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에 한 번 독서토론모임이 있다. 책방보다 앞서 2015년부터 시작했으니 10년이 다 돼간다. 한창 재밌을 때도 있었고 심드렁해질 때도 있었고 안 하고 싶을 때도 있었고 최근 2, 3년간은 책임에서 한발 멀어져 있으니 부담없이 나가기 좋다. 회원이 10명이 넘으니 한 해 한 번 내 차례가 되면 책을 선정하고 발제문을 준비하고 토론을 진행하면 된다. 책 선정, 발제, 토론의 3박자가 딱 맞아떨어지면 기분이 좋고 하나가 삐끗하면 진행하는 2시간이 곤역이고 모임 이후에도 찜찜함이 남는다. 3요소 중 가장 중요한 건 단연 책 선정이다. 9월 선정한 책은 <차남들의 세계사>
“들어 보아라. 이것은 이 땅의 황당한 독재자 중 한 명인 전두환 장군의 통치 시절 이야기이다.”로 소설은 시작한다. 8-90년대를 풍미한, 총격과 피칠갑이 슬로우모션으로 비장하게 펼쳐지는 홍콩 누아르를 읽는 기분이다. 도로교통법을 위반한 나복만이 국가보안법 위반 수배자로 쫓기고 고문 당하다가 30년째 실종 상태에 있는 이야기다. 줄거리만 보면 ‘남영동’, ‘남산의 부장들’ 류의 선뜻 손이 가지 않는 고발극 같은데 심각하기보다 웃긴다. 평론가 신형철은 ‘작가라면 비극적 감상에 빠지기보다는 차라리 고통스럽게 웃어야(웃겨야) 한다는 것이 그의 윤리적 준칙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많이 웃은 만큼 결국 더 아파지기 때문에 희극조차 이미 비극의 한 부분’이라고도 했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요 멀리서 보면 희극’임을 이보다 잘 보여주는 소설이 있을까? 등장인물, 사건, 리뷰 등 책 이야기를 쓸려면 한 장은 너끈히 채우겠지만 백문이 불여인견이라 일단 한 장을 넘기기만 하면 끝까지 읽지 않을 수 없을 것이기에 이만 줄이기로 하자. 오늘 독서일기에서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는 이 책을 읽고 독서토론을 하면서 내가 무엇을 느꼈는가 하는 것이다.
독토를 수년간 꾸준히 해온 회원들은 발제자가 어떤 토론꺼리를 준비해오든 알아서 이야기를 잘 나눈다. 한쪽으로 치우친다 싶으면 다른 의견으로 시소 타듯 적절하게 균형을 유지할 줄 안다. 그렇게 믿고 <견딜 수 없는 사랑>을 맡았을 때 그날 대충 토론꺼리를 갖고 갔다가 망한 적이 있다. 대화가 원활할 때는 2시간이 모자라기도 하는데 그 유명하다는 이언 매큐언의 이날 작품 토론은 시간이 어찌나 진척이 안 되는지 진땀을 뺐다. 내가 정말이지 가장 사랑하는 소설 <이방인> 때는 사랑이 과한 나머지 발제에 너무 심혈을 기울여 분위기가 너무 진지하고 심오해 진흙구더기에 발이 빠진 것마냥 시간이 질척거려 또 진땀을 뺐다. 1년에 한 번 맡는 토론 진행이 잘 되는 날은 아주 기분이 좋고 스텝이 꼬이는 날은 아주 찝찝한 상태로 잠자리에 든다.
이러한 경험들이 쌓여 재미있는 책이니 토론도 잘 될 거라 방심하지 않는 경지까지는 이르게 되었다. 나름 자료도 찾아보고, 가볍고 심오하고 또 가볍고 진지한 분위기의 흐름을 고려하여 토론꺼리를 배치하였다. 이를테면 ‘나복만 이외 가장 인상적인 인물은? 어떤 점이?’를 먼저 나눈 후 ‘형제 관계에서 차남의 특성을 일반화할 수 있는 점이 있다면?’, ‘작품에서 장남은 전두환이다. 장남으로 볼 수 있는 또다른 누군가가 있다면?’으로 시각을 넓히고 ‘나복만에게 잘못이 있다면?’을 중점적으로 토론할 계획이었다. ‘죄없는 사람이 죄인이 되는 부조리 상황을 현실에서 찾아보는 것’으로 가볍게 마무리할 생각이었다.
‘사랑은 봄비처럼 내 맘을 적시고 지울 수 없는 추억을 내게 남기고’가 흘러나오는 책방으로 속속 사람들이 모여든다. 오, 음악이 너무 좋은데요라며 누구 노래냐 언제적 노래냐 20년밖에 안 됐네, 최신곡이네 가벼운 수다로 모임을 시작한다. 글을 읽고 쓰지도 못하는 바보 같은 나복만이 어떻게 각성하는지, 중앙정보부 정 과장이 나복만에게 <데미안>을 읽어주는 게 어떤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지까지는 차마 생각지 못했는데 이야기를 나누면서 <데미안>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나복만이 30년 수배 생활을 하면서 어떤 마음이었을까를 생각해보았다는 회원의 이야기에서도 아, 그 생각을 못했구나 싶었다. 완벽하게 준비해야지 했는데 역시 이번에도 완벽하지 못했다. 부족한 부분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많이 채웠다. 독서토론은 뭐니뭐니 해도 책 선정이 중요한데 이게 제일 힘들다. ‘독토에 책 추천 좀’ 메시지를 보내자 답이 왔다.
- 차남들의 세계사 어때요?
- ‘고래’나 ‘나의 삼촌 브루스 리’가 나을까 ‘차남’이 나을까?
- 차남이요.
주저없이 책을 추천해준 명원아, 땡큐. 독서토론을 하면서 도처에 책읽기의 고수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10월의 책은 김훈의 <개>다. 드디어 김훈을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