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시시스트는 타인의 주도권을 가로채려고 악을 쓴다
얼마 전 B는 A에게 막말을 시전 했다.
초등학생 같다.
진짜 짜증 나게 하네.
상대를 노골적으로 비하하며 신경질을 부렸던 것이다.
예전에 B는 평범하고 얌전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벽에서 페인트칠이 벗겨지듯이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A가 무슨 말만 하면 B는 훈계조로 무안을 주거나 고압적으로 짜증을 내며 하대했던 것이다.
네가 너무 바가지(싸가지)가 없다.
(따지듯이) 그래서 네가 듣고 싶은 말이 뭐야?
(명령조로) 그 사람한테 알아서 기어.
너는 이해력이……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너는 왜 아르바이트를 안 해?
그럴 때마다 A는 난감했다. 나중에 보니 B는 성정이 까다롭고 부정적인 감정을 자주 느끼는 사람이었다. 그 점을 감안해서 이해하려 애썼지만 불쾌해지는 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무엇보다 서로 친하다고 생각했다. 친밀해서 말실수를 한다고 해석했다. 하지만 우리는 친한 것과 함부로 대하는 것은 다르다는 걸 느끼곤 한다.
어떤 이들은 가깝다는 이유로 상대에게 본심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솔직한 태도는 나쁘지 않다. 문제는 과도한 솔직함이 가져다주는 부작용이다.
물속에 모래가 가라앉아 있는 장면을 상상하자. 물을 손으로 휘저으면 아래 깔린 침전물이 위로 올라온다. 깨끗해 보였던 물이 한순간에 혼탁해지는 것이다. 외부에서 그 물을 보던 사람은 그제야 물속에 이물질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한 진심이 좋지 않을 것일 때 솔직함은 손절의 릴레이로 이어진다. 상대를 하찮은 존재로 규정해서 무시하거나 배척하는 심성의 찌꺼기가 기어코 관계의 독소로 작용하는 것이다.
말 한마디의 위력이 참 크다. 그런데 누군가가 수도꼭지에서 물을 쏟아내듯이 수시로 네가 문제라고 손가락질하는 걸 당연시한다면 그 관계를 재고해봐야 한다. 건강한 친밀함이 아니라서 그렇다.
나는 다혈질이야.
내가 욱하는 성격이거든.
난 냉소적인 성격이야. 나도 내가 그런 걸 잘 알거든?
누군가는 살짝 자아도취적인 말을 하면서 무례함을 합리화한다. 그런데 저 말은 진솔하지 못하다. 이미 암묵적으로 서열을 정리한 그는 마음의 장벽을 스스로 무너뜨렸다. 따라서 타인의 기분을 고려해서 반응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약육강식의 사슬에 쉽게 순복 하는 사람의 심리가 그러하다.
이런 유형은 어리석게도 우리에게 어떤 말을 하든지 불이익이 없을 거라고 굳게 믿는다. 그러다 보니 무의식적으로 억압해 온 상처가 슬며시 고개를 드는 것이다.
그들은 과거의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경향이 있다.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제대로 감정 표현도 못하고 견뎠던 날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구석에 휴지조각처럼 구겨져 있었던 나약한 자아를 벗어던지려고 그들은 상대에게 의도적으로 화를 낸다.
만약 우리가 곤혹스러워하면 그들은 묘한 만족감을 느낀다. 그리고 이젠 더 이상 예전에 초라했던 내가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속삭인다.
B는 A를 공격할 때 망설임이 없었다. 실언을 후회하거나 반성하는 기미도 없었다. 대신 과하게 반가워하는 척을 해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연기’를 했다. 그의 말투가 일반적이지 않고 연극적이라 들어주기가 어색하고 민망했다.
그는 타인을 길들이려고 나름대로 생각해 둔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준 것이다. 알맹이 없는 칭찬 후에 따라오는 것은 적대적 비난이다. 그러니까 칭찬은 희생양을 옆에 묶어두는 밧줄이요 또 다른 비난을 하기 위한 징검다리일 뿐이다.
그는 본인의 잔소리에 시무룩해지고, 작은 칭찬에 기뻐하는 희생양의 전형적인 모형을 보려 했다. 희생양의 독립성을 무너뜨리고, 나르시시스트의 편집증적인 잔소리에 의존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A는 본인의 진짜 의사와는 상관없이 구박당하는 역할을 도맡게 됐다. B가 우격다짐으로 그 역할을 떠맡겼다고 볼 수 있다. 잘못된 방향으로 관계가 굳어진 것이다. 오히려 B의 태도에서 나는 원래 이 정도의 말도 할 줄 안다는 자부심마저 묻어났다.
