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하면서 끄적여보는 '쓸 때 있는(write)' 생각
역(逆)주행.
미디어 등을 통해 꽤 보편화된 단어다. 혹 주변에서 누군가 '역주행했다'는 말을 들으면, 이제는 '그러려니'할 정도로 흔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짐작하건대, '역주행'이라는 말은 지난 2013년 아이돌 걸그룹 EXID의 직캠이 예상치 못한 현재 시점에서 터지면서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여기에 오디션 등 수많은 음악 프로그램에서 참가자들이 부른 옛 노래가 재조명받는 분위기도 더해지면서, 단어의 쓰임이 더욱 대중화되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요즘 보면 '역주행'이라는, 어쩌면 신화(神話)처럼 여겨지는 고귀한 단어가 조금씩 작아지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제는 불과 발매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는 곡이 '역주행' 타이틀을 달고 다시금 우리 앞에 선다. 이런 현상을 마냥 부정적인 시선으로만 보는 것은 아니다. 다만, 말 그대로 지금 가고 있는 방향을 한 순간에 바꿀 정도의 엄청난 반동(힘)을 필요로 하는 '역주행'의 의미가 조금 퇴색된 것 같아 아쉬울 뿐이다. 그땐 몰랐지만 지금에서야 그 가치를 알아버렸다는 의미로 쓸 예정이라면 차라리 앞으로는 '재발견' 정도로 통용하는 게 좋지 않을까.
서두가 잠시 다른 곳으로 샜는데, 몇 주 전 우연히 귀에 들어온 노래가 있다. 걸그룹 하이키(H1-KEY)의 <건물 사이에 피어난 장미>다. K-POP 팬 사이에서는 이미 유명한 곡이지만, 하루가 다르게 점점 트렌드를 따라잡기 힘들어지는 필자에겐 꽤나 인상적인 곡이었다.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2023년이 시작된 지 3달밖에 되지 않았지만 올해 가요 중 가장 귓가를 사로잡은 곡이 아니었을까 싶다.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보통 노래를 들을 때 1차적으로 귀에 바로 꽂히는 선율을 제외하고선 '가사'를 곱씹으며 노래를 듣는 편이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영어가 잔뜩 들어간 랩이나 언어의 굴림성을 잔뜩 활용한 멜로디컬 한 노래보단, 이제는 옛 노래로 취급되는 7080 세대, 90년대 세기말의 서정적인 한글 위주의 노래들을 즐겨 듣는다.
아래는 올해 1월에 발매된 하이키의 <건물 사이에 피어난 장미> 가사 앞부분이다.
건물 사이에 피어난 장미
제발 살아남아 줬으면
꺾이지 마 잘 자라줘
온몸을 덮고 있는 가시
얼마나 힘이 들었으면
견뎌내 줘서 고마워
예쁘지 않은 꽃은 다들
골라내고 잘라내
예쁘면 또 예쁜 대로
꺾어 언젠가는 시들고
왜 내버려 두지를 못해
(이하 생략)
곡의 멜로디를 한 번도 들어보지 않은 어떤 이가 위 가사를 먼저 접했다면, 시(詩) 같다고 말할 가능성이 높을 정도로 최근 가요계에서 찾아보기 힘든 가삿말이다. 하물며, 몇 마디 되지 않은 문장 속에는 무한경쟁체제와 외모지상주의 아래 찍어내듯 만들어지는 아이돌 및 연습생들의 열악한 환경, 그리고 이들을 어떻게든 깎아내리려는 도 넘은 일부 악성 네티즌과 K-POP팬의 모습까지 마치 현시점 아이돌 산업의 세태를 꼬집는 듯하다.
한 가지 더, 소위 말하는 '싸비(노래의 후렴구를 지칭할 때 쓰는 음악계 은어)'에 들어서면 팬들이 말하는 '극락 파트'가 이어진다. 속 시원한 꼬집기를 넘어서 가슴 뭉클한 감동까지 느껴진다.
