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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과 가깝게 지내지 않아도 괜찮은 이유

인생의 목적을 설정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게 가장 중요하다

예전에는 누군가와 친해지고, 잘 지내는 걸 무척 중요하게 생각했다.


사람에 대한 호의가 기본적으로 높았다.

또 친해지면 유쾌한 일도 많이 생겼다.   

마음이 잘 맞는 친구들과 우정을 다지는 생활은 삶의 원동력이었다.

사람에 대한 긍정적인 경험이 부정적인 경험보다 훨씬 더 많았다. 

그래서 난 행복했다.   


나의 관점에서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선했다.


물론 못되게 구는 이들도 꽤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는 잘 웃고, 친절하게 행동하는 걸 여러 차례 목격했다.

이러니 악인이라고 단정할 만한 인물은 지극히 일부인 듯했다.


꼭 그렇지는 않았겠지만 사람들은 웬만하면 나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인간을 멀리할 이유가 별로 없었다.


나는 상대가 다가오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내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호의를 가감 없이 표현했다.  

어느 정도 편해지면 스몰토크를 나누며 타인을 깊게 알아가는 과정이 즐거웠다.  

내게 그들은 매력적이었고, 늘 가까이 두고 싶은 대상이었다.


이런 적극적인 행동은 인간관계를 맺는 일에 높은 가치를 부여했기에 가능한 태도였다.

또 사람들과 우호적으로 지내는 게 내가 괜찮은 인물임을 증명하는 지표라고 해석했다.


그래서 나를 멀리하는 이들을 보면 신경이 쓰였다.

한때는 날 싫어하는 사람과도 잘 지내보려고 애쓰기도 했었다.

나를 상대를 싫어하지 않으니까, 잘 지내고 싶은 본심을 표현하면 언젠가 그들도 마음을 열 거라고 예상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는 정원을 가꾸듯 인간관계를 아름답게 만들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관계는 생물과 같기 때문이다.

공부는 열심히 노력하면 잘할 수 있다.

하지만 대인관계는 변칙적인 상황이 존재한다.

수학공식처럼 딱 맞아떨어지는 게 아니라 다양한 경우의 수가 펼쳐지는 것이다.


일단 서로 인간적인 호의가 있어도 성격이 잘 안 맞을 수 있다.

그리고 내가 상대에게 친밀감을 느껴도, 상대는 나를 낯설게만 봐서 어색해할 수 있다.

성격의 결이 다르다고 느낄 수도 있고, 사회적 지위나 배경이 너무 달라도 이질감을 느낄 수가 있다.


솔직하게 말하면, 친해지려고 노력하는데도 거부감이 느껴지는 대상이 내게도 있었다.

당시 이유를 딱 꼬집어 말하기 힘들었는데, 되짚어 보니 성격상 서로 불협화음이 날 만한 차이가 있었다.


사회에서 상하관계라면 내가 어느 위치에 있든지 적극적으로 다가가는 게 남에게 부담을 줄 수 있다.


또 앞에서 나에 대해 좋은 말만 하더라도 뒤에서는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무랄 데 없이 매끄럽게 굴던 지인이 내가 안 보는 데서는 실체 없는 유언비어를 퍼트린 걸 알게 된 적이 있다.

이런 경우를 보면, '열 길 물속은 알지만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이 떠오른다.

때로는 입 안의 혀처럼 구는 인물을 더 조심해야 한다.


무엇보다 인간은 부족한 존재다.

여러 가지 상황을 겪어보니 나도 내 부족함이 보였다.  


그리고 사람의 성품은 보통 너그럽지 않다.

누구나 자신에게는 관대하면서 남에게만 엄격한 경향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속성이 그러하다.

그래서 백 번 잘 지내도 한 번 어긋나면 사이가 끊어지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벌어진다.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 안의 괴물을 소환하는 자들도 있다.

친절한 태도를 가볍게 거두고, 상대가 편해졌다는 걸 명분 삼아 못된 본성을 경솔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그들은 남이 상처를 받든지 말든지 부정적인 언행을 여과 없이 쏟아내고, 본인은 원래 성격이 이렇다고 기세등등하게 부연설명까지 한다.


중요한 사실은 내가 내 인생을 잘 꾸려간다는 전제 하에 사람들을 만나고, 챙겨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잘 지내지 못하면 만남 자체가 꺼려진다.

만난다 해도 좋은 소식을 전하지 못하니 즐겁게 대화하기가 쉽지 않다.

심정적으로 서서히 멀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잘 살고 있어야 사람들도 곁에 더 오래 머문다.

내가 힘들어하면 가족과 친구도 처음에는 위로할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상황이 그대로라면 상당수는 태도를 바꾸거나 떠난다.

고통의 나날을 보내는 당사자를 보니 덩달아 지치기도 하겠지만, 상대에게 더 이상 얻을 게 없어서이기도 하다.

그게 정신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지 말이다.


변해버린 그들에게 서운하겠지만 너무 원망할 필요는 없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마음에 따라 자유롭게 판단했을 뿐이다.


내가 대인관계에 힘을 뺀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인생은 바다에서 홀로 노를 젓다가 목적지에 도달하는 과정임을 체감해서다.

파도로 배가 뒤집혀 망망대해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위기를 극복하는 것은 온전히 내 몫이다.

내게 주어진 삶이기에 당연하다.


따라서 나의 힘듦은 나만이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

내가 겪는 고통이 아무리 생생하고 입체적이라도, 타인은 나의 괴로움을 2D 영화를 보는 것처럼 평면적이고 무감하게 느끼곤 한다.

