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3호
당신은 어떤 사람 혹은 어떤 사물에게 자신의 것을 내어줄 수 있나요? 당신이라면 상대의 얼굴을 마주할 시간을 내어 줄 수 있을까요? 혹여 누구였다면 기꺼이 하루의 잠자리를 내어 줄 수 있을까요? 호흡의 결이 같으며 비슷한 템포의 걸음과 물리적 분리 에도 불구하고 사유의 공간을 같이 했던 사람. 결코 짧지 않았던 동행의 오래된 기억들. 어느 거리, 어떤 시각. 어느 계절의 공간에서 반드시 한 번 즘은 마음의 자리가 드러나 보이는 그러한 사람 말이죠.
4월 3.. 10.17 일 중에 시간 되는 대로 밥 먹자. 문자 줘.
제길.. 도대체 너만 바쁘냐고 매어 있는 건 마구간과 외양간의 동물 에게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고 인간도 비슷하다고
자신의 시간이 여유롭다면서 불쑥 '점심'을 먹자는 전화를 때리고 몇 번 울리는 전화에 답을 하지 않을 때엔 왜 전화받지 않느냐며 짜증을 내어두곤 했다. 사그라들어버린 아니, 가정리 해둔 마음이 혹여 상대방에게 불편을 끼칠 까 하여 배려 깊은 친절함 탓에 문자를 넣었건만, 응답 없음이다.
'아야' 긁힌 자국에서는 가느다랗게 붉은 피가 새어나고도 있다. 꺼내어보지 말아야 했던 마음의 자리를 꺼내어본 결과였을까?. 딴생각으로 잠시 이동하고 집중하지 않았음에 작업 중에 나무 가시에 손가락 끝을 내어주고 말았다. 다시 현실로 돌아온 해수는 차장에게 답 했던 시간을 다시 한번 체크한 후에 자리로 돌아가 앉는다. 컴퓨터 화면 위에 무수히 많은 내 폴더와 파일 들은 제각각의 모양으로 집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 해수 자신의 이름을 딴 집 하나는 여전히 존재하지 않지만. 해수는 그때마다 각 폴더에 집을 하나씩 마련해 주 곤 했다. 관대하고 덕망을 갖춘 노블레스오블리쥬를 실천하는 마음으로 폴더마다 101호 207호 혹은 508호... 등등. 가끔 각 호마다 어떤 구성원이 살고 있는지 기억하기 힘들 때도 있지만, 집을 지어준 자신이 대견하고 뿌듯했다. 어쩌면 자신의 공간을 가진 녀석들도 무척이나 기뻐하는 것을 자부하면서. ' 집'이라 하면 아름다운 꽃들의 향연으로 살랑이는 바람이 이는 바깥을 향해 문을 박차고 나가야 할 유혹이 있음에도 온전히 느낌을 전달 받을 좋은 창을 가지며, 몸을 가누지 못할 만큼의 거센 바람과 먼지를 통째로 한 곳으로 모아 놓을 만큼의 거센 바람도 이겨낼 단단한 벽. 타오를 듯한 여름태양과 끈끈한 습기를 머금은 눅눅함을 잠재 워 줄 것이며, 그녀의 돌아 서 버린 차가운 냉기를 잠재워줄 좋은 나무마루가 있어야 했다. 가끔은 삐걱대는 소리도 어쩌면 콘크리트가 다수인 도시에서 듣기 힘든 다정한 소음이 될 수 있도록. 해수는 자신의 집은 자신의 손으로 반드시 지을 각오로 목공 일을 배우기 시작했었다.
그 녀석은 참으로 부러운 녀석이다. 뭘 대충 걸쳤다 싶어도 값나가는 태그가 달린 브랜드였고, 너무 나대지도 않고 너무 치졸하게 굴지도 않았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워낙 평이 괜찮았기에 학생회장이 당선된 것은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가끔 다른 세계에 사는 놈 인 듯 하지만, 학교에서 만큼은 여지없이 철 없이 구는 시절 친구였다. 민준이의 부모는 공무원이라고 했다. 하늘의 별보다 더 높다는 공무원. 우르르 몰려나오는 일반 회사원의 목걸이와는 태생부터가 남다른 공무원. 그중 해수가 제일 부러워하는 것은 여자친구가 영주 란 사실 인 거다. 다른 아이도 아닌 영주. 모든 남자아이들의 시선을 앗아가는 영주 말이다. 부러운 놈. 멋진 놈. 게 부러운 놈. 넌 너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그 이전의 할아버지께서 대단한 은 공을 세우 신 덕에 이런 무지막지한 것들을 가진 거냔 말이다.