나는 건물 사이에 피어난 장미
삭막한 이 도시가 아름답게 물들 때까지
고갤 들고 버틸게 끝까지
모두가 내 향길 맡고 취해 웃을 때까지
삭막하다 못해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힘든 세상이지만, 고개를 들고 한 번 버텨 본단다.
해당 가사야말로 매일 똑같은 패턴의 삶을 살고 있는, 더욱이 왕복 3시간 이상의 출퇴근길을 짊어지고 있는 필자, 아니 세상 모든 현대인에게 큰 위로가 되지 않았을까. 최근들이 '노래로 위로받았다'는 말을 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심신이 지쳐 가던 도중 예기치 않은 순간에 따뜻한 손길을 건네받은 것 같았다.
이쯤 되니 '도대체 누가 이런 가삿말을 생각해 냈을까'에 대한 궁금증이 자연스레 생긴다. 마치 곡의 주인인 하이키에게도 '괜찮아, 잘하고 있어'라며 이미 잘 알고 있다는 듯 말해주는 이는 과연 누굴까. 신기하게도 이 곡의 작사가는 하이키와 같은 K-POP계의 선배, 보이 밴드그룹 '데이식스(DAY6)'의 보컬 '영케이'다.
꽤나 충격적이었던 포인트는, 곡의 제목처럼 단순 '건물 사이에 피어난 장미'를 보고 삶의 애환을 느꼈다는 점이다. 즉, 데뷔라는 목표를 위해 주야장천 청춘을 갈아 넣는 이들이 차마 직접 말하기 어려운 말을 가사에 녹여냈다. 어쩌면 본인이 데뷔까지 오면서, 혹은 데뷔를 하고 난 후 직접 느낀 소회를 곡을 통해 빌려 쓴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괜스레 기분이 좋았다. 결국 좋은 노래는 가삿말이 완성한다는 필자의 믿음에 중요하고 명확한 근거가 되어준 것 같달까.
대게 장미를 보고 슬픔의 감정을 느끼진 않는다. 하지만, 어느 누군가는 그 모습을 보고 슬픔의 감정을 느꼈고, 더 나아가 슬픔이 반(半)이 되도록 덜어주려고 했다. 멀리 돌아왔지만, 이 글을 통해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말은, 앞으로 우리네 인생에서 '감수성'은 굉장히 중요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말이다.
앞서 말했듯, 역주행이 됐건 재발견이 됐건 아무렴 좋다. 하이키나 데이식스의 팬도 아니다. 다만,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해당 곡을 한 번쯤은 들어보고, 일상에 치여 잠시 저 편으로 밀어 뒀던 '감수성'을 다시 가져왔으면 한다는 취지로 받아들여주면 정말 고마울 것 같다.
보통 '감수성이 많은 사람'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감성적인 사람'으로 치부한다. 그러나 감수성과 감성은 엄연히 다른 의미다. 사전적 정의로 미루어봤을 때, 감수성은 '외부 세계의 자극을 받아들이고 느끼는 성질'을 말한다. 즉, 타인에 대한 반응과 관련된 능력을 말하는 것으로, 나를 둘러싼 제반 환경(사람, 시설 등)을 잘 인지하는 광범위한 공감 능력을 내포한다.
감수성이 있는 사람은, (역주행처럼), 큰 힘을 내재하고 있는 사람이다. 감수성을 결국 주변 사람들 뿐만 아니라, 스스로에게 까지도 선한 영향력을 끼쳐 좋은 방향으로 변화를 이끈다고 생각한다. 과거에는 열심히 공부하고 많이 아는 것이 그 시대의 지성이었다면, 앞으로는 감수성을 가지지 못함이 곧 어리석음이 될 것이라고 감히 예측해 본다.
따뜻한 봄날, 퇴근길에 <건물 사이에 피어난 장미>를 들어보며 주변을 둘러봐 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