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시시스트는 오만하다. 그는 희생양을 적극적으로 무시한다. 그리고 자신을 과도하게 치켜세운다.
오만의 밑바닥에는 두려움이 깔려 있다.
타인에게 하찮은 사람으로 각인되는 걸 나르시시스트는 무서워한다. 평판에 유독 예민한 것이다. 그래서 평소 그는 완벽한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사활을 건다.
문제는 나르시시스트는 남을 후려치는 처세술로 이미지를 관리한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과 남을 의식적으로 비교한다. 결론은 내가 더 낫다는 거다. 괜찮은 사람이라고 스스로 여기면 그만인데 말이다. 좋은 사람은 스스로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자기 확신이 없으면 열등감에 쉽게 빠진다. 나르시시스트는 이런 열등감을 해소하려고 자신과 남을 비교한다. 스트레스를 병적인 방식으로 해소하는 것이다
또 다른 처세술은 '암시'다. 그는 '나는 아는데 너는 모른다'는 뉘앙스를 종종 흘린다.
용수는 말했다.
"아직 영미는 객관적으로 판단하기 어려우니까 나에게 먼저 물어봐."
그 말을 듣고, 영미는 무척 당황했다. 언뜻 들으면 이타적인 권면 같다. 하지만 이는 점잖은 척 하면서 상대의 판단력을 무시하는 발언이었다.
이 말에는 나는 객관적으로 판단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물론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맥락상 유추할 수 있다. 그게 용수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이었다.
그동안 용수는 객관적인 판단력에 큰 가치를 부여해 왔다. 그래서 사람들이 본인을 '객관적으로 생각할 줄 아는 사람'으로 봐주길 원했다. 그래야 인정받는 것 같았다. 그 바람을 담아 남을 걱정하는 시늉을 하면서 스스로를 뽐낸 것이다.
이것이 암시다.
보이지 않는 메시지를 읽어내자. 그의 진짜 의도를 파악할 수 있다
용수는 똑똑한 사람이 이상적인 정체성이었다. 진짜 똑똑한 사람은 오히려 자신을 부족하다고 여긴다. 용수처럼 누군가를 함부로 깎아내리지 못한다. 하지만 용수는 그렇지 않았다. 아직 어렸던 것이다.
용수는 사실 불만이 있었다. 사람들이 생각만큼 용수의 말에 주목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장점(?)을 몰라주는 사람들이 원망스러웠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자신을 자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진짜 의도는 감추고 싶었다. 상대가 동조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 반박이 들어올 걸 감안해 방어막을 쳤다. 그것이 암시하기였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간접적으로 말하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또 자신과 상대를 비교했다. 상대를 간접적으로 무시하면서 스스로를 올려치기했다. 그럼으로써 상대의 주도성에 무력감을 주려고 시도했다.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의 말을 반박하거나 쉽게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을 경쟁자나 적으로 인지한다. 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으면 위협적인 인물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래서 수동공격을 시전한다. 은근히 상대를 폄훼하면서 자신을 올려치기한다. 특히 그는 개인의 고유한 주체성을 깎아내리려고 노력한다. 용수처럼 말이다.
사실 평소 용수는 영미의 태도에서 이질감을 느꼈다. 그동안 영미는 남의 의견에 의문을 표시하거나 반대의견을 내곤 했다. 처음에는 수용적인 것 같았는데 다시 보니 그는 은근히 자신의 주장을 밀고 나가는 면이 있었다.
언젠가 여러 사람 앞에서 용수의 의견을 반박하는 모습을 보고, 용수는 무시당했다고 느꼈다.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자존심에 상처를 받았다. 나이도 더 많고, 내가 더 많이 아는 것 같았다. 그런데 영미는 용수의 마음에 아랑곳하지 않는 듯했다. 무표정한 영미를 보면서 용수는 더 상처받았다. 같은 에피소드가 반복되자 경계심이 올라왔다.
경계심을 해결하고 싶었다. 상대가 위협적인 대상이 아니라고 스스로를 세뇌해야 했다. 그게 살아남는 방법이었다.
그래서 용수는 '객관적인 사람'이라는 가짜 자아를 전시했다. 영미를 '객관적이지 않은 사람'으로 '암시'했다. 상대가 이의를 제기하는 모습을 보는 게 힘들었다. 그때마다 용수는 남들에게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할 것 같았다. 솔직히 자신의 부족함을 어렴풋하게 느끼긴 했다. 하지만 남들이 알아채는 건 또 다른 차원이었다. 그는 자존심에 흠집이 나는 게 두려웠다.
그래서 자신의 판단력을 올려치기했다. 용수는 영미를 적으로 규정했다. 적을 공격하는 방식으로 '암시'를 택했다. 마음을 다치지 않으려고 애쓴 것이다.
나르시시스트의 목적은 '자원봉사자 되기'가 아니다. 그는 자타공인 관종이다. 열 명이든 백 명이든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일단 돋보이고 싶어 한다.
그런데 용수의 선택을 잘못됐다. 사람들은 대개 스스로를 '객관적인 판단력을 지닌 사람'으로 정의하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 오히려 이는 자기 자신에 대한 지적 통찰력이 부족하다는 반증이기 때문이다. 객관적인 판단력이 있다면 저렇게 주장하지 못한다. 아는 게 많을수록 겸허해지는 법이다.
진짜 객관적인 판단력을 지닌 인물은 이렇게 말하곤 한다.
제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나는 이성적이야. 나는 객관적이야. 자기 자신을 규정하는 언어를 자주 쓰는 인물은 나르시시스트일지 모른다
나르시시스트야말로 뭘 모른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전부로 여긴다. 그래서 반대 의견을 듣거나 지적을 받으면 무작정 남 탓을 하며 도망친다.
나르시시스트의 세계에서 나르시시스트는 타인보다 특출한 사람이다. 그런 마음가짐을 지닌 사람이 지적을 받으면 온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 수밖에 없다. 주관적인 생각으로 얼기설기 엮은 이미지는 현실에서 힘이 없다. 그래서 정직한 비판에 타격을 크게 받는 것이다.
나르시시스트는 필연적으로 거센 비판을 받는다. 그가 워낙 사람을 괴롭히기 때문이다.
나르시시스트는 타인을 지배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정신적 학대와 폭언 등으로 자신을 과시하면서 상대를 공격한다. 이게 성격적 결함을 지닌 나르시시스트가 세상과 공존하는 방식이다. 그러면서도 이런 말을 덧붙이곤 한다.
너를 자라게 하려고 일부러 그러는 거야.
나르시시스트는 정말 순수하게 상대를 위해 조언 비슷한 걸 할까. 누가 적당히 잔소리하라고 화를 낸 것도 아닌데 자발적으로 구구절절하게 설명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실제로 저렇게 말하는 사람에게 크게 화를 낸 적이 있다. 그런데 그의 반응이 재밌었다. 참고로 잘못된 점을 비판하거나 실수를 꼬집어 말해주면 나르시시스트는 당장 삐지고 만다. 그가 이렇게 응수했던 것이다.
그래서 네가 지금 나한테 조언 같은 걸 해주겠다는 거야? (흥, 나 자존심 상했어)
그는 '조언'하는 걸 대인관계에서 서열을 가리는 무기로 썼던 것이다. 그랬기에 막상 입장이 바뀌니 서열이 내려간다고 느꼈고, 방어하려고 한껏 움추러들었다.