이런 사고방식에 지배된 사람은 선과 악을 뚜렷하게 구분하지 않는다. 자신이 처한 입장에 따라서 선도 악이 되고, 악도 선이 된다. 그저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대로 상황을 비틀어 해석한다. 그러니 옳고 그름 사이에서 고민할 틈이 없다.
나르시시스트가 이와 같다. 그의 정신세계는 뻥 뚫린 고속도로다. 현실세계는 복잡다단하고 미묘한 입장차이가 존재한다. 하지만 나르시시스트의 세계에서는 오로지 나르시시스트의 생각이 다 맞다는 골목길만 존재할 뿐이다. 스스로 부족하다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니 잘못한 점을 교정할 기회가 없다. 부족한 걸 인정하면 발전의 가능성이라도 있다.
사과하는 척하면서도 오히려 원래 본인이 우기는 성격이라고 기세등등하게 설명하기도 한다. 그들은 자존심을 다치면 회복이 더디기에 사과할 상황에서 겁을 먹는다. 그래서 잘못을 인정하느니 궤변을 늘어놓으면서 도망치는 길을 택하는 것이다. 어리석게도.
훗날 A는 B의 언행을 하나하나 열거하며 도대체 나에게 왜 그러냐고 물었다.
이에 B는 이런 대답을 내놨다.
아, 네가 혼란스러운가 보다.
나는 그런 적이 없어. 다른 사람에게 들은 걸 내가 말했다고 착각한 것 아니야?
B는 가느다란 목소리로 기세등등하게 되물었다.
그는 제삼자의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이 정색했다. A가 모종의 이유로 혼란을 느꼈고, 화자를 혼동해서 애먼 사람을 잡았다는 게 B의 추측이었다. 그리고 기억이 안 나니까 없던 일이라고 우기기 시작했다.
나도 세세한 것까지 기억하는 편이거든. 그런데 내가 기억 못 할 정도면 차라리 없던 일이 아닐까.
B가 스스로를 지목해 기억력이 좋다고 주장하는 것은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평가에 불과했다. 결국 이 말은 B가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는 뜻이었다.
B는 스스로 도덕적인 면을 부각했다. 본인은 힘들어하는 A를 걱정했을 뿐이란다. 그리고 짜증이란 감정을 느낀 적이 없는데 짜증 난다는 말을 어떻게 하겠냐고 억울해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말습관을 강조했다.
나는 (짜증 난다는) 그런 말을 안 써. 나는 그런 말을 안 쓴다고(난 고운 말만 쓰려고 노력해).
B의 해명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얼마 전 그는 짜증 나게 하네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래서 A는 한동안 연락을 끊었다.
나중에 B는 말의 뉘앙스를 살짝 바꿨다.
나는 짜증이 나도 속으로만 생각하거나 뒤에서 말하지 사람 앞에서 말하려고 하지 않아. 그래서 내가 설마 그러랴 생각했어.
B는 A가 바가지(싸가지)가 없다고 비난한 적이 있었다.
A는 회사에서 모 선배인 H와 사이가 안 좋았다. 그는 A에게 고의적으로 먹다 남은 과자 봉지를 주면서 쓰레기를 버리라고 하거나 명령조로 업무를 지시했다.
내가 말했을 텐데?
너는 한 가지만 알고 두 가지는 모르는구나?
이렇게 H는 순간순간 얄밉게 굴었다.
언젠가 모 편집자가 H에게 짜증을 낸 적이 있었다. H가 나름대로 생각한 영상 구성 방식이 있었는데 그걸 늦게 알려줬기 때문이었다. 영상을 사분할 해서 다채롭게 만들어달라는 뭐 그런 부탁 같았다.
녹화시간이 코 앞이었다. 편집자는 점심시간 내내 편집을 했다. 그는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앞으로는 미리 알려달라고 쏘아붙인 뒤 꾸역꾸역 편집을 했다.
그런데 H가 한 마디도 못하고 억지 미소까지 보이는 것이었다. 그는 편집을 잘해달라며 손수 김밥을 사 와 대령하기까지 했다. 그 광경을 목격한 A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이런 H가 A에게만큼은 지나치게 까탈스러웠다. 결국 참다못한 A가 화를 냈다.
이 일화를 듣고 B는 어처구니없어했다.
네가 너무 바가지가 없다.
