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흘째 신문이 오지 않는다. 새벽에 마당에 떨어진 신문을 줍는 일이 내게는 읽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안 보이면 허전하고 섭섭하다. 변두리 작은 도시로 옮겨와 반나절이나 하루쯤 늦는 경우 말고는 이런 식으로 며칠간 멈춘 적 없다. 돌아보면 신문(newspaper)이 신문(新聞) 아닌 구문(舊聞)이던 순간을 벌써 오래전에 겪었다. 일간지 연재만화에서 ‘풍운아(風雲兒)’라는 한자어를 처음 마주쳤던 그때, 아마도 열 살쯤이었을 것이다.
촌구석 버스 종점 윗동네 삼십여 가구 중 신문을 보는 집은 서넛에 불과했고 어느 집에서 구독하는지 모두 알았다. 조간신문이 머나먼 길 어딘가를 거쳐 정류장 맞은편 구매소에 내릴 때면 사방은 이미 어둑했다. 빨라봤자 늦은 밤이나 다음 날 배달될 수밖에 없는데 그쯤이야 이미 관례가 되어 아무도 문제 삼지 않았다. 배달부도 딱히 없었다. 마을 올라가는 사람 편에 들려 보내든가 지나는 마을 주민 누구든 들어가 신문 있느냐 물으면 두말없이 내주곤 했다.
방학 땐 내가 나섰다. 신동우 선생님의 “풍운아 홍길동” 다음 얘기가 궁금해서 제일 먼저 내려가 신문을 찾아 돌아오는 길에 느긋하게 읽었다. 한 장을 여럿이 읽으니 요즘 말로는 ‘원 플러스 매니’라 할 만하다. 패랭이 갓을 쓴 의적 홍길동이 악당을 통쾌하게 무찌른다는 만화 외에 교과서에 없는 세상사가 거기엔 차고 넘쳤다. 허탕도 많이 쳤다. 대부분 하루 한두 편인 버스가 고장 났거나 거센 눈비로 길이 막혀 오지 못한 경우였다.
오전리 이쁜이네 김장김치 3.5kg 가격과 미아에서 강남까지 택시비는 비슷하다. 친구 네댓 만나 낼 커피값이나 분당 단골집 흑돼지 오겹살 130g 1인분 값도 고만고만하다. 호프집에서 ‘맥주 세 병+마른안주’를 세트로 주문한다. 일주일 한 장씩, 한 달 동안 꾸준히 로또 판매점에 들러 번호 몇 개 잘만 뽑으면 수십억 부자 된다는 꿈을 접기 쉽지 않다. 신문 구독료는 매달 지로 용지로 청구된다. 요즘 2만 원 안팎으로 가능한 소비 형태의 몇 가지 예다.
닷새 만에 신문이 오기 시작했다. 조간(朝刊)치고는 많이 늦은 오전 11시쯤 우체국 택배를 통해서다. 오천 원을 더 내라고 보급소에서 연락이 왔다. 배달 인력 부족으로 어쩔 수 없다는 설명이 자못 불쾌했으나 할 수 없이 동의했다. 종이신문을 좋아하는 성격에다 언제 어디서든 핸드폰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스마트 터틀넥 사피엔스’ 대열에 내가 낄 이유가 없었다. 가만 보니 구독료만 5천 원이 인상된 셈이었다.
신문 배달은 들쭉날쭉했다. 오후에 도착하기도 했고, 하루 지나 당일과 전날 신문 두 장이 우편함에 나란히 들어있기도 했다. 그러나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월요일 오전엔 신문이 세 개나 왔다. 토요일 자 두 장과 월요일 신문 한 장. 한 주일이 지나자 상황은 훨씬 복잡했다. 또 월요일 오후였다. 전번 주 토요일과 당일 월요일 것 각 2장씩 총 네 개의 신문이 마당과 현관에 널브러져 있었다. 뭔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내야 했다.
차량 이동이 거의 없는 새벽 4시경, 오토바이 한 대가 집 앞 도로에 멈춘다. 남자가 신문 한 부를 던져놓고 돌아선다. 오후 점심때 집에 도착하니 우체국 택배차가 마당 입구에 멈춰 있고 그는 신문을 들고 있다. 갸우뚱하며 상황을 꿰맞춰 본다. 인력이 부족하여 새벽 배달을 할 수 없었고, 보급소 측에서는 우체국과 배달 계약을 맺었다. 여분의 배달원을 만일의 경우 대비하여 구했다고 치면 신문이 두세 장씩 오는 경우의 수가 충분히 가능하겠다.
그런데도 의문은 남는다. 배달원이나 우체국 중 한 곳과 계약을 해지하면 신문을 두 장씩 보낼 필요 없고, 배달비 인상분으로 구독자에게 부담시킨 비용도 빼줄 수 있지 않겠나. 오천 원 추가 부담을 받아들인 이유가 똑같은 신문을 두 장씩 받고 싶어서는 절대 아니다. 집안에 신문 더미가 빠른 속도로 쌓이는 것도 마뜩잖다. 이곳저곳 확인했다. 보급소에서 우체국이나 배달원과의 계약 취소가 쉽지 않고 자칫 소송에 걸릴 위험도 많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따지지 않기로 했다. 내가 나서 처리할 사안이 아니었다. 이만 원 내고 한 부 받다가 오천 원 더 내고 두 개를 받으니 이익이라 여기면 편한가. 가끔 원 플러스 쓰리니까 좋고? 그래도 생각할수록 괘씸하다. 다른 편에선 손해날 것 없으나 오천 원을 더 낸 내가 기껏 받는 혜택이 고작 내버려야 할 종이 몇 장뿐이라니. 돌아가시기 전 아버지는 신문지를 손바닥 크기로 잘라 변기 옆에 못을 박아 가지런히 걸어두고 밑씻개로 쓰게는 하셨다만.
다섯 달이 지났다. 이른 새벽 오토바이를 타고 온 보급소 아저씨가 첫 신문을 던져놓는다. 늦어도 오후 2~3시쯤 우체부가 또 하나를 우편함에 모셔놓고 간다. 월요일 배달은 네 장내지 심하면 다섯 장, 복잡해서 설명조차 할 수 없다. 보급소, 배달원, 우체국 그리고 나, 모두에게 공정해야 할 법이 나한테만 불리하다는 불만도 덮었다. 다만 오천 원 추가로 얻은 ‘원 플러스 원’은 이제 단호히 사양하련다. 2만 원에 신문 한 부만 달라! 이를 기회로 구독료만 슬그머니 이만 오천 원으로 굳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공염불일 확률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