사실 나르시시스트도 아는 거다. 이게 잘못됐다는 걸. 일방적인 괴롭힘이라는 걸. 단지 그는 선의를 가장한 서열 나누기 게임을 했던 것이다. 공격받을 것을 대비해 악의를 치장하는 것도 무의식중에 자기 언행의 치부를 알기 때문이다. 장황한 부연설명을 하는 저 나르시시스트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는 언행을 고칠 마음이 없다. 남을 막 대할수록 스스로의 위치가 높아진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또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의 틀 안에서 나름대로 생존 본능을 발휘하는 거다. 그는 세상을 위와 아래로 나누고, 그 이상의 것을 생각하지 못한다. 세상을 싸움의 장으로만 인식하기에 남을 공격하지 않으면 공격당한다고 인지한다.
하지만 막상 상대가 조목조목 육하원칙대로 비판하면 나르시시스트는 꼬리를 내리고 도망가버린다. 자신을 둘러싼 환상의 세계가 깨지기 때문이다. 나르시시스트는 그것만은 정말 참을 수 없어한다. 하지만 오로지 주관적인 생각만으로 얼기설기 엮어서 만든 환상은 밀도 높은 현실의 입김에 어쩔 수 없이 와장창 깨지기 마련이다.
의존적인 나르시시스트는 자기 계발로 성장하고 노력하지 않는다.
성장은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과정이 필요하다. 그 속엔 들키고 싶지 않은 내 치부를 면밀하게 들여다보는 단계도 포함된다.
그런데 나르시시스트는 '내가 부족하다'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받아들이지를 못한다. 그러니 고통과 수치가 기다리는 성장의 길목 앞에서 도망치는 것이다.
대신 나르시시스트는 잘 웃고 호의로 다가오는 대상을 깎아내리기 시작한다.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을 타이르고 채찍질하는 내면의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매사에 남 탓을 하고 진심 어린 사과를 건네길 두려워한다. 나르시시스트의 관점에서 사과는 패배를 의미한다. 그는 사과에 도덕적인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 나르시시스트가 원래 그렇다.
나르시시스트의 태도를 보라. 얼마나 기고만장하며 오만한가. 그는 타인을 무시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긴다.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처럼 여긴다. 그런 나르시시스트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다니 의아할 수 있다.
나르시시스트가 과시하듯이 오만하게 행동하는 것은 자기 방어책이다. 나르시시스트는 타인에게 쉽게 상처받는다. 그래서 사람을 두려워한다. 그런데 두려움을 표출하면 약해 보이기에 나르시시스트는 생존 본능을 발휘해서 오히려 상대를 더 함부로 대한다. 그렇게 사는 게 살아남는 길이라고 믿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나르시시스트는 의존적이다. 그는 독립적으로 서지 못하고, 남을 의지해서 자아를 구축한다.
구박하고 모독하는 것은 그의 특기다. 그래야 본인이 생존한다고 믿는다. 바로 이런 점이 의존적이라는 뜻이다.
영란은 지인인 재희와 통화하다가 핀잔을 들었다.
너는 왜 아르바이트를 안 해? 내가 말했잖아.
영란은 당황했다. 그동안 아르바이트를 할지 말지를 얘기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니라고 말하지는 안 했다. 오히려 확신에 찬 재희의 말투에 자기 자신을 의심했다.
설마 내가 말했는데 상대만 기억하는 건가?
그런데 얘기한 적 없었다. 정말이다. 이 사실에 영란은 더욱 곤혹스러웠다. 이야기한 적 없다는 걸 증명할 물증이 없다. 전화 녹취라도 있다면 들어보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나르시시스트와 대화를 녹음하는 것도 공격 무기를 쌓는 방법이다. 나르시시스트는 한 말도 안 했다고 하고, 안 한 말도 했다고 한다. 어설픈 묘기를 부리듯이 이 말을 저말로 바꾼다. 두루뭉술하고 교묘한 거짓말을 반복한다. 그러니까 물증이 필요하다. 물론 녹취를 들려줘도 나르시시스트는 꾸역꾸역 우길 테지만 말이다.
그런데 말이다. 엄밀히 말하면 재희가 그 말을 했다는 물증도 없다. 다만 미란의 영란과 재희의 차이가 있다면 '태도'였다. 재희는 짜증을 내면서 ‘우기기 화법'을 시전 했다. 구체적으로 언제 어떤 상황에서 말했다고 하지도 않았다. 다짜고짜 ‘내가 말했잖아’라고 급발진을 하면서 흥분했다. 영란은 낮에 길을 가다가 찬물을 맞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재희의 쏘아붙이는 말투에 영란은 살짝 놀랐다. 상대를 구박하는 말투였다. 내가 말했는데 기억을 하긴 하냐 혹은 내가 말한 대로 왜 이행하지 않느냐는 뉘앙스였다. 네가 뭔데 그래? 영란은 재희가 낯설게만 느껴졌다.
이것은 나르시시스트의 특징이다. 나르시시스트는 고압적이고 무례하다. 그는 상대가 내 말대로 행동하는 게 당연하다는 걸 전제로 행동한다. 감정적으로 말하는 것도 의도적인 연출에 가깝다.
사실 재희는 영란이 아르바이트를 할지 말지 별로 관심이 없다. 다만 상대를 구석에 몰아넣을 계기로는 아르바이트가 적절했다. 나르시시스트는 힘을 과시할 순간들을 찾아다닌다. 그 과시라는 건 별 거 아니다. 짜증 내는 걸 상대가 받아주는 상황을 만들고 싶다는 뜻이다.
지금 재희는 아르바이트조차 하지 않으니 너를 게으르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남의 일을 제 일처럼 생각해서 말한 입장으로 살짝 올려치기를 했다.
재희는 영란의 부모도 아니다. 그는 젊었다. 그렇다고 딱히 친구도 아니다. 이도 저도 아닌 애매모호한 선에 걸쳐진 지인에 불과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나르시시스트와 지낸다면 심리적 거리감을 최대한 멀리 둬야 한다. 멀어지는 게 잘 지내는 거다. 물론 손절하면 가장 좋다.
나르시시스트와 허물없이 지내면 결국 저런 상황으로 이어진다. 그는 기본적으로 상대를 통제하려고 안달복달한다. 어떤 나르시시스트는 영란에게 서운함을 표출했다.
너는 상대에게 주도권을 안 줘.
영란을 황당했다. 평소 그 나르시시스트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불만을 토로했다. 듣는 이는 피로감이 쌓일 지경이었다. 물론 영란에게도 비슷한 태도를 취했다. 그런 사람과 친하게 지낼 마땅한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주도권을 안 준다고 서운해하다니. 말도 안 되는 태도라고 여겼다.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의 통제에 길들여지지 않는 대상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그들을 아예 적으로 돌리거나 관계를 단절한다. 그리고 그의 무례함을 짚으면 갑자기 나르시시스트는 돌변한다. 착한 사람 코스프레를 하는 것이다. 너를 위해서 내가 '의도적으로' '못된 역할'을 자처했다는 게 그가 나름대로 자신을 방어하는 논리다.
나르시시스트 수법을 정리해 보자.
1. 상대의 부족함을 잘 안다고 말하면서 일거수일투족을 훈수두기 시작한다. 아주 작고 사소한 지점에서 시작될 때가 많다.