그리고 덧붙였다.
그 선배한테 알아서 기어.
그 사람이 쓰는 말은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려준다고 하던가. B의 표현법은 천박했다.
나중에 A가 이 에피소드를 말해줬다. B는 병아리 솜털처럼 경쾌하게 대꾸했다.
나는 그런 말을 안 써.
A가 실제사례를 여러 건 말했다. 하지만 B는 단조롭고 천편일륜적인 대답만 했다. 그냥 그런 말을 안 한다는 것이다.
B는 자기 인생을 24시간 돌아가는 카메라로 찍어두기라도 했단 말인가. 다 기억이 안 날 텐데 뭘 믿고 특정말을 절대 안 쓴다고 자부하는지 의문이다.
시간이 흐르고 나서 A가 다시 물었다.
지금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생각해?
B는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억은 안 나지만 내가 그럴 수도 있었겠구나 싶었어.
그리고 이유를 덧붙였다. 이전에 통화할 때 A가 소리를 지르는 것처럼 들려서 기분이 몹시 나빴다는 것이다. 그게 너무 화가 났단다. 그리고 이런 나를 만난 네가 안타깝다는 뉘앙스로 이렇게 변명했다.
내가 화가 나면 아무 말이나 하는 성격이야.
B의 말했던 걸 B가 부정한다. 이 부분이 당황스러웠다고 말했다. B는 A가 당황스럽다는 말에 기분 상해했다. 그래서 사실 나도 당황스러웠다고 맞받아쳤다. A의 말을 흉내 낸 것이다. 그럼 당황스러워서 거짓말을 했다는 건가? 주제가 모호하다.
A가 B에게 사과하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하지만 B가 사과할 상황이 됐다. 당황스러운 것은 당연하기에 이해한다고 응수했다. 그런데 A의 수용적인 태도가 B의 감정을 건드렸나 보다.
B가 당황스럽다는 받아친 것은 일종의 수동 공격이었다. 그는 듣기 기분 나쁜 말을 그대로 따라 해서 마음을 푼다. B의 예상대로라면 A는 공격당했다는 걸 눈치채고 기분 나빠해야 마땅했다. 그런데 A는 B를 이해한다면서 허용적인 태도를 취했던 것이다.
당황스럽다고? 나도 당황스러웠는데? 이러면 상대가 무안해서 물러설 줄로 예상했다.
하지만 A는 B의 공격을 스펀지처럼 흡수했다.
누군가에게 공을 던진다. 그럼 다시 공이 돌아와야 한다. 그런데 상대는 공을 받을 뿐 돌려주지 않는다. 그럼 받을 공이 없다. 공을 던진 사람은 그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 B이 심정이 이런 것이었다.
그는 복사기처럼 타인의 말을 그대로 따라 해서 거울처럼 반사했다. 그럼 잘못한 사람은 지워진다. 잘못을 비판하는 인물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돌린다.
B는 A의 등 뒤로 숨으려 했다. 늘 그는 사람들을 비난해 왔다. 쟤는 뭐가 잘못됐어. 재는 뭐가 이상해. 그러면서 살짝 자신은 그러지 않은 사람이라고 어필했다. 사실 다른 사람을 비하해서 자신을 올려치기 하는 수법을 썼던 것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A는 B처럼 행동하지 않았다. 하지만 B는 자신의 진짜 잘못을 가리고 싶었던 것이다.
이 일의 시작은 A의 전화 한 통이다.
한동안 A는 몸이 아팠다. 하루하루 고문당하는 심정으로 버티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몇 년 전에 알고 지냈던 B가 떠올랐다. 종종 안부를 물으며 지냈지만 서서히 연락을 끊겼었다. 그래도 아직 핸드폰에 연락처가 남아 있었다.
망설이다 전화를 걸었다. 힘들다고 상황을 설명했다. 그런데 B의 반응이 이상야릇했다. 웃음기 스민 목소리를 냈던 것이다. 순간 A는 불쾌감이 올라왔다. 하지만 물속 잉크처럼 퍼지는 감정의 원인을 핀셋으로 딱 집어내 설명하기 애매했다.
누군가와 대화하고 기분이 오묘하게 가라앉을 때가 있다. 딱히 모난 말을 듣지도 않았는데 뒤끝이 찜찜하다. 모호하게 부유하는 기분을 선명하게 정의하기가 난처하다.
