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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예반장 Oct 21. 2023

사과나무 아래서

   그의 말투가 심드렁했다. 남들은 부러워 안달하는 대기업 임원 자리를 일 년 더 보장받은 친구가, 임원이란 회장님의 한 마디에 목숨이 간당대는 임시직원일 뿐이라고 한탄한다. 험한 경쟁을 견뎌내고 살아남은 것만도 다행인 사람이 일 년 후를 걱정해? 그것도 현직을 떠난 지 오래인 내 앞에서? 아직 배가 부르구나 싶다. 사과나무 아래서 두 남자는 서로 다른 이유로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 푸념이 잘 나간다는 유수 기업의 중역이면서 상위 1% 고액 연봉자의 배부른 타령만은 아니었다. 백세 시대 의학의 발전과 어설픈 고용행정을 그는 싸잡아 욕했다. 최소 십 년은 더 일할 사람을 대놓고 유령인간 취급하는 직원들의 태도에 화나고 머지않아 자기 없이도 조직은 굴러갈 거라는 자괴감에 서글퍼지며 대책 없이 수명만 늘려놓는 의학의 발전이 꼭 필요하냐 물었다. 회사가 자기 등을 밀어낼 마지막 순간까지 꿋꿋하게 버텨볼 뻔뻔함도 비굴함은 이미 바닥났다며 고개를 숙였다.     


   순전히 호기심이었다. 담치기용 쥐똥나무를 사러 가서 계획에도 없던 사과나무 한 그루를 덜렁 싣고 왔다. 할아버지 생전 시골집 안팎엔 밤, 감, 대추나 호두 등 과일나무가 많았는데 유독 사과나무만 없었다. 그게 아쉬웠을까, 한 개 남은 묘목을 떨이로 싸게 주겠다는 화원 주인의 말에 솔깃했다. 평생 쳐다보기만 했던 나무, 이젠 내가 몸소 나무를 심고 거기에 과일이 열리는지를 직접 확인하고 싶은 욕구가 불끈 치솟았다.

   열매까지는 모르겠고 예쁜 꽃 몇 송이쯤이야 설렁설렁 피리라는 기대와 설렘은 반나절을 가지 못했다. 텃밭 한쪽에 땅을 깊게 파고 묘목만 푹 꽂으면 끝날 줄로 여겼던 식목 작업은 생각보다 고달팠다. 어설픈 나의 삽질을 보다 못해 답답했던 윗동네 농사 박사님이 끼어들어 마무리를 해주고는 고수만 아는 비법이라며 초짜에게 넌지시 알려준다. 

   “야아는 약 안치고는 몬먹심니더. 꽃 필 때 쓱 뿌리소. 열매 익을 때면 깨끗할 끼라예.”

열매까지야 바라지도 않고 꽃향기만이라도 맡을 수 있다면 최고지.

   따스한 바람이 꽃과 나무와 풀을 더듬고 찬란한 아침 햇살에 세상이 기지개를 켜던 사월, 초록 잎 뒤덮인 자줏빛 가지 위에 연분홍색 살짝 섞인 꽃봉오리가 얼굴을 내밀었다. 손톱보다 작은 꽃이 새콤달콤 향기를 내뿜었다. 가까이 귀 기울이면 떼 지어 찾아온 꿀벌의 날갯짓이 사이렌 소리처럼 시끄럽다. 꽃에서 꽃으로 꽃만 한 덩치를 부지런히 움직였다. 얌전한 봄비 아래 나무 속 세계는 평화로웠다. 저런 풍경에 농약을 뿌려!     


   장마가 다가왔다. 비바람이 거셌다. 흰 꽃은 꼬랑지만 달랑 남겨놓고 어딘가로 사라졌다. 좁쌀 크기의 꽃눈이 대신 들어섰다. 농약 없이도 애들은 쑥쑥 커갈 거라는 기대가 아둔하다. 숨겨둔 보물을 몰래 들춰보는 기분으로 새벽마다 사과나무 순례를 이어갔다. 그때껏 연초록 물때를 벗지 못한 작은 열매는 얼핏 괜찮아 보였으나 박사님의 훈수대로 때가 되면 무자비한 포식자들의 먹이로 전락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떨치지 못했다. 