2. 명령조의 말투가 늘어가고, 별 거 아닌 순간에 과도하게 신경질을 낸다. 그리고 서서히 이런 태도를 당연하게 생각한다. 이걸 상대가 불쾌해하는 게 잘못된 거라고 멋대로 주장한다.
3. 자신이 유리한 대로 말의 순서나 내용 또는 뉘앙스 등을 교묘하게 바꾼다. 이게 기억의 착각이거나 나르시시스트만의 망상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너그럽게 봐주기에는 상습적이다. (그래서 때로는 녹취가 필수다)
4. 대의명분을 내세운다. 걱정해서 하는 말이고, 원래 냉소적으로 말하는 스타일이다 어쩌고 저쩌고. 본인이 막 대하는 걸 정당화하려고 속 보이는 부연설명을 한다.
5. 매사에 상대를 통제하려고 시도한다. 자꾸 강박적으로 가이드라인 같은 걸 제시한다.
시간이 흐르면 저렇게 나르시시스트는 본색을 드러낸다.
처음에 나르시시스트는 얕은 사회성을 발휘해 친절과 매너로 환심을 산다. 하지만 한시적인 행동에 불과하다. 본능을 이기지 못한 그는 결국 핑계를 만들어 기어코 상대를 괴롭힌다.
모든 인간은 인간을 판단한다.
그 영역은 도덕적 잣대가 분명한 윤리의 영역일 수도 있고, 옳고 그름을 따질 필요 없는 취향의 영역일 수도 있다.
판단하는 행위 자체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인간은 살아있는 만물 중에서 고차원적으로 사고하는 유일한 존재다. 만물을 창조한 신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했다. 자유롭게 평가하고 분별하는 것은 인간 고유의 권리이자 특성이다.
문제는 판단력에 문제가 있는 경우다.
나르시시스트는 자기 자신을 혐오한다. 따라서 타인도 혐오한다.
누군가의 며느리일 때 그 사람은 너무 공손하고 단아하다. 하지만 나이 차이가 나는 지인이나 남편에게만 돌변한다. 부드러운 성격을 지닌 사람들을 비난하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것이다.
때로 정서가 지적인 영역에 영향을 미친다. 나르시시스트는 자존감이 낮고, 수치심을 강하게 느낀다. 그래서 수시로 기분이 나빠진다. 동시에 그는 힘의 논리에 약하다. 나르시시스트는 쉽게 숙이는 자신에게 굴욕감을 느끼면서도 정작 앞에서 아무 말도 못 한다. 대신 웃어주는 사람들에게만 군림하려고 생떼를 쓴다.
나르시시스트 특유의 제멋대로 판단력이다. 나르시시스트는 단순하고 천편일륜적인 사고방식에 젖어 있다.
대표적인 예는 이렇다.
상대 주장은 다 틀리고, 내 주장은 다 맞아.
편협하고 비상식적인 생각의 틀 안에서 나르시시스트는 살아간다. 그러니 저런 말이 나오는 거다.
너는 왜 아르바이트를 안 해?
당시 영란은 모 단체에서 작은 후원금을 받으며 일하고 있었다. 목돈을 쓸 일이 없었다.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며 하루하루 잘 살고 있었다. 현재 일은 딱 6개월만 일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한 가지 일에 집중하는 편이 영란에게 나았다.
그리고 후원금을 받는 또 다른 한 명은 재희였다. 재희는 영란과 같은 일을 했었다. 그는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고, 후원금으로만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예전에 그는 자신이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으면서 살아가는 현실을 이렇게 해석했다.
나랑 같은 나이대의 사람들은 직장에서 차장이야. 그 사람들이 나를 볼 때는 성인이 일도 안 하고 후원금만 받으며 생활하는 게 이상해 보이겠지
그는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지만 일을 하느라 일부러 안 하는 거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 일을 하려면 어쩔 수 없이 아르바이트를 못 하는 거라고 말이다.
같은 상황이다. 그런데 아르바이트를 안 하는 자신은 아무 이상이 없고, 오히려 타인이 나를 이해 못 해줄 거라고 두둔했다. 그러면서 영란에게는 왜 그랬을까.
그리고 영란은 재희의 말습관을 듣기가 영 껄끄러웠다.
내가 말했잖아.
무얼 그렇게 말했다는 것인가. 말끝마다 덧붙이는 저 말이 영 별로다. 들어보면 그가 말했다는 것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지금 생각하면 재희는 깊게 알고 지내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누군가는 재희의 성격에 서운함을 표현했다.
꼭 그렇게까지 공격적으로….
그는 상당히 선제적으로 대응할 때가 종종 있었던 것이다.
재희는 사람을 도구로 봤다. 자신을 인정하는 사물로서 상대가 알아서 비위도 맞춰주고 훈계도 들어주길 기대했다. 화를 내도 실실 웃어주길 바랐다. 아무 말도 못 하는 걸 보고 싶어 했다. 비현실적인 기대였다. 나르시시스트의 자아도취적인 망상이었다. 재희는 친밀하게 다가오는 사람들을 소위 ‘아랫사람’ 대접했다. 그러면서 스스로를 ‘윗사람’으로 치켜세웠다. 우스운 태도였다.
물론 재희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나이가 많았다. 하지만 그런 이유 하나만으로 모두가 재희처럼 교만하게 행동하지 않는다.
나르시시스트는 자기 자신의 결점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한다.
나르시시스트는 본인의 성격 바깥에서 살아본 적이 없다. 지구가 둥근지 확인하려면 꼭 우주선을 타고 바깥으로 나가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나갈 줄도 모르고 우주선의 존재조차 인지 못 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나르시시스트는 우주가 평평하다고 아직까지도 굳게 믿는 것이다. 무지한 사람은 자신이 뭔가 모를 수 있다는 걸 인정하질 못한다. 그게 나르시시스트의 맹점이다.
나르시시스트는 희생양이 필요하다. 잘 웃고, 경계심의 문턱이 낮은 낮다면 그의 타깃이 된다. 사람에게 마음을 문을 잘 열고, 호의를 쉽게 거두지 않는 사람 말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에게 의존해서 쌓은 자존감은 빠르게 휘발된다. 자존감은 정체성과 연결된다. 나만의 철학과 소신으로 다져진 정체성이 없으면 다른 사람들의 말 한마디에 크게 흔들리기 쉽다.
특히 나르시시스트는 자기 자신을 잘 모른다. 살아남으려면 다른 사람을 딛고 올라서야 한다고만 생각하는 부류다. 그래서 그는 부정적인 말 한마디에 깊게 상처받는다. 보복감을 품는다. 무시당했다고 섣부르게 판단한다. 그래서 수시로 상대를 괴롭히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는 기초가 없는 건물이 작은 바람에도 무너지는 현상과 같다. 타인의 비판 한 조각에 자존감이 와장창 내려앉는 것이다.
누구나 부정적인 비평을 받으면 힘들어한다. 그 비판이 맞다고 생각할수록 통증은 배가 된다.
사람들은 기질과 성품, 역량에 따라 다양한 반응을 보인다. 제삼자를 탓한다. 비평자의 자격에 의문을 제기한다. 비평받는 것 자체를 거부한다. 안 좋은 내용의 비판으로 똑같이 되돌려준다. 자기반성을 한다.