모든 현상에는 원인이 있다. 이윽고 제삼자가 내가 물어보지도 않은 후일담을 전한다. 걔가 나를 안 좋게 봤다느니 예전에 네가 했던 말이 서운해서 고의적으로 까탈스럽게 굴었다는 종류의 낯선 얘기들 말이다.
예상치 못한 이야기라면 더 당황스러우면서도 속상하다. 어렴풋이 짐작했던 내용일 때도 있다. 이럴 때는 무덤덤하면서도 허탈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때로 감정은 진실을 알리는 표식으로 작동한다. 기분이 나쁜 것은 착란이나 착각 혹은 피해망상이 아니었다. 이는 사물처럼 실체가 있었다. 정말 공격받았던 것이다.
그는 무시하려는 마음을 억제하려고 부단히 노력했을 수 있다. 작위적인 미소를 지은 채 유려한 언어로 본심을 색칠하면 상대가 모를 거라 낙관했을 것이다.
하지만 울퉁불퉁하고 뾰족뾰족한 감정을 감추는 것은 곧 타오를 불씨를 주머니에 넣어두는 격이다.
상당수는 진짜 마음을 완벽하게 가리지 못한다. 촉이 기민한 누군가에게 은은한 공격성을 들키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대개 그들은 스스로 정체를 드러낸다. 경멸하는 눈빛, 퉁명스러운 말투, 찰나에 변하는 어두운 안색 등 비언어적인 영역에서 말이다.
진심은 말보다 바디 랭귀지에 짙은 지문을 남긴다. B는 바닥에서 힘껏 뛰어오른 탱탱볼처럼 A의 감정을 튕겨냈다. 심각함을 가벼움으로 받았다. 그게 B의 진심이었다.
누군가는 악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싸우기로 작정한 것처럼 잽을 훅훅 날린다. 소소한 일에 과하게 히스테리를 부린다. 너 때문에 큰 문제가 벌어졌다는 듯 호들갑을 떤다. 당혹해하는 우리를 보며 그들은 본인이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이상한 착각에 빠진다.
얼마 전 A는 이직했다. 3개월마다 구인란에 등장하는 회사였다. 사원은 20명 남짓이었다. A는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고 있었다. 그러다 몸살이 났다. 자연스럽게 찾아온 연례행사였다. 어떤 회사든 이직하면 한 달 이내로 몸이 아프다. 스트레스와 육체적 피로 덕분에 말이다.
A는 당일 오전 회의에 참석하지 못할 듯했다. E에게 전화해 자초지경을 설명했다. 그는 알았다고 짤막하게 답한 뒤 전화를 팍 소리 나게 끊었다.
그런데 몇 분 후 다시 연락이 왔다. 아까 운전 중이라 빨리 끊은 것 같아 다시 걸었다는 것이다. 정말 운전 중이었는지 짜증스럽게 전화 끊은 걸 만회하려고 핑계를 만든 건지 모른다.
그래도 거기까지는 나쁘지 않았다. 다만 남이 아픈 상황을 두고 그가 경박한 감상평을 남긴 게 문제였다. E는 가볍게 실실거리며 말했다. 정말 특이해.
아파서 결근하는 게 특이해? E처럼 표현하는 사람을 처음 봤다. 차라리 꾀병 아니냐고 물어보는 게 나았다. 회사에 병가라는 개념이 있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기계도 쉬지 않고 작동하면 고장 난다. 일하다 아픈 것은 누구나 겪는 보편적인 상황이다. 이런 경우를 특이하다고 우기는 E가 정말 특이하다.
팀원의 개인사로 공적 일정에 차질이 생기자 E는 불만이 생겼고, 모난 마음을 이상한 방향으로 발현시켰다. 짜증이 나자 반대급부로 이 상황이 우습다는 듯 억지로 겔겔거렸던 것이다.
어느 날 이 해묵은 에피소드가 소환되는 일이 벌어졌다.
모 차장은 E에게 백신 미접종자가 있다고 보고했다. 기혼자인 차장은 초등학생 아이와 살고 있었다. 만약의 사태에 가족까지 피해를 받을까 싶어 며칠 동안 걱정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직 A는 백신의 효능과 부작용에 확신이 없었다. 그래서 미접종자를 꺼리는 분위기였음에도 선뜻 백신을 맞기가 망설여졌다. 그러다가 면접에 합격했고, 출근하게 된 것이다.
입사한 날 A는 몇몇 회사 사람들과 점심을 먹었다. 그들이 미리 찜해 둔 좋은 식당 앞까지 갔지만 도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A만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접종자임을 증명하는 큐알코드가. 접종자를 일일이 확인하던 시기였다. 결국 A는 사람들에게 사과했다. 민망하고 뻘쭘했다. 미접종자 한 명 때문에 애꿎은 접종자들은 번거롭게 다른 곳을 찾아다녀야 했다.
