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예반장 Oct 21. 2023

흰 눈밭에 주홍 꽃이

   수화기 저편에선 이틀 내내 대답이 없다. 전화벨 소리를 죽여놨나 아니면 듣지를 못하나. 전화기는 뭐하러 들고 다니느냐고 만나서 물어볼까. 출발하기 전날 밤늦게서야 전화를 받은 이 할머니는 일 년 만의 의례적인 인사말 한마디 전할 틈도 주지 않고 당신 하고 싶은 얘기만 속사포처럼 쏟아낸다.

   “우째 지냈능교? 은제 올라꼬? 오널?... 아, 내일! 단디 하시오. 야들, 참말로 실하데이.”

내가 누군지나 알고서 말하는 걸까. 단디?

   하동까지 250여 킬로미터 거리 세 시간 반 남짓, 계곡을 끼고 선 아담한 장터 앞에 차를 세운다. 뒷골부터 장딴지까지 온몸이 노곤하다. 밖으로 나와 어깨 위로 두 팔을 쭉 펴는데 눈 앞에 펼쳐지는 풍경이 어찔하게 황홀하다. 뱀사골 계곡 언저리 길섶, 올망졸망 늘어선 노점상마다 폭포처럼 쏟아내는 주황의 물결, 그 뒤로 어른거리는 주름투성이 할머니의 얼굴도 붉게 익었다.    

 

   10여 년 전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무작정 떠난 여행에서 이 할머니를 처음 만났다. 벚나무 단풍이 화려한 늦가을, 놀며 쉬며 달리며 가다가다 닿은 곳이 지리산 남쪽 섬진강 하구였다. 내려오는 동안 끊임없이 보이던 도로변 농가의 자잘한 감과 얼기설기 걸려있던 곶감은 거기서 눈에 띄게 줄었다. 내 주먹보다 큰 대봉감이 도회지 마트의 도매가보다 훨씬 쌌다. 할머니가 생각을 바꿔 값을 올려 부를까 조바심을 내면서 세 상자를 후딱 차에 실었다.

   감 익히는 법만 대충 듣고는 부리나케 장터를 떴다. 하루나 이틀 정도 기계로 숙성시켜라. 냉장고에서 익히는 것이 편리하지만 장독에 지푸라기를 넣어 익히느니만 못하다. 그도 아니면 바람 잘 통하는 장소에 띄엄띄엄 늘어놓고 천천히 익혀라 등등. 기계도 장독도 나와는 거리가 먼 상황이라 택했던 마지막 방법이 행운이었다. 인위적인 요소가 가미된 숙성 방법으로 얻기 힘들 할아버지 시절의 느긋함과 50여 년 전 냉장고나 건조기 따위라곤 없던 시절의 진득한 풍미를 고스란히 맛보게 되었으니.

   그날 이후 십 년이 넘도록 무서리 내리는 늦가을부터 이듬해 정월까지 동트기 전 새벽부터 부산했다. 잠깐의 번거로움을 견뎌 맛보게 되는 혀와 뇌의 즐거움은 공장의 정제 가공식품과 자연 숙성된 식자재와의 차이를 알고 난 다음 생겨난 일종의 중독이었다. 좋은 음식을 골라 먹어 천년만년 살아보겠다고 안달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광적으로 자연식을 챙겨 먹는 깔끔이와도 거리가 멀다. 옛날 방식으로 연시 만드는 법을 알려준 할머니 덕인지 혹은 탓이라 할지.     


   매년 내려오는 내 속을 빤히 꿰차고 있는 그녀와의 가격 협상에서 밀리지 않겠다는 생각을 접은 지 오래다. 그러나 오늘은! 숨 한 번 길게 쉬고 흥정을 시작한다. 어쨌거나 팔아야 하는 노련한 할머니와 많이 살 테니 값을 깎겠다는 과똑똑이 간의 줄다리기는 역시 싱겁게 끝난다. 수십 년 사람 대하는 일에 이력이 붙은 그녀를 이길 재간이 없다. 그렇다고 내가 손해를 보는 것은 아니다. 그 이상은 내지 않겠다고 맘먹은 금액보다 대충 20% 정도 높은 가격으로 결정된다. 그래도 시장 가격 대비 거의 반 정도에 불과하다. 게다가 할머니는 머나먼 길 마다하지 않고 내려온 손님 관리용 보너스를 그쯤에서 꺼내놓는다.

   밤, 석류, 모과 등 과일류, 나물을 포함한 여러 가지 농작물을 주섬주섬 풀어놓는다. 하나하나 서비스라고 강조하면서. 때깔 좋은 연시 열댓 개까지 꺼내놓고는 먹어보라고 눈짓한다. 부드럽다. 달다. 구매 협상의 대상으로 할머니를 대하던 나의 냉정함은 그때부터 대책 없이 무뎌진다. 무덤덤한 표정과 툭툭 던지는 할머니의 말 몇 마디에 그때껏 다진 결기가 하염없이 녹아내린다. 장가가는 새신랑처럼 실실 웃으면서.

   선선한 끝방에 종이를 깔고 큼직한 대봉감을 띄엄띄엄 늘어놓는다. 어떤 감은 하루 만에도 달콤하게 익지만 느려터진 놈은 한 달이 지나도 마냥 떫다. 검은 반점이 늘어나면서 주황에서 주홍으로 색도 진하게 변해간다. 껍질을 살짝 눌러보면 젖살 오른 아기 볼처럼 말랑말랑하다. 틈날 때마다 위치를 바꾸고 방향을 돌려준다. 탱탱했던 표면이 돌아가신 외할머니 얼굴처럼 쭈글쭈글 변하는 동안 부드러운 속살은 단맛을 차곡차곡 쟁인다.

     

   아침밥은 곡물류 하나, 견과류, 달걀, 채소와 과일 등 음식 찌꺼기가 적게 나오는 형태로 준비한다. 가을 대봉감이 등장하고부터 네댓 평 남짓한 주방 분위기가 달라졌다. 아침 식사 준비 과정이 부쩍 진지해졌다고나 할까. 사계절 따라 메뉴가 조금씩 달라질지언정 변함없이 먹는 음식이 시큼해도 영양소 풍부한 요구르트다. 그 위에 올려 입맛을 돋울 목적의 부재료가 주재료의 매력을 넘어선다는 점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반전이었다.

   알맞게 익은 연시를 골라 껍데기를 벗겨낸다. 반투명 얇은 막과 알맹이를 분리하는 일은 보기보다 까다롭다. 과육이 손가락과 식탁에 엉겨 붙어 지저분하다. 그런들 어떠하리, 색깔이 고와 용서되고 먹기 전에 눈이 먼저 즐겁다. 이 세상에 하나뿐인, 꼭두새벽부터 호들갑 떨며 준비한 성찬을 즐길 시간이다. 뽀얀 요구르트를 투명한 유리잔에 담아놓고 발라낸 속살을 그 위에 올린다. 겨우내 아침이 환하다. 흰 눈밭에 주홍 꽃이 핀다.     

이전 07화 원 플러스 원을 거부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