그런데 나르시시스트의 반응은 한결같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되려 비판자를 자신과 같은 입장으로 만들려고 모함한다. 그 수법도 통하지 않으면 그는 도망간다. 끝까지 감추려 한 자신의 실체를 기어이 들켰다고 생각해 충격을 받는 것이다. 이는 나르시시스트가 본인이 별로라는 감각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나르시시스트는 미리 교만으로 자신을 치장한다. 공격에 대비하고, 자신을 지키기 위한 장치인 셈이다. 교만은 나르시시스트를 보호하는 등껍질과 같다. 희생양을 괴롭히는 것도 마찬가지다. 타인에게 부정적인 에너지를 전가해 숨통을 트는 것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을 경멸하지만 동시에 사랑해 보려고 발악한다. 하지만 결국 자기혐오라는 자리로 되돌아온다. 거만함은 나르시시스트가 진짜 마음을 감추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부산물이다.
나르시시스트가 가장 좋아하는 놀이는 비난하기 게임이다. 부자연스럽고 어색한 사이에서는 비판받을 확률이 줄어들다. 무엇보다 나르시시스트가 가장 재미있어하는 놀이를 하기 적합하다. 그 놀이의 이름은 ‘비난하기 게임’이다.
비판이 아니라 비난이다. 나르시시스트는 건설적인 비판을 하지 못한다. 맹목적으로 비난할 뿐이다.
비판과 비난의 차별점은 근거의 타당성이다. 그는 건설적인 이유로 비평하지 않는다.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고, 약자가 아님을 알리려고 상대를 무조건적으로 폄하한다. 그러니까 당연히 비난의 이유가 조악하거나 궤변인 경우가 많다. 판단의 기준도 제멋대로다. 같은 행동을 해도 남은 안 되고, 본인은 다 이유가 있기에 괜찮다고 박박 우겨댄다.
그래서 나르시시스트는 잘 웃어주는 사람을 좋아한다. 앞뒤가 안 맞는 그의 궤변에 속수무책으로 스며들 거라 믿기 때문이다. 이견을 내지 않고, 옳고 그름을 구분하기보다 무조건적으로 호응해 줄 거라고 예상하기 때문이다.
웃는 건 일반적으로 호감의 표시다. 경계심이 낮다는 의미다. 남을 잘 믿고, 쉽게 배신하지 않는 유형에게 그는 끌린다. 그래야 나르시시스트의 소왕국에 저항 없이 들어올 거라 여긴다. 우리가 부드럽게 대해주는 것 하나만으로 이렇게 나르시시스트는 확대 해석을 한다.
그러니까 기회를 봐서 나르시시스트에게 충격을 세게 줘라. 그의 섣부른 판단이 틀렸다고 말해줘야 한다.
누군가는 부자연스러운 관계에 건강한 의문을 품어야 한다. 그래서 기형적인 관계 구조에 균열을 가해야 한다. 나르시시스트가 가장 두려워하는 그 말을 해주자. 너는 정말 별로라고 말이다.
나르시시스트의 거만함을 깨뜨리려면 논쟁을 이끌어 내야 한다. 그가 숨을수록 그를 찾아내라.
얼마 전에 A는 B에게 크게 화를 냈다.
A가 화를 낸 것은 B의 막말 때문이었다.
결국 A는 B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압적인 제스처를 자주 취하는 B가 그날만큼은 그런 태도를 취하는 데 실패했다.
B는 A가 망상을 한다고 주장했다. 어처구니없지만 정말 그렇게 말했다. B는 다른 사람도 아닌 A가 정색하고 사과를 요구한 현실을 부정했다.
한참 다투다가 B는 말했던 것이다.
그래. 내가 일부러 그런 것 아니라는 걸 서로 아니까.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아예 그런 적이 없다며? 대화의 맥락과 반대되는 내용이었다. 일부러 상대의 반응을 떠보기 위함이었을까? 아니면 섣부른 자기 위로였을까?
A는 궁금했다. 정말 B가 지금도 그렇게 생각할까.
한참 시간이 흐르고 B와 다시 통화하게 됐다.
A: 생각이 안 나면 생각이 안 나는 거지. 기억의 혼재라고 했잖아. 다른 사람한테 들은 얘기를 B가 말한 걸로 착각했다며? 나를 이상한 사람처럼 만들려고 했잖아.
(다 말해놓고서 이제 와서) 그렇게 말한 적 없다고 하면 (어이가 없지)... B가 1인 2역을 하는 것도 아니고.
B: 그래서 내가 그래서 그랬나 보다 생각한 거야. 사실 나는 생각이 안 나고-
그래서 그랬나 보다는 건 A의 어느 말과 호응하는지 애매하다. 생각이 안 났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A: 상식적으로 내가 얘기한 게 기억이 안 나면 ‘내가? 내가 그랬다고?’ 하면서 시간차를 두고 생각한 다음에 말하잖아.
그런데 B는 내 말이 끝나자마자 ‘그런 일이 절대 없다, 그런 말을 난 안 해’ 이렇게 말했잖아. 내가 당황스러워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나는 분명히 들어서 생각하다가 전화한 건데.
B: 그래. 그래서 전화를 처음 받았을 때 사실 되게 당황스러웠어.
당황스러워서 막말한 적 없다고 거짓말로 둘러댔다는 것인가. 당시 A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고, 단지 당황해서 속마음과 반대로 표현했다는 것인가. B의 응답은 상대가 궁금해하는 요지와 묘하게 틀어져 있었다. 당황스러워서 부정한 거냐고 물으면 B는 그건 또 아니라고 청개구리처럼 답변할 것이다.
그리고 방금 A가 당황스럽다고 말했다. 사실 B는 그 표현을 잽싸게 낚아챘다. 상대방이 들으란 듯이 그대로 읊었던 것이다.
A의 언어를 ‘손민수’하는 것은 B의 방어기제다. 그 말이 기분 나쁘다고 빈정거리는 제스처다. 감정을 솔직하게 말하는 걸 방패 삼아 공격했던 것이다. 왜 내 말을 따라 하냐고 물으면 그는 그건 또 아니라고 손사래를 칠 것이다.
A는 B가 생각 나 안부전화를 한 적이 있었다. 모임을 하던 중에 쉬는 시간이 생겼던 것이다. 통화를 하다가 모임에 다시 들어가야 한다고 설명했다. 내가 먼저 전화를 걸겠다고 덧붙였다. B도 알았다고 대답했다.
A는 집에 돌아가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딸각 소리와 함께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B가 아닌 B의 배우자가 전화를 받았던 것이다.
그는 B가 설거지 중이라 대신 받았다고 둘러댔지만 정황상 어색했다. 그동안 누군가가 전화를 대신 받는 일은 없었다, 단 한 번도. 하필 A가 전화를 중간에 끊고서 다시 연락한 그날만 그랬다. 이후에도 다른 사람이 전화받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상황상 통화를 오래 하기 힘들었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B는 상처를 받았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아쉬운 입장으로 비치는 걸 두려워했다. 그래서 약속을 다시 잡거나 먼저 전화를 끊거나 하는 일에 급발진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B는 솔직하게 말하면 거절당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래도 기분 나쁜 걸 참지 못하고 나름대로 골탕을 먹이려 수를 쓴 것이다. 어쩌면 간접적인 항변이었을 것이다. 내 마음을 알아달라고 말이다.