그리고 며칠 후 E는 A를 급하게 호출했다. 바로 백신 때문이었다. 이제야 전해 들었나 보다. E는 예기치 못한 상황에 화들짝 놀란 모양이었다.
처음에 누가 그 사실을 전했는지 말하지 않았지만 A는 유도신문으로 알아낼 수 있었다. 나로 인해 누군가가 걱정하고 고민했다니 미안할 따름이었다. 물론 백신의 효과를 굳건히 믿는다는 전제가 깔린 걱정이겠지만 말이다.
백신을 안 맞았다며.
E가 재차 확인했다. 아니길 바랐을까.
네.
A는 그렇다고 답했다. 애초에 숨길 마음은 없었다. 그리고 백신 때문에 퇴사의 기로에 선다는 게 내 이야기가 될 줄 몰랐다.
혹시 종교적인 이유야?
E가 다시 물었다. 종교 때문이라면 차라리 이해한다는 뉘앙스였다.
아니요.
A는 아니라고 단호하게 답했다.
A의 대답에 E가 인상을 찡그렸다. 그는 본인의 의견을 반대하는 사람을 무척 싫어했다. 누군가가 조금이라도 다른 의견을 제시하면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리고 앙심을 품었다.
아까처럼 그는 다른 사람을 특이하다고 비틀어 말하거나 일부러 소리를 내며 비웃었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부적절하고 과장스러운 행동을 반복했던 것이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E의 의견을 반박하거나 지적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크게 받는다는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들으면 안 되는 말을 들은 것처럼 어쩔 줄 몰라하며 허우적댔다.
E에게 대화란 남보다 본인이 괜찮은 존재라는 걸 확인하는 수단이었다. 그는 상대방이 자신의 주장을 가치판단하지 않고, 무조건 끄덕거리길 바랐다.
하지만 그런 기대에 일방적으로 맞춰주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바로 E이라는 사람 자체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A가 입사한 날 E가 말했다.
그런데 우리가 3개월 간 수습 기간이 있어. 내가 까먹어서 그때 말을 못 했어.
A는 E의 변명이 거짓말이라고 판단했다. 상식적으로 수습기간이 있으면 회사는 구인구직 사이트에 수습기간은 몇 개월이라고 적시한다. 당연하다. 누가 가르쳐줘야 아는 건 아니다, 이런 종류의 일이.
그런데 그 회사는 365일 사이트 ‘인간 속’에 구인하면서 수습이라는 단어를 절대 적지 않았다. 이를 E도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새로운 직원이 입사한 후에 준비했다는 듯 그 멘트를 친 것이다. 수습기간이 있다고 말이다. 그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가볍게 읊조렸다. 상대가 별 것 아닌 걸로 인식해 주길 바라는 것처럼.
그리고 수습기간을 통과 못한 사람이 거의 없다고 덧붙였다. 역시 사실이 아니었다. 그 작은 회사에서 3개월에 한 번씩 직원이 바뀐 걸 이미 확인했다. 그리고 수습 기간의 여부를 정말 사소한 일이라고 인식했다면 오히려 수습 기간을 기입했을 터였다.
게다가 면접을 한 시간 동안 봤다. E는 내내 사규와 복지 등 여러 가지를 자세하게 설명했다. 채용 과정을 솔직하게 말할 기회가 있었다. 하나 그는 의도적으로 수습사원을 뽑는다는 사실을 누락했다.
심지어 수습기간이 명시된 계약서를 쓰는 절차까지 따로 있었다. 하얗게 질린 종이에 '갑'과 '을'이 선명하게 낙인처럼 찍혀 있었다. 행정사원은 익숙하게 서류를 꺼내 보이며 새로 온 수습사원에게 사인을 요구했었다.
행정 서류까지 구비돼 있고, 회사가 3개월에 한 번씩 구인한다. 그런데 면접관인 그가 말하길 수습이라는 채용과정을 ‘까먹었단다 ‘. 애초부터 그는 금방 들킬 수밖에 없는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상대가 그걸 모를 거라고 여겼다면 안일한 것이고, 알 거라고 예상했으면서도 까먹었다고 말했던 거라면 비겁한 것이다.
