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기 시작한 그날의 이야기
20대 초반의 나는 우울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밥을 한술 떠 넣을 힘도 없어 굶는 것이 일상이었고, 하루의 절반 이상을 거북하기 짝이 없는 잠으로 보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질 않았다. 매일 아침 등굣길에 횡단보도 정지선을 보며 한 두 발짝 더 걸어 나가는 상상을 했다. 숨 쉬는 것조차 너무도 버거웠고 나의 세상이 여기서 끝난 것만 같았다.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은 열려 있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도움을 받는 것에는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했다. 나를 지옥으로 몰아넣었던 우울은 도움의 손길마저 막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끔찍한 심정으로 무의미한 발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였다.
매일 똑같이 걸어가던 길에서 있는지도 몰랐었던 중고 서점을 발견했다.
중학교를 졸업한 이후로 교과서와 문제집을 제외한 책은 일절 읽은 적이 없던 나였지만 그날만큼은 어쩐지 서점으로 걸어 들어가고 싶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최초의 탈출구를 찾게 되었다.
서점에 들어가면 으레 느껴지는 그 친숙한 향기가 있다. 특히 중고 서점에서 낡은 종이들이 내보내는 따듯하면서도 예스러운 향기는 그것만으로도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효과가 있다. 나는 바로 그날 그 중고 서점에서 맡았던 그 향기를 절대로 잊을 수 없다.
그 동네의 중고 서점은 대학가에 있어 다른 중고 서점보다 폭넓고 많은 책을 다루고 있었다. 나는 책장 안에 나래비를 서 있는 수 많은 책등을 바라보며 정갈한 활자들을 눈에 담았다.
그곳에는 돈을 벌게 해주겠다는 책도 있었고, 사람들을 위로함을 통해 작가 자신 또한 위로 받고자 하는 책도 있었고, 상상 속의 이야기들을 유려하게 펼쳐내는 책도 있었다. 세상 사는 이야기가 담겨 있었고, 세상의 모든 지식들이 담겨 있었다. 그때 당시 보고 듣는 어떤 것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나는 이상하리만치 그 이야기들이 흥미로워 보였다.
그래서 그냥 보이는 대로 책 두어권을 손에 들고나왔다. 그리고 그 책들을 충실히 한 장, 한 장 넘겨 갔다.
사실 당시에는 여러모로 인지적 기능이 떨어져 있어서 명료하게 책을 읽고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냥 종이에 적힌 활자를 읽는 것만으로도 내일을 살아갈 가치가 있는 인간이 되는 기분이었다.
당시에 나는 넘쳐나는 디지털의 홍수 속 외딴 종이배가 된 기분이었다. 나만 지옥 속에 두고 빠르게 앞서가고 있던 모두를 등지고 활자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어이없는 발상이지만 핸드폰 화면이 아니라 책을 읽고 있는 내가 특출난 인간인 듯 느껴졌다. 멍청한 사고방식이었지만 당시에는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글을 읽고 있는 내가 사랑스러웠다.
그렇게 그날 이후로 독서는 나의 특별한 취미 생활이 되었다.
책을 소유하는 느낌이 좋아서 늘 중고 서점을 들락거리며 책을 사 모았다. e-북이란 것이 있길래 e-북 리더기도 함께 장만했다. 남들이 좋다는 책을 읽고 실망하기도 하고, 저기 심연 속에 가라앉아 있던 보석을 발견하는 희열을 느끼기도 했다.
이 모든 과정을 겪고 현재에 도착한 나는 생각한다. 그때엔 내가 특별했던 것이 아니라 책이 특별했던 것이다. 특별한 책을 읽었다는 것이 아니다. '책'이라는 존재가 특별하다.
책에게는 결핍을 채워주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다 결핍을 가지고 있다고. 순간 반발심이 들었다. '아니?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는데?'. 하지만 나는 이내 깨달았다. 이 반발심은 피할 수 없는 진실을 마주 했을 때 느껴지는 반발심이라고.
나는 너무도 그 문장과 잘 맞는 사람이었다. 나는 큰 결핍을 가지고 있고 이젠 그것을 완전히 메울 방법을 찾을 수도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럼에도 내가 아직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책으로 결핍을 어느 정도 덮어두고 있기 때문이다. 책을 읽고 혼자 생각하는 시간이 이젠 나를 지탱하고 있는 삼각대의 한 다리가 되었다.
좋아하는 책의 분야를 찾고, 좋아하는 작가를 찾고, 좋아하는 문장 안에 틀어 박혀 눈을 질끈 감고 글자가 주는 환희를 즐기다 보면 내 안이 보기 드물게 가득 차는 기분이 든다.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책은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 지 갈피를 제시해 준다. 유달리 좋아서 몸부림을 치게 되는 그 무언가의 원피스를 찾는 과정. 그 과정이 책에 모두 담겨 있었다.
좋아하는 것을 찾은 사람은 내일이 기대가 되기 마련이다.
나의 가슴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구멍은 사라지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여러 사건들로 인하여 그 크기와 깊이를 더해간다.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구멍은 생겨버렸고 언제까지나 구멍 속의 어리고 작은 나를 연민하며 살 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구멍의 입구를 막아가고 있다. 그곳에는 내가 사랑하는 것들이 가득 쌓여있다.
나는 여전히 중고 서점으로 향한다.
사고 싶은 책이 없을 때에도 우선 문을 열어 그곳의 공기를 가득히 들이마신다. 그리고 그 옛날처럼 우연히 마주치는 운명 같은 책을 한 권 손에 든다. 그래 이것이 내가 사랑하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