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렸을 때부터 드라마를 좋아했다.
‘한 지붕 세 가족’,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 ‘짝’, '사랑이 뭐길래' 같은 홈드라마에서부터 ‘여명의 눈동자’, ‘모래시계’, ‘토지’, '대장금' 같은 대작은 물론이고, '우리들의 천국', '마지막 승부', '질투' 같은 청춘 드라마까지 TV에서 하는 모든 드라마를 장르 불문하고 섭렵한 것 같다.
‘천사들의 합창’, ‘비버리힐즈 90210’, ‘레밍턴 스틸’, ‘블루문 특급’, ‘맥가이버’, ‘초원의 집’ 같은 외화 시리즈도 물론이고 말이다.
그래서 중고등학교 때 친구들이랑 쉬는 시간에(때로는 수업 시간에도) 빙고를 할 때면 드라마로 10X10(가로, 세로 각 10줄, 총 100칸) 빙고를 하자고 친구들을 꼬드기곤 했다. 그럴 때마다 일찌감치 내 꺼 100칸을 채우고 친구들에게 드라마 이름을 알려주는 게 뭐 그리 신났을까? '세노야', '노다지' 같이 애들이 잘 모르는 드라마 제목을 얘기하며 득의양양했던 건 살짝 유치했던 것 같기도 하다.
고등학교 때까지도 나의 드라마 사랑은 계속되었는데, 그래서 나는 시험 기간에도 독서실을 가든 학원에 가든 드라마 시간에 맞춰 집에 들어오는, 어지간히 엄마를 속 터지게 하는 아이였다.
하필 내가 고등학생이던 그 시절이 ‘모래시계’, ‘첫사랑(배용준, 최지우가 나왔던)’, ‘딸부잣집’ 같은 주옥같은 드라마가 많았던 때였으니 나도 어쩔 수 없었다.
우리 엄마는 그 부분에서는 애초에 포기했는지 그 때문에 잔소리 들은 기억도 별로 없다. 아니면 실상은 엄마가 도끼눈을 뜨고 지켜보고 있었는데, 내 기억이 왜곡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때로는 단지 지나간 일이라는 이유만으로 진흙탕도 무지갯빛으로 채색된 채 기억 속에 살포시 저장되곤 하니까.
내가 한 번씩 깜짝깜짝 놀라는 부분인데, 의식하지 않아도 결국 내가 커 온 방식으로 나도 애들을 키우게 된다는 사실이다.
글을 쓰는 사이 해가 바뀌어 올해 중학생이 되는 우리 아들도 나랑 드라마를 자주 같이 본다. 숙제할 시간에 드라마 보고 있다고 남편이 한 번씩 잔소리를 하지만, 나는 또 그런 면에선 한없이 유해서 “이거 보고 나서 해.”하며 사이좋게 본다.
사실은 나 혼자 핸드폰으로 봐도 되지만, 내가 TV로 보려면 어쩔 수 없이 아들을 끌어들여야 한다. 딸은 방 문을 닫고 들어가면 뭘 하는지 도통 나오질 않는데, 아들은 꼭 거실에 나와서 숙제를 하니 말이다. 아는 사람은 알 거다. TV로 봐야 제맛인 드라마들이 있다. 그래 놓고 아들이 TV만 실컷 보고 결국 숙제를 다 안 하고 자기라도 하면, 급 돌변해서 소리소리 지르곤 하지만……. 이래서 애들이 나보고 분노조절장애라고 하는 건가?
예전에는 사극, 로맨스, 홈드라마, 외화 할 것 없이 진짜 장르와 상관없이 모든 드라마를 다 봤는데, 30대 이후로 나의 드라마 취향은 독서 취향만큼이나 확고해졌다.
최근 몇 년간은 열에 아홉은 범죄 드라마를 본다. 예전에는 이 장르 자체가 지상파에서 많지 않았고, 지금처럼 외화를 자주 볼 수 있는 매체도 없어서 범죄 드라마를 좋아한다 해도 볼 게 별로 없었다.
기껏해야 드라마도 아닌 재연 수사극 ‘경찰청 사람들’ 정도였고, 그 이전에 최불암 아저씨가 나온 ‘수사반장’이 있었지만 내가 또 ‘수사반장’ 세대는 아니다(그보다는 나이가 좀 덜 들었다).
