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다다오와 그의 건축, 뮤지엄 산
강원도 원주에 위치해있는 뮤지엄 산.
전시관이나 미술관에서 작품은 안보고 건물만 기웃거리는 사람들이 있다. 어디서 빛이 들어오는지, 마감의 디데일은 어떻게 했는지, 만져보고 사진찍고... 전시관이나 미술관은 건축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볼 거리가 두배이니 꽤 기분좋은 나들이이다. 나 또한 그런 사람중의 하나이다. 왠지 건축 명장이 지은 건축물이라면 꼭 가봐야 한다는 의무감같은 게 었다. 건물에 들어갔을 때의 분위기, 그에 압도당하는 기분. 무언가를 발견하면서 놀라움을 느끼는 것. 건축이 주는 즐거움이 바로 그런 것들이 아닐까.
뮤지엄 산은 내가 가보고싶은 곳 리스트에서도 꽤나 상위권에 있었다. 그럼에도 강원도 산자락에 위치해 있다는 이유로 엄두를 잘 못냈다. 차가 없는 뚜벅이 여행자로서 산자락은 많은 것을 감내해야만 도착할 수 있는 곳이었으니깐. 뮤지엄산은 "꼭 가봐야 할 뮤지엄 100선"에 꼽힐 정도로 아름답다고 한다. 방문자들의 후기만 살펴봐도 극찬이 자자했고, 그래서 더더욱 궁금해졌다. 고민만 하다가 셔틀버스가 있다는 걸 알고 바로 실행에 옮겼다. 원주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셔틀버스를 타면 40분이 채 되지 않아 도착한다.
SAN.
볼 때마다 참 이름 하난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든다. '산'이라는 말이 주는 평온함과 고요함은 안도다다오의 정갈한 건축과 맞물린다. 안도는 어른과 아이들이 이곳에 와서 자연과 예술에 대한 감성이 풍부해져 살아갈 힘을 되찾을 수 있기를 바라며 설계를 했다고 한다. 한솔제지 문화재단에서 설립한 이곳은, 처음엔 한솔 뮤지엄으로 시작하여 "산"이라는 테마에 맞게 뮤지엄 산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산마루의 아름다운 전망을 혼자 독점한 듯한 뮤지엄 산은 자연으로서 존재하며, 동시에 내부에서는 자연의 장면들을 새로이 발견할 수 있는 요소들을 지닌다. 입구에서부터 마치 산 속의 성벽을 보는 것 같은 돌담이 시작된다. 양쪽으로는 자작나무와 패랭이꽃밭이 이어진다. 겨울이라는 계절에 꽃을 볼 수는 없어도, 당일의 흐린 회색빛 하늘과 새하얀 자작나무숲이 겨울의 고요함을 느낄 수 있다.
뮤지엄 산을 설계한 건축가 '안도다다오'는 건축전공자 사이에서는 모르면 간첩일 정도로 유명하다. 건축계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프리츠커상까지 수상한 그는 단연코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하고 인기있는 일본 건축가일 것이다. 그의 건축물은 외부를 굉장히 단정하게 꾸리면서도, 내부의 동선을 극적으로 유도한다. 이는 그의 자연에 대한 그의 철학을 개념적으로 공간에 풀어내면서도, 공간을 경험하는 이용자들에게는 직설적으로 공감을 이끌어낸다.
안도다다오 건축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노출콘크리트 재료와 길게 뻗은 슬로프, 그리고 자연 빛.
안도의 건축물은 시선의 차단과 그에 이어지는 극적인 확장을 통해 동선의 드라마성을 확연히 느낄 수 있다. 그는 이용자들의 긴 동선을 유도한 후, 코너를 도는 찰나의 극적인 장면을 유도한다거나 틈에서 비춰지는 자연빛의 따뜻한 온도를 시각적으로 형상화한다. 명암없는 인공 조명 속에서 살다가, 어두운 공간 속의 아렴풋한 자연빛을 발견하면 그리도 반가울 수가 없었다. 이제는 익숙해질 법한 그의 건축적 장치들을 예측하면서도, 코너를 돌 때마다 마주하는 장면들에 나오는 감탄은 어쩔 수 없다. 예상하면서도 놀라는 그 경이로움. 그는 일부러 인공조명을 최소화하여 달라지는 자연빛에 따라 달라지는 공간의 무한한 변화를 감상하게 했다.
안도다다오의 또 다른 대표적인 특징 '물'과 '돌'. 그는 물을 건축적으로 해석한다. 풍경이나 나무, 작품들을 거울처럼 비추어 공간의 깊이감을 더한다. 짙은 색의 돌들을 물 안에 가두어 대비를 높이고 비추어지는 사물을 잘 투영되게 한다. 까만 돌과 투명한 물은 시선을 아래로 유도하여 그냥 지나친 것들을 다시 한번 들여다 볼 수 있는 여유 또한 내어준다. 가만히 앉아서 물의 출렁임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아무것에도 방해받지 않고 사색을 즐길 수 있다. 안도의 건축물에는 그의 자연에 대한 철학이 담겨있다. 기존의 지형을 파괴하지 않고 그대로를 살리기 위해 계단식 수공간을 두고, 공사 중 터파기에서 나온 돌들을 중정 공간에 재활용 하기도 한다. 군더더기 없는 수평의 매스와 담은 자연의 풍경을 해치지 않고 자연으로서 녹아들어 이를 조용히 관망할 수 있게 한다.