'해수야. 이번 주말에 애들하고 ddp 갈건대. 같이 안 갈래? 창수랑 근우도 같이 갈 거야.'
'나. 주말에 대청소해야 해. 아버지가 불호령 떨어졌어. 할머니랑 할아버지랑 가족들 모인다고 모두 집청소 하라셔.'' 아버지께 대충 둘러대고 나와. 시험도 끝났는데.' '알았어. 일단 말씀드려보고 '
'야. 여기 여기' 민준 이. 근우. 영주. 채원이는 벌써 해수를 기다리며 버스 정류장에 나와 있다. 지식의 덩어리를 담아 둔 백팩의 무게는 하루를 잊어보려는 듯 샐쭉 해 져 있다.. 지하철로 이동하는 내내 둘 혹은 해수를 포함한 친구들의 수다는 여러 번의 정류장을 지나쳐 가는 사이에도 지침이 없다. 영주와 채원은 불그레한 옅은 화장기로 물기를 한 껏 머금고 곧 솟아날 듯한 연둣빛의 새싹을 닮았다. 지상으로 내딛을 즘의 하늘과 맞닿은 강의 반짝임은 어쩌면 오늘의 그들인 양, 연신 반짝반짝 빛을 내어 가고 있다.
동대문은 신기했다. 아주 세련되지도 그렇다고 예스러움이 사라지지도 않은 과거와 현재의 공존의 냄새를 하고 있었고, 할아버지의 시대에나 있을 법한 낡아 빠진 가게들도 여럿 과거를 떠나보내지 못한 듯 자리에 남아 있었다. 학교라는 통제를 벗어난 자유로움과 그 누구의 간섭 따위도 필요 없는 진공 상태의 아이들이었다. 몇 시간을 돌아다닌 후에 해수와 친구들은 허기를 채우러 시장 안에 자리한 국밥 집으로 향했다.
'너희는 이런 걸 먹으러 오니?' 채원이는 마뜩지 않다는 듯 불평을 하면서도 더 이상의 말을 덧 붙이지 않고 선 뜨근한 국물에 밥을 말아먹었다. '뭐. 왜?' 채원이는 국그릇의 바닥이 보일 즘에 근우가 묻는 말에 고개를 들고 답을 했다.' 채원아. 넌 도대체 그 많은 걸 먹는데, 그거 다 어디로 가 는 거냐? 진짜 도통 미스터리이다. 깡 마른 수수깡 같아가지고 저렇게 맛있게 먹는데. 참, 너 어디 아픈 건 아닌 거지? ' '우리 채원이는 뭘 먹어도 다 소화시키는 거야. 맞지? 그렇지?' 영주가 채원을 거들어 본다.
'창수는 안 온다고 했어?'해수는 그제야 창수의 부재를 깨다고 묻는다.'음. 아침에 출발하려는데 연락 왔었어. 갑자기 집안에 일이 있다면서, 다녀 오라더라. 목소리가 좋진 않던데.'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우리의 선택이란 너무나 허술하기 이를 데 없고 , 제 아무리 간교한 재주를 부려 남들보다 뛰어나고 명석한 척 하지만, 결국에는 후회의 투성이가 더 많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합리화의 결론으로 끝이 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눈 한 번의 깜박임으로 , 손가락이 제 멋대로 되지 않음에도 , 정말로 써야 할 말을 쓰지 않고 다른 언어로 에둘러 얘기해 버린 후에 수많은 자책과 혹은 안도로 막을 내린 순간들을 잊을 수 없다.
채원이
세상과 아니 나와 의 이별을 고한 지 벌써 두 해가 가고 있다.
여린 가지처럼 순수하고 따뜻한 아이
나의 바탕화면에는 아직도 '303'호는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