일단 백신을 맞지 않는 게 종교 때문이라는 건 E의 억측이었다. A는 본연의 마음과 E가 추측이 너무 달라서 입장을 확실하게 전달하고 싶었다. 그런데 틀렸다고 반박하는 뉘앙스로만 받아들였는지 E의 미간이 급하게 좁아졌다. 이것조차 감정이 상한 거야? A는 여러 모로 난처했다.
오만하던 E가 그때만큼은 자세를 굽혔다. 상대에게 무언가 얻으려 할 때 그는 과하게 몸을 굽혔다.
E는 넌지시 운을 띄웠다.
백신을 맞는 게 어때. 강요하는 건 절대 아니야.
그는 말하는 도중에도 여러 차례 손사래를 치며 강요가 아니라 권유라고 우겼다.
그리고 이어 말했다.
마케팅 차장도 가족 중 한 명이 코로나에 감염됐어. 그런데 그 차장만 음성으로 나왔어. 백신을 맞았으니까 그랬다고 생각해.
막판에는 선심을 쓰듯이 덧붙였다.
네가 백신을 맞는다면 하루 정도 휴가를 줄 수도 있어.
백신 맞고 아프면 참작하겠다는 거다.
A는 B가 뱉었던 망언이 떠올랐다.
아파서 결근하는 사람이 특이하다며? 그런데 백신 맞고 아프면 휴가를 써도 된다고? E에게 특이한 선택일 텐데 과연 그래도 되는가 말이다. 휴가라는 선택지를 제시한 E도 특이한 사람이 될 터인데 과연 그래도 되는가 말이다.
논리적으로 말이 되든 안 되는 E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사사건건 E는 텃세를 부렸다. 그게 자신의 입지를 확보하는 길이라고 믿었다. 잘못된 믿음은 사람을 잘못된 길로 이끈다.
또 어떤 이는 옳고 그름을 따질 이유가 없는 일에 특정인의 의견만 매몰차게 반박한다.
어느 날 A의 회사에 유명배우가 왔다. 그는 실물이 너무나 뛰어나다고 정평이 나 있었다. 환호성으로 단체대화방은 들썩거렸다.
A는 재밌는 대화에 끼려고 간단한 추임새를 넣었다. 그런데 곧바로 불쾌한 문자가 올라왔다. 한동안 아무 말도 없던 F가 ‘여자들이란’이라는 무지성 비난을 날렸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온갖 말을 해도 가만히 있더니 A의 문자가 올라오자마자 짜증을 냈다.
대화방은 싸늘해졌다.
F의 문자를 본 누군가가 다른 팀 대화방의 캡쳐본을 올렸다. 남자 인턴의 문자였다. 유명배우의 방문에 설레어하는 평범하고 귀여운 내용이었다.
그가 F에게 물었다.
얘는 남자인데 왜 그래?
이 질문에 차마 F는 ‘남자들이란’이라고 막돼먹게 대꾸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했다. ‘여자들이란’ 발언에 그는 부정적인 의도를 담았기 때문이다.
방금 전 상황과 동일한 조건에서 왜 똑같이 발언하지 못하는가. F는 나쁜 말로 같은 편(?)을 욕하지 못했다. 스스로를 비하하는 꼴이 되는 건 두려웠던 것이다.
F가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알맹이 없는 비난을 한 이유는 투명했다. A를 싫어했다, F는.
A가 누군가의 결혼식에 축의금을 모으자고 의견을 제시했을 때도 그는 과민반응을 보였다.
축의금 단톡방에 초대받은 F는 물음표를 연달아 보내더니 본격적으로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이미 난 생각해 둔 축의금 금액이 있는데 갑자기 왜 모아서 내냐며 본격적으로 따지기 시작한 것이다.
A는 너는 따로 내면 된다고 설명했다. 꼭 같이 내자는 게 아니라 의견을 구하는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F는 문자를 줄줄이 보내며 떠들었다. 왜 축의금 같이 내자는 거죠. 어쩌고 저쩌고. 이러쿵저러쿵.
친했던 사람이라 축의금을 많이 준비해서 팀원과 합쳐 내는 게 내키지 않는다고 말하면 된다. 감정 섞을 건 없었다. 대단한 거냐고, 이게.
A는 F를 달래며 좋게 마무리지으려 했다. 다른 사람들은 말없이 F의 나 홀로 돌진을 지켜보고 있었다. 모두 이 에피소드가 어서 마무리되길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F는 이성을 살짝 잃었는지 급발진을 멈추지 못했다.