B는 불만이 있으면 상대를 은밀하게 괴롭혔다.
A가 있는 자리에서 제삼자에게 A의 험담을 한다. A의 말에 하하하 소리를 내면서 웃는다. 정말 즐겁다는 듯이 과장스러운 제스처를 취하는 게 특징이다. 아니면 A의 말이나 행동을 이죽거리며 따라 한다. 우스꽝스러운 광대 노릇을 자처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B는 그 모든 행위의 대가를 받는 중이다.
그동안 A는 대부분의 상황을 넘겼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그러지 않았다. 늘 웃던 상대가 조목조목 설명하며 사과를 요구하자 B는 어떻게든 방어하려 안달복달했다.
B: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 이게 무슨 말이지라고 생각했어.
B는 ‘이해’라는 단어를 엉겁결에 꺼냈다가 꾹 밀어 삼켰다. 그리고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어떤 말로 대처할지 망설이다가 ‘무슨 말인지 생각했다’고 변경했다. 의식적으로 단어를 바꾼 것이다. 그는 ‘이해하지 못했다’라는 말을 쓰지 않으려고 신경 썼다.
말에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해력은 지적 능력과 연결된다. 문자 그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누군가가 말했다고 치자. 그건 스스로의 지적 능력을 낮추는 모양새가 된다. 의도는 그게 아닐지라도 말이다. B는 남이 자신을 '이해 못 하는 사람'으로 보는 게 싫었던 것이다.
그런데 한때 B는 ‘이해’나 ‘수준’이라는 말을 즐겨 썼다.
너는 이해력이..
생각하는 수준이 ‘그래서’ 그래,
B는 손을 안 대고 코를 풀었다. 말줄임표와 ‘그래서’라는 말의 뜻은 맥락상 무엇을 의미하는지 유추할 수 있다. 대놓고 욕한 건 아니다. 그런데 대놓고 욕한 것과 다를 바가 없다. B는 이상한 간접 화법으로 상대를 묘하게 무시했다. 물론 도덕적으로 용납하기 힘든 행동이다. 그도 그 점을 몰라서 그러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간접적으로' 본심을 드러냈던 것이다.
B: 사실 사람한테 대놓고 짜증 난다고 말하는 법은 없었기 때문에 더 그렇게 생각했어.
그리고 짜증 나는 말을 안 한다고 하기에는 평소 B의 언어 습관이 잘못 길들여져 있었다.
너는 너무 바가지(싸가지)가 없다
그 선배한테 네가 알아서 기어
하하 네가 수준이…
B는 상대방이 자존심 상할 말을 장난스럽게 내뱉곤 했다. 누가 들어도 기분 나쁜 말이니까 웃음이나 가벼운 태도를 곁들어 무의식 중에 방어막을 쳤다. 나쁜 말은 하고 싶은데 공격당하는 건 싫으니까 말이다.
그동안 B는 이런 일에 한 번도 사과한 적이 없다. 뉘우치는 기미도 없었다. 그걸 당연하게 생각했다는 반증이다.
평소 그는 도덕성을 강조했지만 그의 행실은 따라주지 못했다. 그런데 지적을 받자 정신이 바짝 들었는지 나는 바르고 착한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자신의 캐릭터를 새롭게 짜서 일단 사태를 수습하려고 시도한 것이다.
심지어 지금 B는 A에게 사과하는 상황이다. 도덕적이지 못한 언행을 했다는 이유로 말이다. 그의 자부심에 흠집이 난 셈이다.
A: 그게 무슨 말? 말하기는 법이 없다니?
A는 무슨 뜻인지 알면서도 더 상세하게 설명하라고 요구했다.
B: 그러니까 사람한테 대놓고 너 되게 나를 짜증 나게 한다고 말을 안 해.
부연 설명을 하라는 요구에 그는 방금 한 말을 재탕했다.
B: 그런 마음을 생각하거나 나 혼자 있을 때만 얘기하지. 그것을 직접 말하려고 안 해.
A: 모두가 다 그렇게 생각해. 누구나 그런 말을 안 하려고 하지.
A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A가 수긍해주지 않자 B는 급격하게 흔들렸다. 그는 조급함을 감추지 못한 채 덧붙였다.
B: 아니- 그런데 실제... 왜냐면 본인의 역할 때문에 그런 부분도 있는 거야.
B는 동아리에서 모임을 이끌고, 사람을 모으는 역할을 했다. 그래서 부드러운 태도도 중요했다. 물론 고객을 대하는 서비스직 직원의 친절과는 결이 다르다. 그래도 퉁명스러운 말투나 거만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지금의 B의 태도와 딱 대척점에 있었던 것이다.
A: 그런데 자꾸만 상황적 당위성으로 얘기하지 마.
B: 아니- 그러니까 그날 네가 전화를 했을 때 너는 계속 생각을 하다가 전화한 거고.
A는 상대의 말에 자꾸 이질감이 생겼다. 그의 말이 데자뷔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A: B는 내 말이 끝나자마자 ‘그런 일이 절대 없다, 그런 말을 난 안 해’ 이렇게 말했잖아. 내가 당황스러워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나는 분명히 들어서 생각하다가 전화한 건데.
B가 하는 말이 자꾸만 A가 이미 했던 말과 엇비슷하거나 겹친다.
B: 그리고 나는 전혀 생각을 못하던 부분에 대해서 들은 거잖아.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내가 그런 말을 했다고? 그 순간에 나는 그랬어.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B가 생각지 못한 말을 들은 건 아니다. 그의 첫 반응은 이랬다.
A: 기분 나쁜 게 있어서 전화했어.
B: 응. 그랬을 것 같아. 계속 반복되는 부분이 있었잖아. 나도 욱했나 봐. 욱해서 그런 이야기를 했구나 싶었어. 네가 소리 지르니까 나도 소리 질렀어.
너 기분 나쁜 거 알았어. 그런데 내가 소리 지른 건 너 때문이야. 내 책임은 없어. B는 억지로 웃으면서 A를 탓했다
그는 이런 상황을 예상했다고 암시하면서 은근하게 상대를 탓했다.
네가 소리 질러서 나도 소리 질렀다고. 네가 소리 질러서 내가 기분이 나빴다고. 그런 너의 태도에 내가 상처받았다고.
B: 어쨌든 그때 차로 내려가고 있고, 나도 집안 문제 때문에 복잡했고. 그런데 일단 전화가 왔으니까 받아야겠다고 생각해서 받았는데. 갑자기 너는 내가 전혀 생각하지 못한 이야기를 하니까 무슨 이야기지 하는 마음이었지.
A: 그런데 무슨 이야기지 한 게 아니라 B는 내가 기억을 잘못했다고 말했잖아.
B는 확신 있게 A가 망상을 했다고 거듭 주장했었다. 그의 말을 복기하자.
A: 짜증 나게 하네. 그랬어.
B: 내가? 그런 말 한 적 없어.
A: 그랬어.
B: 아 그럼 네가 혼동이 있는 것 같다.
심지어 B는 이렇게 몰아갔다.
네가 그렇다고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것 아니야?
내가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어. (억울해하며) 기억 못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사람들한테 나는 그런 말을 안 한다고.
