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을 연료로 하는 글쓰기
우울은 글쓰기의 좋은 연료가 된다. 노트북 앞에 앉아 나의 우울을 들이붓고 있노라면 어느새 손가락이 저절로 움직여 쓰고 싶은 것이든, 써야 하는 것이든 해내어 결과를 내놓고는 한다.
우울을 드러내어 이야기하는 편은 아니지만 가끔은 토해내지 않으면 안 되는 감정들도 있다. 그냥 괴로우니까 괴로운 것이겠지 하며 그러려니 넘기다가도 자기 연민이라는 것이 도를 넘어 나 스스로를 비련의 여주인공으로 만들지 않으면 안 되겠는 날. 그런 날 글을 쓰게 되는 편이다.
산업혁명의 기반은 기차였다. 석탄을 때어 검은 연기를 내뿜는 기차들이 지금의 세상을 만들었다. 나의 일상도 마찬가지이다. 우울을 푹푹 때어 재로 만들고, 그 까만 재로 글씨를 쓰노라면 그제야 내 인생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내가 가진 부정적인 감정들을 강렬한 은유로 형상화하여 눈에 보이게 만들어 두는 과정은 오히려 부정적인 감정에서 헤어 나오는 것을 돕는다.
글로 보이는 내 우울한 감정은 어쩐지 나의 것이 아니라 다른 제삼자의 감정처럼 보인다. 분명 나의 감정을 적어둔 글임에도 그냥 책을 읽을 때처럼 다른 세계의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보고 있는 기분이 든다. 그렇게 내 감정을 한 발 떨어져서 관망하고 있자면 생각 외로 내가 가진 이 불안들이 별것이 아닌 것으로 다가온다. 그렇게 나의 감정을 정화하고 난 후에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든다.
사실 우울할 때 쓰는 글은 장르를 가리지 않는다. 때로는 SF소설을 쓰며 넘실거리는 과학적 상상력을 뱉어놓기도 하고, 내가 꿈꾸는 행복한 로맨스를 그리기도 한다. 현실을 벗어나고 싶어 몸부림치고 있는 나의 마음을 차라리 현실이 아닌 글 속의 주인공에게 의탁해 두면 잠시동안은 아무런 걱정 없이 진행되고 있는 이야기에 몸을 맡기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소설 쓰기를 즐긴다. 수많은 작가들이 자전적 소설을 남기게 된 이유도 이런 것이 아닐까. 내 소설 속 주인공들은 별로 안정적인 인간군상은 아니다. 다 어딘가 하나씩 결핍을 가지고 있거나 쉬이 해결되지 않을 아픔 속에 놓여있다. 소설의 주인공이 당연히 시련을 겪어야 마땅하지만 나는 그 시련의 정도가 괴이하거나 필요한 만큼 불쾌할 때에나 만족감을 느끼는 것이다.
글은 주로 새벽 시간에 쓰는 편이다. 꼭 새벽 시간이 되면 내 안의 글을 쓰는 요정이 깨어나는 것인지 글이 술술 나오곤 한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도 모두가 잠든 새벽이다. 낮시간에 노트북 앞에 앉아 있으면 이상하게도 글이 아닌 다른 곳에 집중력을 빼앗기곤 한다. 그래서 늦은 시간까지 글을 쓰다 잠에 드는 일상이 습관화되었다. 이렇게 올빼미 족이 되어버린 나는 건강을 염려하는 주변의 목소리가 들릴 때면 작은 글쓰기 요정을 빌미로 나의 생활양식을 합리화하곤 한다.
그리고 새벽 시간에 글을 쓰는 것에도 분명한 장점이 있다. 주로 밤부터 새벽 시간은 우울한 인간들이 가장 깊은 심연 안으로 잠기게 되는 시간인데 그 시간에 글을 쓰는 행위에 오롯이 집중하고 있다 보면 심연으로 가라앉았을 배는 소용돌이를 유유히 비껴가 아침을 맞을 준비를 한다. 지금까지 수많은 위태로운 밤을 무사히 넘겨온 나의 생존 꿀팁이라면 꿀팁이다.
우울을 먹은 글은 무럭무럭 자라나 무성한 나무가 되곤 한다. 그렇지만 가끔은 조금 두렵기도 하다. 내가 더 이상 우울하지 않으면 저 무성한 나무에 줄 양분이 없어질 것 같은 두려움. 우울이 사라지면 글을 함께 그만두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언젠가 들었던 예술가들의 딜레마가 떠오른다. 우울증과 불안증을 치료하고 나면 창작의 영감이 떠오르지 않아 일부러 치료를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 나 또한 그들의 전철을 밟게 되지 않을까. 그렇게 된다면 나는 심대한 난제를 앞에 둔 수학자의 심정으로 앞으로의 삶을 어떻게 풀어나가는 것이 좋을지 고민하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