A는 F가 미리 축의금을 준비한 지 몰랐다. 들은 바가 없다. F는 준비했다고 말할 이유가 없다. 또 돈을 모아서 내자고 누군가가 말한 거라는 걸 예측 못했을 것이다.
그럼 간단하다. 따로 내면 된다. A는 따로 내면 된다고 누차 설명했다. 그래도 F는 못마땅함이 아직 안 풀렸는지 왜 합해서 내자고 하냐며 다 끝난 얘기를 붙들고 늘어졌다. 대화방은 엉망진창이 되고 있었다.
보다 못한 누군가가 F를 말렸다.
F야, 원래 축의금 모아서 낼 때도 있어.
그가 A의 편을 든 건 아니었다. 있는 그대로 말한 것일 뿐이다. 그래도 분위기상 A의 의견에 한 표를 던지는 듯한 모양새가 됐다. 이에 F는 당혹스러워하더니 급기야 대화방을 나가버리고 말았다.
일방적으로 공격당하면 답답하다. 작은 힘듦으로 치부하려고 해도 자꾸 신경이 쓰인다. 미미한 타격이 반복되면 크게 아플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겪는 상당수의 일은 작은 규모다. 그러니까 큰 일보다 작은 일로 마음이 상할 때가 더 많다.
F는 다른 선후배들의 짓궂은 농담에도 허물없이 웃는다. 특정인에게 불만이 있어도 뒤에서 말할 뿐 앞에서는 깍듯이 인사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F가 신경 써서 예의를 갖추는 대상은 대개 상대적으로 나이 많은 ‘남자 어른’이었다.
상대가 무례한 게 확실하다. 그래도 까닭을 묻기 망설여진다. 진지하게 정색하기 뻘쭘하다.
걔는 표면적인 상황을 물고 늘어지는데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솔직히 왜 날 싫어하는지도 알 것 같다. 그래도 마음을 풀자고 먼저 손을 내밀거나 혹시 예전 일로 그러냐고 과거를 소환해서 확인하는 것은 조심스럽다. 상대는 정작 속얘기를 안 하고, 돌리고 돌려서 공격만 해댄다. 그때마다 똑같이 되받아치는 것도 힘들다.
누군가는 사회성을 발휘한다. 날 공격하는 대상이 상처받을까 염려하는 것이다. 심지어 내가 왜곡해서 해석하는지 자신의 판단력을 의심하기도 한다.
감정은 물의 자연스러운 흐름과 같다. 틀린 감정은 없다. 감정은 내가 계획하고 의도해서 경험하는 게 아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어떤 감정을 느껴야 맞는지 헷갈려할 때가 있다.
그래서 그들은 인간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침해당했을 때 스스로를 방치하곤 한다. 분명 나를 딱 짚어서 괴롭히는 게 느껴져도 빠르게 대응하지 못할 때도 많다. 단지 잘 지내고 싶다는 이유 하나로 심적 고통을 외면하기도 한다.
부정적인 의도를 꼬아 내뱉는 그들은 이렇게 조심스러운 심리를 염두한다. 그리고 상대방이 역공하는 게 두려워서 중의적으로 말한다.
우리 앞에서 제삼자가 별로라고 불평한다. 제삼자가 정말 실존하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얘기의 맥락상 그는 제삼자를 논하고 싶은 게 아니다. 눈앞에 있는 내가 저격대상이다.
우리가 발끈하면 일이 커지니 방어막을 치는 것이다. 이는 스스로 공격자임을 인지하고 있다는 의미다.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으면 안정감이 생긴다. 나중에 농담이었다느니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느니 널 위해서 한 말인데 심각하게 받아들였다느니 둘러대서 자신을 보호하면 되니까 말이다.
B를 변호해 보자. 그도 갑작스러운 연락이 난처하고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예전에 서로 터놓고 속 얘기를 많이 했다. 하지만 과거일 뿐이다. 심지어 연락도 끊겼었다. 좋지 않은 일로 다시 연락받은 상황이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B는 외부 환경이나 타인에게 타격을 쉽게 받는 성향이었다. 그래서 매사에 쏘아붙이거나 따지는 상황을 연출할 때가 잦았다. 그는 스스로를 다혈질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B는 일반적인 다혈질이라기보다 상처를 잘 받는 쪽에 가까웠다.
B는 불평과 불만이 많고, 그걸로 내내 스트레스를 받아 필요 이상으로 감정을 소모하곤 했다. 싸움이 일이요, 싸워서 자신을 증명해 나가는 게 그의 일과였다. 나중에 그가 히스테리를 부리는 인상으로 각인될 정도였다. 사람들은 B를 부담스러워했다.