언제부터인가 한국 드라마도 범죄 드라마가 마구 쏟아져 나오면서 그중에 수작도 많고, 범죄 드라마의 클래식이라 할 만한 작품들도 많이 등장했다. ‘시그널’, ‘비밀의 숲’, ‘모범형사’, ‘괴물’, ‘라이프온마스’, '열혈사제1', ‘왓쳐’, ‘검법남녀’ 등등 정말 몰입해서 보게 되는 작품들이 너무너무 많다.
게다가 넷플릭스, 티빙, 디즈니플러스 같은 OTT가 생기면서 이제는 예전 드라마든 현재 방영 중인 드라마든 언제 어느 때고 볼 수 있는 새로운 세상이 열리지 않았나.
넷플릭스가 처음 나왔을 때 나는 한동안 새벽까지 몇 시간씩 연달아 드라마를 보며 날을 새곤 했다. 당연히 다음 날 아침에 눈이 잘 안 떠져서 한동안은 애들이 아침을 못 먹고 학교에 다녀야 했다.
오전에는 지쳐 쓰러져 자고, 오후에는 다시 부시시 일어나 넷플릭스로 드라마를 1화부터 마지막화까지 논스톱으로 보기 시작하는 생활을 몇 달 지속했으니 진짜 폐인이 따로 없었다.
딱 한 회만 더 보려고 해도 도저히 끊을 수 없게 우리나라 드라마 작가들이 너무 대본을 잘 쓰는 걸 어쩌란 말인가. 게다가 조승우, 한석규, 황정민, 김래원, 전도연, 김혜수 등등 연기를 정말 소름끼치게 잘하는 배우들도 지독히 많다.
지금은 지나간 범죄 드라마는 웬만큼 다 섭렵해서 폐인처럼 보는 건 다행히 졸업했다. 그래서 새로운 범죄 드라마가 나올 때만 그때그때 찾아서 보고 있다.
그런데 이런 류의 드라마만 들입다 보다 보면 자꾸 사람을 의심하게 되고 세상이 무섭게 느껴지는 단점이 있긴 하다. 드라마 속에는 선해 보이는 데다 심지어 잘생긴 사이코패스가 왜 그렇게 많은지……. 선하고 매력적인 사람이 알고 보니 사이코패스 범죄자인 설정이 많다 보니 나도 모르게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커지는 것 같다.
게다가 검찰이고 경찰이고 비리는 무슨 고구마 줄기도 아닌데 파헤칠수록 계속 딸려 나오는지, 세상에 대해, 사회 구조에 대해, 인간에 대해 회의가 들 때도 있다. 실화 모티브인 드라마도 워낙 많고, 드라마라는 게 어느 정도 사회상을 반영하는 것도 사실이니 말이다.
그래서 가끔씩 어두운 뒷골목과 선혈이 낭자한 장면에서 벗어나 힐링하기 위해 비(非)범죄 드라마도 본다. ‘갯마을 차차차’, ‘일타 스캔들’, '멜로가 체질', ‘폭싹 속았수다’, 그리고 최고의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와 ‘슬기로운 감옥 생활’, ‘슬기로운 의사 생활’ 이런 건 당연히 다 봤다. ‘낭만낙터 김사부’, ‘중증외상센터’ 같은 의학 드라마도 즐겨 본다.
외화도 가끔 보는데, ‘에밀리, 파리에 가다’, ‘브리저튼’, ‘뤼팽’, ‘아웃랜더’ 이런 것들은 새로운 시즌이 나올 때마다 기대 만발이다(‘아웃랜더’는 시즌이 너무 많아지면서 이제는 좀 흥미가 떨어지긴 했다).
오해할까 봐 덧붙이자면, 애들이랑 같이 보는 드라마는 12세 이상 또는 15세 이상이다. 19세 이상은 혼자 있을 때 보거나 주로 핸드폰으로 본다. 15세 이상인 드라마를 볼 때는 올해 중학생이 된 아들한테 걸맞지 않은 장면이다 싶을 땐 쿠션으로 잽싸게 얼굴을 가려 준다.
고등학생 딸은 잔혹한 장면도 잘 보는 편인데, 담담한 얼굴로 “저거 다 가짜잖아.”라고 하면서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는 스타일이다. 반면에 아들은 나를 닮아 겁이 많아서 사람이 죽는 장면이라도 나올라치면 기겁하며 이젠 알아서 쿠션을 찾는다.
미안하다, 아들. 그렇다고 내가 너 때문에 내 취향을 바꿀 수는 없잖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