   그랬다. 도토리보다도 작은 아기 사과에 벌레가 덮쳤다. 돌돌 말린 사과나무 잎새에 허연 섬유질이 엉겨 붙었다. 젓가락과 핀셋까지 동원하여 벌레를 끄집어내는 나를 우습게 봤던지 내가 잡은 숫자보다 훨씬 많은 벌레가 하루 지나면 또 나타나 여물지 않은 그들을 공격했다. 나무가 멍들어갔다. 벌레도 생명이니 먹고 살아야 한다던 어설픈 자비심은 그 열 배가 넘을 초조함과 복수심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7월 말, 사과는 전멸했다. 한 개도 성한 것 없이.

   봄이 세 번이나 지나고도 사과는 여전히 벌레들의 차지였다. 꽃이 피고 열매가 달려본들 그들이 자라날 잠깐의 틈을 허락하지 않고 사정없이 먹어치웠다. 박사님의 살가운 꾸지람이 반복되었고 그럴수록 농약을 쓰지 않겠다 하는 나의 오기는 더욱더 굳어갔다. 농약도 비료도 없었을 시절, 인간은 어떻게 사과를 키웠을까. 내 것이라기보다 원래 벌레들의 것, 그분들이 드시고 남은 몇 개가 내 몫이라 생각하면 덜 속상할 텐데...  

   

   오랜만에 유령인간이 찾아왔다. 벌레투성이 상한 사과부터 들여다본다. 약 좀 치라는 또 그 소리, 그럴 생각이 없고 어떻게 하는 줄도 모른다고 대충 얼버무렸다.

   “그래도 얘들이 나보다 훨씬 나아. 항상 바라봐주는 ‘너’라도 있으니.”

   “회사에서는 여전히 유령인간이냐?”

유령인간 말고 투명인간으로 바꿔 달라고 정색하며 부탁한다. 그게 존재감이 있어 보인다고 덧붙이면서. 호칭을 바꿔 불렀더니 점심값이 굳었다. 혼자 가서 2인분을 시키면 식당 직원이 이상하게 생각할 거라며 오십 후반 두 애가 사과나무 아래서 낄낄거린다.

   서너 해 지나 다시 봄, 사과꽃이 유난히 많이 피었다. ‘갉아 먹힐 거야’라는 체념과 함께 몇 개쯤은 살아남을 거라는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이른 더위가 시작된 5월 말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오랜 가뭄을 핑계로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사과나무에 열매가 달린 것이다. 무엇보다 벌레가 없었고 크기도 앵두만 했다. 가지치기를 안 해서 잔가지 끝까지 다닥다닥 매달린 모양새가 애처롭기는 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웬만한 자두만큼 굵어졌다.

   그러나 잠잠하던 벌레가 느지막이라도 쳐들어오면 나무는 그들의 천국, 단맛은 덜 해도 벌레 먹기 전에 서둘러 따서 주위 분들에게 자랑 겸 인심이나 듬뿍 써야겠다. 농약 한 방울, 비료 한 줌 주지 않았는데도 아낌없이 꽃과 열매를 내준 나무가 대견하다. 한편으로 아직은 설익은 그들을 바라본다는 호사가 마냥 즐겁지만은 않다. 뭔가 잘못되면 어쩌나 안타까움, 미안함, 걱정과 기대가 교차한다. 주변 많은 사람이 지금까지 우리에게 그랬던 것처럼.     


   지나는 길에 들르시라 박사님한테 연락했다. 탐스러운 아기 사과를 못 본체 그냥 지나칠 참새는 절대로 아닌 분, 동구 밖 연자방앗간 아닌 사과나무 아래서 거품을 문다. 

   “야, 고넘덜 참말로 잘 컸데이. 약 칬구만. 거 보소, 진즉 뿌리삐렸어야제.”

뭔 소리? 박사라고 다 아는 건 아니네. 문득 회장님 눈치 살피기 바쁠 임시직원이 떠올랐다. 핸드폰 뚜껑을 펼쳐 몇 글자 두드린다. 뜰 안 사과나무가 내 친구 투명인간한테 해줄 얘기가 있대요. 미리 축하할게. 밥값 아깝지 않을 얘기야. 언제 올래? 연락 줘. 빠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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