다른 사람과의 통화를 나랑 통화한 걸로 오해한 것 아니야? (이 말의 맥락에서 오해보다 착각이라는 단어가 적합하다)
내가 짜증 나게 하네라고 너한테 말할 상황도 아니고.
나는 그런 말을 안 해. 논쟁에서 A라는 전제를 인정해야 A에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B는 그 전제 자체를 부정해서 대화 자체를 거부했다.
단지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어리둥절했다는 뉘앙스는 아니었다. 그는 망상이라는 단어만 안 쓴 거지 망상이라는 뜻을 전달했다.
A: 단정적으로 이야기를 하니까 그 지점이 불쾌했다는 거지.
B: 그래, 맞아.
A: 그리고 내가 조금이라도 기억을 못 하면 너 그런 것도 기억이 안 난다며 이런 식으로 말하면서. B는 내가 이야기한 대부분의 것들을 하나도 기억 못 했잖아. 그러면서 나를 이상한 사람 취급하니까.
B: 그래. 그랬겠지.
A: 속상해서 전화한 건데. B는 녹취를 해야겠다고 얘기한다든가. B가 억울한 피해자처럼 이야기를 하니까 기분이 많이 나쁘고.
B는 A의 말끝마다 추임새를 넣었다. 대화는 흐름이 중요하다. 한 문장 한 문장이 끝날 때마다 말을 자르듯이 맞장구를 쳤다.
A의 마음이 풀렸다고 판단해서였을까. 아니면 대화를 어서 마치고 싶어서였을까. 끼어들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서였을까.
평소 B는 최대한 부정적으로만 반응했다. 그는 모든 사람을 다 부정적으로 평가하면서 자신만은 낙관적으로 해석했다. 나는 감정을 티 안 내는 걸 잘한다든가. 이런 말들 말이다. 사실 B는 감정이나 의도가 투명하게 드러나는 유형이다.
어쨌든 B는 A의 말을 열심히 긍정하고 있었다. 낯설게도.
A: 내가 생각을 해 볼게 이런 식으로 라도 얘기했으면 그렇게까지 화나지 않았을 거야.
B: 어.
A: 그런데 B가 녹취를 해야겠다고 말하는 것도 불쾌하고. 네가 기억을 잘못했겠지, 야 너 이런 것도 기억이 안 난다며 이런 식으로 얘기를 하는 태도 자체가 B에 대한 신뢰를 굉장히 떨어뜨리고-
B: 어, 맞아.
A는 직접적으로 ‘불쾌하다’고 언급했다. B에게 한 번도 크게 화낸 적이 없었다. 그래서 B는 더욱 우왕좌왕했을 것이다.
A: B의 인성을 의심하게 하는 이야기였어.
B: 그래. 그랬겠지.
A: 그건 B가 자꾸만 주변 상황을 이야기하시는데 상황 하고는... 그런 상황이 아니더라도 B가 그렇게 했을 것 같아. 자꾸만 안 좋은 일이 있어서 내 말을 부정했다고 하지만. 사실 별로 잘 들리지 않아.
B: 그렇지. 너는 내 입장이 아니니까.
B는 얄밉게 대꾸했다. A는 남의 일이라 내 관심 밖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B는 다급한 상황이 없더라도 A의 착각이라고 몰아갔을 것이다. B는 기억이 안 났다. 그래서 인정을 못했다. 그리고 기억이 나더라도 그는 잘못을 부정했을 것이다.
초반에 A는 내 기억을 아직도 인정하지 못하냐고 물었다. 그제야 B가 이렇게 대답했다.
B: 어쨌든 아침에 누가 아파서 병원에 가는 중이었어. 그래서 경황도 없고. 그런데 무슨 얘기지 싶은 생각도 하고.
A: 그런 외부적인 상황을 뺀다면 인정을 했을까?
B: 그러니까 나는 생각이 안 나니까 사실 그래서 인정을 못한 건데.
B는 스스로 함정을 판 꼴이 됐다. 병원에 가던 상황이 문제가 아니라 B에게 원임을 있음을 인정한다고 말해버린 셈이다.
A: 그건(응급실 가는 상황은) 핑계 같아. 그냥 B의 본심이지, 그게.
B는 ‘핑계’라는 말에 꽂힌 듯했다.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A가 B의 기대에 부응해주지 않고 기존의 입장을 고수했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나라도 그랬을 것 같다. 그래. 얼마나 힘들었니. 이런 식의 위로와 수긍 혹은 공감을 그는 원했다. 그런데 A가 관대하게 대하기에는 B가 너무 멀리 왔다.
B:........ 그런가 보지 뭐. 어쨌든 그런 부분에 대해서 그러니까 나도 그날 전화통화를 하고 나서 집에 와서 생각하면서 아 내가 그 상황에서 조금 더 여유를 갖고 내가 그랬었나 하고 이야기할 수도 있었겠다.
딱히 여유가 없어서 그가 부정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의 무딘 양심과 성격적인 결함 탓이 더 크다.
B: 그리고 좀 더 생각해 보면 어떻게 보면 그랬을 수도 있었을 텐데. 내가 이러면 이런 말을 해서 이런 상황이 됐을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을 뒤늦게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
B의 대화법에 본질적으로 문제가 있다. 그는 대명사를 지나치게 많이 쓴다.
그랬을 수 있다, 이런 말을 해서, 이런 상황 등 흐릿한 언어를 쓴다. 요지가 무엇인지 흐리멍덩해진다. 맥락상 유추할 수는 있다. 하지만 해석하기 애매한 것들도 많다. 만약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려고 물어보면 또 그는 이야기를 다른 데로 옮겨버린다.
사실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없을 수도 있다. 그리고 지금 B의 예상대로 상황이 흘러가지 않고 있다. 그래서 갈팡질팡하는 심리를 추스르라 대충 둘러댔을지도 모른다.
B도 어떻게 해야 이 상황이 마무리될지 몰라 횡설수설하는 중일 수도 있다. 그동안 A가 한 번도 이렇게까지 정색한 적은 없었다. 정말 그는 진지했다. 웃어주지 않았다.
그동안 A를 떠올리면 B의 망상론에 동조하며 스무스하게 납득할 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니었다. 이젠 오해나 망상이라고 우기기도 어렵게 됐다.
그렇다고 잘못을 인정하기도 억울하다. A가 힘들다고 말하는 걸 듣는 게 B도 버거웠다. 그래도 이 정도면 조금만 짜증 낸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상대가 본인의 진짜 마음을 모를 거라고 낙관했다.
지금 거두절미하고 사과하지 않으면 수습하기 힘들게 생겼다. 계속 버티는 중인데 언제까지 버틸지 모르겠다, B도.
B: 그런데 정확하게 생각이 난다면 더 좋았겠지만 어쨌든 그렇지 못했고.
B는 특정 상황에 대한 기억이 없다.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기억 자체가 소멸됐다.
B: 네가 나한테 이야기했을 때 내 감정에 충실하게 무슨 말이지 이러면서 너에게 충분히 ‘너를 공격하는 것처럼’ 아니면 ‘너에게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게’ 말을 내가 했지. 응. 미안해.
이 말도 틀렸다.
B는 A를 공격한 게 맞다. 다만 간접적으로 공격했을 뿐이다. A를 걱정하는 시늉을 하면서 단단히 착각했다는 뉘앙스를 흘리고, 기억을 못 할까 봐 걱정되는 마음에 녹취를 하자고 제안했다. 오히려 그는 상대에게 공격받았다고 인식했다. 그래서 최선의 방어책으로 A를 공격했다. 본능적으로 자기 보호를 한쪽에 가까웠다.