그것이 연약한 인간의 한계다.


서로 연대해서 위로를 얻기도 하지만 그런 순간도 잠깐이다.

우리는 삶에서 서로를 보는 게 아니라 자신을 보면서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러니까 누구나 인생의 주체인 내가 가장 중요하다.

내가 존재해야 세상도 존재하는 법이다.

내가 사라진다면 세상은 없는 것이다.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존재는 존재하지 않는 상태와 같기 때문이다.

내가 존재하기에 세상도 의미를 가진다.


풍랑 속에서 노를 젓다가 우연히 좋은 동료를 만날 때가 있다.

그때 잘 지내면 된다.

그러다가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인연이 여기까지임을 인정하고, 서서히 멀어지면 된다.

또다시 혼자 항해하다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좋은 추억을 쌓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관계는 계절과 같다.


살다 보면 꽃봉오리가 펼쳐지고, 초록잎이 솟아나는 기간이 찾아온다.

예상치 못한 시기에 내 의지와 상관없이 좋은 사람들을 만나 화기애애하게 지내는 나날이 있다.


하지만 하염없이 비가 오거나 눈보라가 몰아치는 기간도 있다.

내가 선의로 대해도 마음의 빗장을 굳게 닫은 채 배척하는 대상을 만나 고통의 시간을 보낼 때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오묘한 섭리가 개입되는 인간관계를 한계가 명확한 인간이 좌지우지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괜찮다.  

사람을 너무 붙잡지도 말고, 너무 멀리하지도 않으면서, 상황과 때에 따라 내 진심을 자연스럽게 전달하면 된다.


타인의 마음에 들려고 부단히 노력하지 말아야 한다.  

자기 자신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애쓴 만큼 남이 나를 더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누군가의 마음에 흡족한 인물이 된다는 게 생각보다 힘들다.

사람마다 가치관이 다르고, 기대하는 바도 다양하기 때문이다.

결국 내 노력과는 무관하게 누군가는 나를 좋아하지만 누군가는 나를 싫어하게 된다.    

또 내가 호인이라고 평가받는다 해도, 그게 인생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사람들과 꼭 친해져야 한다는 신념도 버려야 한다.

친해지고 싶다는 의지 하나로 친해질 수 있는 게 아니다.

때로 우리는 마음의 빈 공간을 채우려고, 눈앞에 돌아다니는 누군가를 옆에 붙잡아두려고 한다.

하지만 인간관계에서 과도한 노력은 부작용을 초래한다.

'관계 사냥꾼'이라는 낙인이 찍히는 것이다.  

혼자 있는 게 괴롭다고 무작정 사람을 찾는 것은 한 인간의 개별성을 염두에 둔 행동이 아니다.

특정인에게 인간적인 호의가 생긴 다음에 천천히 다가가는 게 순리에 맞다.  

자연스럽고 편안한 사이가 최고라는 걸 기억하자.


들인 공에 비해 성과가 미미한 게 대인관계다.

타인과의 어울림은 내 예상대로만 움직여지지 않는다.

내가 붙들어도 흘러가버린 사람들, 떠나보내고 싶었지만 한동안 머물렀던 이들도 있다.


누군가와 함께할 때는 내 마음이 편안하고, 즐거워야 한다.

물론 상대도 나에게 좋은 영향을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불편함이 켜켜이 쌓이는 사이는 악연으로 마무리될 때가 빈번하다.


그러니 내 마음을 면밀히 관찰하고, 감정에 솔직하게 직면해야 한다.

불편한 건 다 이유가 있다.


그리고 사람들과 친밀하게 교류하는 게 곧 내가 좋은 사람이라는 걸 의미하지 않는다.


누구나 성향의 차이가 있다.

좁고 깊은 관계가 익숙한 사람도 있지만, 얕고 넓은 관계를 선호하는 이도 있다.

누군가는 평소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다가 가끔씩 친구들을 만나는 게 더 잘 맞는다.  

그에게는 많은 사람을 만나 발을 넓히는 게 즐거운 사교활동이 아닌 매우 피곤한 일인 것이다.


그리고 내가 처한 입장과 위치에 따라 대인관계의 폭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무엇보다 인생의 주인공은 나다.

내가 나답게 존재하는 게 일 순위다.

사람들과 어울리려고 개성을 깎고, 고유한 생각을 감춘다 한들 얻는 유익은 별로 없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서 혹은 미움을 받지 않으려고 꾸며 낸 모습은 누가 봐도 부자연스럽고, 이질감이 든다.  

자신부터가 어색하다.

나와 타인 간에는 좁힐 수 없는 간극이 있는데, 거리감이 더 생기는 것이다.


인간에게 기본적인 신뢰를 가지되 인생의 주도권이 내게 있음을 인식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자.


삶은 생각보다 짧다.

우리는 제한된 시간을 살고 있다.

지금도 시간은 잔인하도록 꾸준하게 인생의 마침표를 향해 터벅터벅 걸어가는 중이다.


그러니 인생의 주인공이자 책임자인 나에게 반드시 먼저 집중해야 한다.

그다음에 사람들을 챙겨야 한다.

내가 나를 지키지 못한다면, 가족도 지키기 힘들고, 사람들과도 멀어지게 된다.  


독립적인 주체자로 인생의 목적을 명확하게 설정하고, 앞으로 나아가자.

홀로 사명을 잘 수행하는 길에서 가끔 신이 선물한 사람들과 조우한다면 더할 나위 없는 위로와 기쁨을 경험할 것이다.


기억하자.

내가 잘 살아가는 게 가장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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