, 이참에 집에 남아 있는 보드게임이 뭐 뭐 있는지 좀 챙겨보고 오랜만에 가족 대항 스플랜더나 한 판 해야겠다.

가족끼리 단합하기에도 보드게임만 한 게 없다. 사춘기 자녀만 잘 꼬셔서 합류시키면 되는데, 나에게도 매번 하기 싫어하는 딸을 설득하는 게 난제긴 하다. 게임 세 판 같이 하면 핸드폰 게임을 한 시간 하게 해 준다든지 하면서 늘 협상에 협상을 거듭하게 된다.

써 놓고 보니 딸, 진짜 치사하네. 흥!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