무엇보다 문제가 생기면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는 게 나을 때가 훨씬 많다. 위기에 빠졌을 때 뼈와 살이 되는 얘기를 듣기란 힘든 일이다.
그리고 답답함을 해소하려고 허물없이 개인사를 토로하면 험담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일방적으로 배척당하기도 한다. 고민상담은 약점을 공유하는 것이다. 친하다는 이유로 위로받을 거라 막연하게 믿는다면 크게 실망할지 모른다. 인간은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연약하다.
무엇보다 A가 겪는 고통은 오롯이 A의 몫이다. 삶은 각기 다른 모양으로 힘들다. 모두 나름대로 삶의 괴로움을 감당하며 살아간다. 나 대신 인생의 짐을 대신 질 사람은 없다. 가족도 그러하다. 타인은 오죽하겠는가. 그러니 누구든지 나에게 나만큼 신경 쓰기 어렵겠구나 여기자.
그리고 내가 아닌 타인의 불행에 오히려 위안을 얻는 경함이 있다. 무의식적으로 자신과 비교하면서 저 사람의 처지보다는 내가 낫다는 의식이 올라오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혼자다. 아무리 가까울지라도 서로 칸막이를 두고 서 있는 것과 같다.
B는 타자의 경험이나 감정에 공감하기가 어렵고, A가 나에게 왜 저러나 싶은 의문부호가 따라붙었을지 모른다.
A는 B의 반응에 당황스러웠다. 망신당하는 기분이었다. 부끄럽기도 했다.
그런데 참았다. 먼저 연락했다. 연락을 받은 상대방이 기대에 못 미치게 행동했다고 서운하다 말하기 곤란했다. 그리고 기분 나쁨을 구체적인 언어로 표현할 만큼의 심적 여유가 없었다.
어떤 사람은 죄책감을 잘 느낀다. 그래서 책임지지 않아도 될 일까지 책임지려 든다. 일이 잘못되거나 대인관계에 갈등이 생기면 무의식적으로 자신에게서 원인을 찾는다. 남이 잘못했다고 주장하는 걸 어색해한다. 오해를 받아도 해명보다 침묵을 택한다. 책임을 회피하는 것 같아 입이 선뜻 안 떨어지는 것이다. 소리 내어 말하지 않으면 거짓도 진실로 둔갑하는데 말이다.
책임을 감수하려면 고통받는 게 당연하기에 힘들다고 말하는 걸 사치로 여긴다. 마땅히 겪어야 할걸 겪으니까 곡소리를 못 내는 거다.
그런데 나르시시스트는 이렇게 자신을 알아서 정죄하는 유형을 좋아한다. 그런 성향이 나르시시스트의 목적과 닮아있기 때문이다.
나르시시스트는 희생양에게 자신의 열등감을 전가한다.
나르시시스트는 본인이 못났다고 인식하면 희생양에게 네가 못났다고 비난한다. 무리에서 소외감을 느끼면 다른 사람에게 왜 너는 마음을 안 여냐고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냐며 타박을 한다.
그는 자신감이 없으면 다른 사람이 자신감이 없다고 주장한다. 걱정하는 척한다.
구원자가 조언자의 역할을 자처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덧붙인다. 널 위해서 하는 말이야.
이런 행동의 근원은 나르시시스트의 의존적인 성격에 있다. 그는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는 이상한 압박에 시달리며 살아간다. 그래서 그들이 우리의 언행에 그토록 집착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나를 우러러보는가. 대단한 존재로 보는가. 이런 칭송 여부가 나르시시스트에게는 중요하다.
그가 모든 일에 작정하고 온갖 히스테리를 부리면서 우리를 하대하는 것은 자기 자신 때문이다. 나르시시스트는 타인을 통해 스스로의 가치를 가늠한다. 그래서 나르시시스트는 우리가 그의 기대에 어긋나는 행동을 할 때마다 실망감을 표현한다. 나를 더 대단한 사람으로 봐달라고 시위를 하는 것이다.
그런 나르시시스트 앞에서 자책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불에 기름을 붓는 것이요, 고양이에게 생선을 주는 것이다. 나르시시스트에게 결국 져주는 희생양은 막다른 코너에 몰린다. 나르시시스트는 사과를 받으면 소소한 칭찬으로 되돌려줄 거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보상과 압박을 반복하면서 상대를 길들이려 시도할 것이다. 그러니 애초에 여지를 주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