그의 건축의 주요 특징인 '빛'도 유심히 들여다 볼 요소이다. 공간들은 빛에 의해 사유되고, 변화한다. 인공조명을 최소화 했다고 해서, 그는 결코 창을 크게 내지 않는다. 빛의 극적인 유입을 시각적으로 형상화 한다. 그가 자주 활용하는 요소는 슬릿한 띠창. 천장의 띠창을 통해 들어오는 자연빛의 조도와 형태에 따라 공간은 무한히도 달라진다. 창의 틈새로 은근하게 스며드는 자연빛은 노출콘크리트의 투박함과 잘 어울린다. 매끈하고 세련되진 않지만 자연스러운 그리고 어딘가 따스한 그런 느낌을 준다.
전시장과 전시장 사이를 이동하다보면, 가만히 앉아서 밖을 바라볼 수 있는 의자들이 놓여있다. 가만히 앉아서 물의 출렁거림과 나무의 흔들림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평온해져 사색에 잠길 수 있다. 비록 숲이 초록빛으로 우거져있지 않은 겨울이었지만, 그 앙상한 나무의 뼈대들이 솔직해서 좋다. 때로 눈이 내리면 그보다 아름다울 수가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도슨트분의 말씀에 따르면 비오는 날은 우무가 아름답게 껴서 동양화같은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고 한다.
한솔문화재단에서 설립한 뮤지엄 답게 상설전시는 주로 '종이'에 관한 컨텐츠를 담고 있다. 종이의 역사부터 만드는 과정 등이 소개된다. 전시관에서 작품의 컨텐츠는 나에게 크게 중요하지 않지만 뮤지엄 산은 '종이'라는 컨텐츠에 맞게 전시공간 또한 건축적으로 형상화 한다. 종이라는 매체를 직관적으로 와닿을 수 있게 인테리어로 적극 활용하고, 외부공간에서의 수공간처럼 내부에는 유리를 벽면에 설치하여 공간의 깊이감을 준다.
페이퍼 갤러리를 지나면 바깥으로 스톤가든이 이어진다. 마치 경주의 고분들 처럼 스톤마운드 산책길이 곡선으로 이어져있다. 돌길을 걸으며 돌의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고분들 사이를 지나가는 바람을 느낄 수 있다. 스톤가든에는 명상관과, 제임스터렐관으로 이어지는 곳이 있다. 온김에 모두 다 보고가자며 통합권을 예매한 우리는 명산관에 예약을 해놓고 돌길을 산책했다. 뮤지엄산의 5주년을 기념하며 안도다다오가 선물했다는 명상관은 스톤가든의 연장선처럼 보인다. 돌이 쌓여진 돔 형태의 공간과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얇은 슬릿창이 스톤가든과 조화를 이루고, 내부에 들어서면 마치 자연의 품 안에 있는 듯 한 안락함을 준다. 별관인 제임스터렐관과 명상관은 나름의 강력한 컨텐츠들을 잘 유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명상관의 프로그램들은 다채롭고 평온하다.
나는 보통 뮤지엄이나 갤러리에 가면 작품들 보다는 공간의 형태나 마감 등에 더 집중하는 편인데, '제임스터렐관'은 온전히 작품에 집중할 수 있어서 더욱 좋았다. 예술가에 무지한 나는 처음엔 제임스 터렐이 누군지 조차도 모르고 관람을 시작했다. 안도가 산의 본관에서 자연빛의 다채로움을 보여주었다면, 제임스 터렐은 우리가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빛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마치 나의 상상력을 초월하는 공간에 다녀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빛과 공간의 예술가로 불리는 제임스 터렐은 빛과 공간을 잘 쓰는 안도 다다오와도 결이 비슷했다. 제임스 터렐관에서는 공간의 무한함과 빛의 변화, 자연의 사유에 집중한 콘텐츠들을 몸소 체험할 수 있다.
건축 공간에 집중하느라 컨텐츠에는 소홀한 편인데, 뮤지엄 산은 컨텐츠를 건축 안에 잘 녹여낸 듯 하다. 도슨트 프로그램도 잘 되어있고, 사용자들을 배려한 듯한 편의공간 또한 많다. 공간과 컨텐츠가 따로 노는 것 같은 일부 전시관들을 볼 때면 전시와 관람 모두에 집중하기 힘들었는데, 뮤지엄산은 나도 마치 자연의 일부가 된 것처럼 너무도 편안하고 자연스럽다. 번잡한 도시를 벗어나 고요한 산 속에 들어와 자연의 일부가 되는 경험이라니, 마음이 어지럽고 머리가 복잡할 때 쉬어가는 곳으로 정말 좋을 것 같다. 다음에 비가 오면 아름답게 낀 우무를 한 번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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