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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시스트의 괴롭힘을 받아 줄 필요가 없는 이유

나르시시스트는 불안을 해소하려고 희생양을 구박한다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다.

내가 누구인지를 증명하려면 어떤 생각을 하는지 돌아보면 된다.  

그러니까 생각한다는 것은 인생에서 중요한 과업이다.


상대를 알려면 상대의 생각을 알면 된다.  

말을 걸면 된다.

이것저것 질문해 보라.

그리고 어떻게 답변하는지 귀 기울여 들어보라.


말은 생각을 반영한다.

그가 하는 말이 그의 생각이고, 그의 생각이 곧 그다.   


긍정적인 말을 자주 하는 사람은 긍정적인 생각을 많이 하기 때문이다.

부정적인 말을 자주 하는 사람은 부정적인 생각을 많이 하기 때문이다.

별 다른 이유가 있겠는가.

삶은 널빤지를 붙잡고 파도를 타는 것과 비슷하다.

위태롭고 위험하다.

파도가 언제 몰려올지 어떤 수위로 다가올지 매번 예측하기 힘들다.

그래서 미래는 불안함을 자극한다.


그럼에도 최대한 긍정적인 방향으로 사고하는 게 이롭다.  

삶에서 되도록 낙천성을 발휘하는 게 정신 건강에 좋다.

그리고 음식에 소금을 치듯이 부정적인 생각을 간헐적으로 첨가하면 된다.

 

마냥 비관적인 건 좀 그렇지만 부정적인 관점도 어느 정도 필요하다.

예상치 못한 비가 오고, 눈보라칠 나날을 겪을지 누가 알겠는가.

인생은 하늘과 같아서 맑다가도 흐려지고, 천둥이 쳤다가 순식간에 햇빛이 비치기도 한다.

  

그러니까 미리 시뮬레이션을 해 보는 거다.

혹독한 시련을 안정감 있는 자세로 맞이할 준비를 하는 거다.

크게 다치지 않게끔 마음에 근육을 붙이는 거다.    

상황에 따라 좋은 결과와 안 좋은 결과를 동시에 예상해서 앞날을 대비한다면 마음은 고생스럽지만 풍족한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현실을 직시하되 이상적인 희망을 키워내자.  


나르시시스트는 타인을 성급하게 비난한다.

그는 매일매일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말들을 생산해 낸다.

쓸데없는 생산성이다.

수요 없는 공급이다.

화수분처럼 불만을 쏟아내는 그의 정신세계를 좋아해 주기가 어렵다.   


처음에는 오히려 툴툴거리는 나르시시스트가 나쁘지 않다고 평가할 수 있다.  


참 솔직하네.

저 말은 공감이 되네.

원래 매사에 진지한 성격이구나.


이렇게 긍정적으로도 봐줄 수 있다.

물론 초반에만 말이다.


나르시시스트가 나에게 친절하면서 나를 제외한 타인들에게만 부정적으로 반응할 때는 그나마 봐줄 만하다.

사람이 모든 상황에서 한결같이 긍정적으로만 반응하질 못한다.

비관하고, 비판하며, 때로는 비난하는 행위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모양새다.

다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인류애를 발휘해서 너그러운 관점을 대입한다면 그의 불평 중 아주 일부분은 살짝 납득될 때가 있다.

그런데 그것도 아주 가끔씩 말하면 모를까 매사에 어두운 생각만 떠올리는 나르시시스트를 좋게 봐주기란 참 힘든 법이다.


무엇보다 나를 배려하고 있다는 것은 아직 나르시시스트가 마음을 열기 전이라는 뜻이다.

그가 마음을 진심으로 여는 순간부터 나르시시즘적 사고를 여과 없이 드러낸다.

희생양 후보에게 좋은 말을 많이 한다면 아직 상대를 탐색 중인 거다.

 

만약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확정 짓는다면 상황이 달라진다.

그는 사포처럼 까칠해진다.

부정적인 표현을 사용하길 반복한다.


이때부터 희생양은 자존심 상하는 순간이 많아진다.

사포가 맨살에 닿으면 어떻겠는가.


예전에는 나르시시스트를 만나면 기분이 괜찮았다.

잘 맞는 것 같았다.

가감 없이 속마음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희생양은 내밀한 이야기를 하기가 꺼려진다.


나르시시스트의 과잉 반응 때문이다.

어느 날 영지는 식당에서 돈가스를 시켰다.

많이 못 먹어서 싸가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동석했던 나르시시스트가 팍 짜증을 낸다.

아, 그럴 거면 뭐 하러 시켰어?


그대는 음식 싸간 적 없나.

이건 평범한 에피소드다.

내 선택은 정당하다고 부연설명하는 게 우스울 정도다.

그런데 나르시시스트는 영지가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한 것처럼 흥분했다.


영지가 꽃다발을 선물 받은 적이 있다.

모임이 파한 뒤 그는 꽃을 들고,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런데 멀리서 그 장면을 본 나르시시스트가 외쳤다.

야, 어느 여자가 어떻게 저런 자세로 꽃다발을 들어.

타박 섞인 말투였다.


영지는 꽃다발을 가방처럼 들고 있었다.

별 거 아니었다.

꽃다발 드는 공식은 없다.

단지 꽃이 흘러내리지 않게 잘 들면 된다.

게다가 여자가 그러면 안 된다는 주장도 다소 갸우뚱한 말이다.  


널 위해서 하는 말이야.

널 자라게 하려고 하는 말이야.


묻지도 않았는데 나르시시스트는 이렇게 자신을 변호한다.

방어적인 태도다.


나르시시스트도 은연중에 알고 있다.

스스로 상식적인 까칠함을 넘어섰다는 걸 말이다.

자신의 막말에 상대가 불쾌해하는 것도 눈치채고 있다.


사실 나르시시스트는 희생양이 기분 나빠하길 바라고 있다.

그래서 막 나가는 거다.

그리고 나르시시스트의 목표는 남의 기분을 건드려서 자존감을 채우기다.


상식을 가진 사람은 나르시시스트의 목표가 이상하다고 판단한다.

기분 나빠하는 걸 보려고 기회를 노린다는 게 찜찜하다.

그런데 나르시시스트의 심리가 그렇다.

그는 그렇게 못됐다.

이런 못된 시도는 나르시시스트의 삐뚤어진 자아 때문이다.

그의 자아는 매우 빈곤하다.

그는 자기 자신을 불쾌해한다.

스스로 별로라고 여긴다.


그래서 남을 비난하고, 괴롭힌다.

나르시시스트 스스로를 별로라고 여긴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괴롭혀서 자아를 획득하는 것이다.


하지만 병적인 방법으로 얻은 자아는 인스턴트 음식처럼 영양가가 없다.

남을 의존해서 얻은 자존감은 수증기처럼 증발되기 마련이다.

나르시시스트도 결국 이전보다 더 허전한 자아를 가지게 된다.

그렇게 나르시시스트는 방황하는 존재로 살아간다.


나르시시스트가 괴롭힌다면 스스로 약점을 여과 없이 노출하는 것이다.

그가 심적으로 불안정하다는 반증이기 때문이다.

희생양이 괴로워하는 걸 보려고 의도적으로 덫을 치는 것이야말로 나르시시스트의 심리가 잘못됐다는 걸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르시시스트의 괴롭힘을 굳이 받아 줄 필요가 없다.

결과적으로 어느 누구에게도 유익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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