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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호숲 Dec 26. 2020

곤마리 정리법 덕분에 이혼 안 하고 잘 삽니다

곤마리 정리법 성공이랄지 실패랄지

나는 결혼 3년 차다. 전쟁 같았던 신혼에서 안정기로 넘어갈 수 있게 가내 평화를 찾아준 건 다름 아닌 넷플릭스의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였다.


퇴사를 하고 한가로운 아줌마가 되니 일명 ‘남편의 양말 뒤집어 놓기’가 (조금 오버하자면) 왜 가부장제의 메타포로 통용되는지 이해하게 됐다. 실업자가 되니 집이 내 일터가 되었는데, (나보다 서열이 낮은) 남편이 집안일을 하기는커녕 일을 가중하면(양말 뒤집기 등) 화가 안 날 수 없다. 이건 마치 퇴근 5분 전에 일이 생긴다거나 다른 사람이 벌린 일을 내가 수습하는 그런 느적느.


그런 개똥지빠귀 상사 같은 남편은 내가 영어 이름을 Jim으로 지어줄 만큼 짐이 가공할 정도로 많은 사람이다(심지어 한 씨라 '한 짐'...). Jim이 된 가장 큰 이유는 (나에게 말하지 않은) 사이코메트리 능력으로 추측한다. 남편은 추억이 깃든 물건을 못 버린다. 반대로 나는 잘 사고 잘 버린다. 누구는 쓸어 담고 누구는 버리기 바쁘니 싸우기 좋은 환경이 조성됐고, 우리는 환경에 완벽하게 적응했다.


조금 더 자세하게 얘기(뒷담)해 보겠다. 38평 신혼집으로 이사한 첫날, 나는 승용차 한 대로 이사할 정도로 짐이 적었고 하루 만에 정리가 끝난 반면, 남편의 짐은 38평을 장악해버렸다. 치우는 데만 두 명이 2주가량 걸렸다. 2주 동안 나의 루틴은 '기상→정리→출퇴근→정리→저녁식사→정리'였다. 며칠 만에 현타가 와서 정리하던 물건을 조용히 바닥에 내려놓고 집을 나가버렸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맨날 집 정리만 해야 되는 건지 억울한 와중에 열심히 정리에 임하지 않는 남편을 보고 신혼이라면 느껴서는 안 될 것 같은 빡침을 느꼈다. 그게 부부로서의 첫 싸움이었다.


내가 '서드 임팩트'라고 부르는 사건의 발단은 암묵적인 공용공간인 TV 서랍장의 한 칸을 차지했던 서류봉투였다. 당연히 집문서나 중요한 게 있겠지, 추호도 의심하지 않고 호기롭게 자리를 내줬건만 어느 날 호기심에 봉투를 열어 보니 남편이 대학생이었을 때 했던 설문조사 답안지가 마치 어제 받은 양 정갈하게 쌓여 있었다. 첫 싸움 이후 짐 때문에 싸운 게 한두 번이 아니라 쌓인 불만이 우리 세계를 멸망 직전까지 가게 했다.


대학교 때의 추억만 간직하면 우리 Jim이 아니다. Jim은 시누이가 유치원 때 쓰던 침낭도 차곡차곡 신혼집 창고에 숨겨둔 전적이 있고, 안 쓰는 CD플레이어 3개, MD플레이어 2개, MD 몇십 장과 기타 음향기기가 가득한 3단 서랍장을 그대로 본가에서 자취방으로 그리고 신혼집으로 몰래 가지고 다니다가 결국 나에게 적발됐다.


덕분에 신혼을 화려하게 매일같이 격투신, 싸움신 등 막장드라마를 2년 동안 찍던 중 우연히 넷플릭스에서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 광고가 떴다. 정리 컨설턴트의 단정한 모습과 깔끔하게 정리된 물건의 모습을 보고 홀린 듯 재생 버튼을 눌렀고 정주행 해버렸다.


여태까지 부모님께 배우거나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정리법과 차원이 달랐다. 그저 가시 공간을 예쁘게 만들기 위해 짐을 숨길 틈새를 찾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을 정리한다는 느낌으로 정리에 임하는 방식이 매력적이었다. 유명한 수학 공식이나 명언처럼 간결한 정리법 또한 나를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시종일관 의뢰인과 집, 그리고 물건에 예를 갖추고, 어떤 당황스러운 상황에도 “이런 건 처음이에요!”라며 웃으며 긍정적으로 대처하는 곤도 마리에 씨도 너무나 사랑스럽고 존경스러웠다. 시청하는 내내 종교에 귀의해 구원받은 느낌이었다. 프로그램에 나온 실제 의뢰인들의 집과 삶이 달라지는 걸 보면서 우리 부부를 구원할 방법은 이 정리법밖에 없음을 직감했다.


‘곤마리 정리법’에 따라 집을 정리하고 반년 정도는 정석적으로 집이 깔끔했다. 다행히 남편도 곤마리 정리법에 동참해주었고 미니멀리스트 집처럼 짐이 다 정리되지는 않았지만 살만해졌다. 결벽증에 가까운 친정 엄마 등 손님이 불시에 와도 ‘패닉 청소’를 하지 않을 정도로.


반전이 있었다. 내 백수생활이 지속되면서 다시 회사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커지고, 그렇다면 다른 먹고살 길을 빨리 찾아야 한다는 초조함이 엄습해 왔다. 그래서 이런저런 일을 벌이면서 바빠지니 내 식대로 ‘곤마리 정리법’을 정리해버리고 말았다. 곤도 마리에 씨의 명언 중 요즘 신조가 되어버린 건 이거다. '이 정리법으로 집을 한 번 정리하고 나면 집이 지저분해도 스트레스받지 않아요. 모든 물건에 정해진 위치가 있기 때문에 금방 정리가 끝날 것을 알기 때문이죠.' 곤도 마리에 씨께 정말 감사하고 죄송하지만, ‘사람이 이렇게까지 너저분하게 살 수 있구나~’라고 감탄할 만큼 남편 물건으로 집이 더러운데도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 언제든 금방 정리가 된다는 걸 알고, 믿기 때문이다. 집이 깨끗할 때보다 더러울 때가 더 많은 것 같지만. 짐이나 정리 때문에 싸우는 부부라면 꼭 곤마리 정리법을 권하고 싶다. 삶이 살만해지는 기적을 경험할 것이다.


곤도 마리에 씨 미안합니다. 그리고 고마워요.



현재 남편 책장. 정리하고 정리하고 또 정리해서 이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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