너에게 문제가 있는 것처럼 들릴 수 있게 말한 게 아니라 진짜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다. 망상이라면서? 혼란스러워서 다른 사람이 한 말을 착각했다면서? 이게 A가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는 건가. B의 말을 복기하자.
나는 그렇게 이야기한 적 없어.
나는 그런 말을 쓰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한테 들은 얘기를 내가 말했다고 착각하는 것 아니야?
네 기억이 혼재됐나 봐.
네가 혼동이 있나 보다.
그런데 네 기억이 섞여 있어.
나는 기억이 안 나는데 진짜 일어났던 일로 인정하고, 사과할 수는 없어.
B는 A가 문제가 있다고 것처럼 ‘들리게’ 말하지 않았다. 실제로 A에게 문제가 있다고 강조했다. 물론 그 기억이 착각이라는 근거는 아무것도 없었다. 기억이 안 나서 없던 일이라고 말한 게 다였다.
A: B가 당연히 내 기억을 인정 안 할 거라고 생각했어. B랑 한 두 번 대화한 것도 아니고. B랑 얘기를 해 보니까 비판을 굉장히 많이 하는데 그만큼 B는 자신에 대한 비판은 받아들이지 못해. 도망친다고, B는.
B: 원래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의 특징이지. 뭐.
B는 상대의 말을 수긍하는 척했다. 그리고 자존감 낮은 사람들 사이로 쏙 숨어버렸다. 주체를 B가 아닌 자존감 낮은 사람들로 바꿔치기한 것이다.
자존감이 낮다고 무조건 비판으로부터 도망치지는 않는다. 내 탓이 아닌 것도 내 탓이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다.
B는 스스로 자존감이 낮다고 말했다. 사과해야 하는 상황에서 굳이 자존감이 낮다고 고백한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B는 남이 나를 센 사람이라고 봐주길 바랐다. 그래서 누구를 혼냈다고 무용담을 늘어놓기도 했다. 그는 깐깐한 이미지를 구축하려고 노력해 왔다. 그런데 자존감이 낮다는 것은 센 것과 잘 맞지는 않는다. 그가 추구한 이미지와 다르다.
이는 나르시시스트의 특징이다. 나르시시스트는 비판받는 걸 무서워한다. 그래서 빼도 박도 못하고 잘못했다고 말해야 한다면 차라리 동정을 구하기도 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비판의 그물망에서 일단 빠져나가려고 하는 것이다. 유리 같은 자존심을 가진 그가 얼마나 괴로우면 그렇게까지 하겠는가.
A: 그러니까 B는 비판적이면서. 막상 비판을 당하면 피하려고 하니까 그런 것도 괘씸하지.
B: 어. 그래.
A: B가 평소에 날 대할 때 항상 뭔가를 고쳐야 된다는 식으로 말하는데-
B: 블라 블라
A: 별로 객관적이지도 않아.
B: 응.
A: B는 부정적인 감정을 남들보다 많이 느끼니까 무엇이든 문제라는 프레임으로만 보는 거지. 그러니까 내가 잘하면 잘해서 문제라고 하고, 내가 못하면 또 못하니까 문제라고 하고 이런 식이야. 그런 것도 불편해지고 있었던 건 맞아.
내가 못하면 또 못하니까 문제라고 하잖아.
나르시시스트의 판단은 공정하지 않다
이 말에 B는 날카로운 무언가에 찔린 것처럼 흠칫 놀랐다. B의 생각이나 판단력에 의구심을 제기하는 말이었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B는 한결같이 말해왔다. 나는 객관적인 사람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지금 A는 B가 무엇이든 주관적으로 판단한다고 정면으로 반박했다.
너는 객관적인 판단력이 없어. 꼬투리 잡고, 심술부리는 거잖아.
A는 솔직한 의중을 그대로 전달했다. 그런데 이 문장이 B의 발작 버튼을 누른 듯했다.
A: 이번엔 내가 비판을 한 거지. 그런데 B는 오히려 신경질을 내면서 녹취를 해야겠다 이런 식으로 말했잖아. 마치 녹취를 안 해서 본인이 억울한 일을 당한 것처럼 이야기를 하니까-
B는 비판받는 입장으로 바뀌자 불에 덴 듯이 호들갑을 떨었다. 오죽하면 상대의 망상이고, 다른 사람이 했던 말이라고 부정했겠나. B는 정당한 비판을 받아도 그렇게 어려워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함부로 말하고 다녔다.
A는 B가 사과를 안 하려고 버티는 모습이 낯설었다. 어이가 없었다. 저런 정신으로 그동안 다른 사람들을 폄하했다는 게 우스웠다.
B: 녹취라고-
A: 녹취라고 했지.
B: 아니, 녹음을- 서로 정확하게 이야기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니까. 그리고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고. 그래서-
또 그는 기억하지 못하는 주체를 ‘B’가 아닌 ‘A와 B’로 바꿔치기했다. B가 기억을 못 해서 일이 커졌다. 그리고 녹취하자는 말은 결코 중립적인 의미로 말한 게 아니다.
A: 그런 뉘앙스 아니었거든?
A는 B의 주장을 탁구공 보내듯이 가볍게 받아쳤다.
B는 실제로 어떻게 말했을까. 당시의 상황을 복기하자.
B: 내가 너한테 초등학생이라고 말했다고 기억한다고?
A: 응. 정말 기억 안 나? 이거 너무 충격인데. 말한 사람은 기억을 못 하는데 들은 사람만 기억하네.
B: (동조하는 척하며) 그러게. (빈정거리면서) 앞으로는 대화할 때 녹취를 해야 하나? (만약 녹취했으면 내가 그런 말 안 한 거 입증되는데)
A: 나야말로 녹취를 해야겠다.
B: 그러니까.
녹음이라고 하지 않았다. 녹취라고 말했다.
대화의 맥락상 서로 이야기한 것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니까 녹취하자는 좋은(?) 의도는 없다. 기억을 못 하는 당사자는 A가 아닌 B다. 그런데 갑자기 B는 ‘서로’ 기억을 못 할까 봐 걱정했고, 그래서 녹취를 하자고 했단다. 그런 게 아니다. B는 A를 비꼰 거다. 수동형 공격이었다.
서로 기억을 못 한 게 아니다. B가 기억을 못 했다. 대화의 시발점은 B의 막말이었다. A는 B의 언행을 기억했다. B는 까먹었다. B는 A가 망상을 한다고 망상하기까지 했다.
그 말을 듣고 A는 분노했다. 그래서 갈등이 심화됐다.
B는 기억을 못 했다는 게 수치스럽다. 그는 기억력이 좋다고 자부했는데 실질적으로 A가 기억한 말들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가 추구하는 이미지는 지적인 사람이다. 그런데 이 사태로 지금 그는 이미지가 타격받았다. 그럼 이미지를 회복해야 한다. 그런데 이미 머릿속에 A가 말한 장면을 없다. 그래서 물귀신 작전을 썼다. 상대도 똑같이 기억을 못 했다고 우기면 된다. B가 기억을 못 해서 일이 더 커진 건데 말이다.
그리고 B는 본인이 자꾸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사실이 아니다. B는 기억을 못 했다. A가 정확하게 기억해서 말한 것을 B가 부정하는 상황이다. 그런데 ‘서로 정확하게 이거 하지 못한다’고 물귀신 작전을 펼쳤다.
B: 어쨌든 녹취라고 말하지는 않았어.
B는 화제를 전환하는 접속사를 꺼냈다. A가 B의 논리를 간단하게 정리해 버리자 말해봤자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B는 A의 말에 더 이상 반박하지 못하고, 대화의 초점을 ‘녹취’냐, ‘녹음’이냐의 사소한 공방으로 돌렸다. 다시 A가 지적했다.
A: 녹취라고 했어.
B: 녹음이라고 했어요.
B는 존댓말을 썼다. 생뚱맞은 태도였다. 반말로 비난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왜 존댓말인가. 어울리지 않는다.
무엇보다 B는 녹음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정말 녹취라고 말했다. 그리고 녹취든 녹음이든 어떤 단어로 말했는지 대화의 주제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대화가 산으로 간다. 이 역시 나르시시스트의 수법이다. 그는 불리해지면 주제를 바꾼다. 그리고 잘못한 사람은 잘못이 없다고 우긴다. 되려 잘못을 지적하는 사람을 비난한다.
A: 녹취나 녹음이나 그 말이 그 말이지.
B: 블라 블라
A: 이런 걸 말하는 거야. 의미만 통하면 되지. 녹취라고 하셨고. 어쨌든 녹음이든 녹취든-
B: 그런 의미로 받아들여졌을 거에 대해서는 그래. 내가 그 부분에 대해서는 어쨌든 그래 그리고 나는-
‘그런 의미’로 받아들여진 게 ‘그래’라고 말했다. 이런 지시대명사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 유추해야 한다.
A: 아니. 마음이 그랬다는-
B: 나는 좀 비판을 많이 하고. 그리고 뭐든지 고쳐야 될 것만 보는 면이 있어.
B는 녹취와 녹음이라는 단어 신경전을 접고, 다시 그전의 주제로 돌아왔다. 바로 성격 얘기다. B가 전 주제로 돌아온 것은 아까 A가 했던 말이 B는 큰 충격이기 때문이었다. B가 열심히 쌓아 올린 이미지를 부정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이전의 대화를 잠깐 복기하자.
A: B가 평소에 날 대할 때 항상 뭔가를 고쳐야 된다는 식으로 말하는데-
B: 블라 블라
A: 별로 객관적이지도 않아.
B: 응.
A: B는 부정적인 감정을 남들보다 많이 느끼니까 무엇이든 문제라는 프레임으로만 보는 거지. 그러니까 내가 잘하면 잘해서 문제라고 하고, 내가 못하면 또 못하니까 문제라고 하고 이런 식이야. 그런 것도 불편해지고 있었던 건 맞아.
여기에서 잘하면 잘해서 문제이고, 못하면 못해서 문제라고 한다. 이게 핵심이다. B는 자존심에 금이 갔다. B가 열심히 구축해 놓은 비판적인 이미지가 깨졌다. A는 B의 정체성을 변경했다. B는 사리분별력이 부족해서 근거 없이 무엇이든 문제라고 불평할 뿐이다. 이 말은 B의 정체성을 건드리는 것이었다. 성격 얘기는 주제와 상관없다. B가 특정 말을 했냐, 안 했냐의 진실 공방이다. 성격은 품평하는 상황은 아니다. 부적절한 발언이었다.
그리고 B의 비판이란 이런 거다.
누군가가 1년 동안 프로젝트를 준비했다고 말했다 치자. 흔히 얼마의 기간 동안 뭘 준비했다는 것은 흔히 들은 말이다. 그런데 B는 이 발언이 이상하다며 불만을 토로한다. 이유는 1년 내내 24시간 동안 그 프로젝트만 준비한 게 아니라는 거다.
그럼 뭐라고 말해야 하나. 1년 동안 매일 3시간씩 준비해서 총얼마의 시간을 투자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라는 건가. 중요한 것도 아니고, 명쾌한 대안도 없는 불만이다. 적절한 답변을 B도 모른다. 다만 그는 팔짱을 낀 채 주야장천 비난만 해단다.
A: 그런데 그게 꼭 고칠 부분도 아니야. B의 주관적인 견해일 때도 많아.
예를 들자. A가 취업박람회에 간다. 그럼 B는 취업박람회에 가는 게 도움이 안 되나고 볼멘소리를 해댄다.
그럼 A가 취업박람회에 가지 않는다면? 그것도 문제 삼는다. 그럼 B는 취업 준비생이 취업박람회마저 안 간다고 비난한다.
A가 어떤 선택을 하든지 이는 정상이다.
박람회에 갈 수도 있고, 안 갈 수도 있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 하지만 B는 이래도 문제라고 비난하고, 저래도 문제라고 비난한다. B의 결론은 이미 정해져 있다. 다만 B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라는 식으로 모든 것을 비관적으로 해석할 뿐이다.
나르시시스트의 심리 구조가 B의 사고방식과 같다.
나르시시스트는 일단 네가 문제라는 주장을 무조건 질러댄다. 그런데 객관적인 증거를 대지 못한다. 당연하다. 그는 비난의 대상에 관심이 없다. 따라서 신념 어린 생각도 없다. 그러니 할 말이 없다.
비난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지만 비판은 아무나 못 한다. 논리적인 근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르시시스트는 비판을 못한다. 비난만 한다.
따라서 나르시시스트의 판단력은 주관적이다. 객관적이지 못하다.
그러니 누군가가 B의 주장을 지적하면 이런 사태가 벌어지는 것이다.
B는 주관적이라는 말에 무척 당황했다. 하지만 흔들림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는 되도록 차분하게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면서 덧붙였다.
B: 어, 맞아. 맞아. 그러니까 내가 생각할 때의... 그런 부분들인 거지.
A: 그런데 왜 스스로 객관적이라고 해?
B는 이에 딱 떨어지는 답변을 하지 못했다.
나르시시스트는 객관적이라는 말에 호들갑스럽게 집착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나르시시스트는 어떤 이유로든 자신의 주장을 반대하는 대상을 혐오한다. 그래서 그는 방어하는 방법을 궁리한다. 예를 들면 미리 '나는 객관적인 사람'이라는 프레임을 적용시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르시시스트와 싸우려면 그 프레임부터 벗겨내야 한다.
자기중심적인 나르시시스트의 사고체계는 협소하다. 편협하다. 그는 한 가지밖에 모른다. 남을 판단하고 조언할 역량을 지니지 못했다. 오히려 나르시시스트가 충고를 들어야 할 처지다.
나르시시스트의 지대한 관심사는 오로지 자기 자신이다. 그러니 자아의 바깥에 존재하는 외부 세계를 깊게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저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고 고군분투할 뿐이다.
그러니까 그가 스스로를 객관적이라고 지칭할 때 말해줘야 한다.
너는 너무 주관적으로 판단해.
그래서 네 주장이나 의견을 신뢰하지 않아.
이렇게 말이다. 나르시시스트가 은밀하게 제안하는 프레임에 속지 않는다는 걸 명료하고 분명하게 알려줘라.
나르시시스트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나르시시스트가 횡설수설하는 모습을 잠시 감상하자. 꽤 재밌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