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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긴 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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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H Mar 10. 2022

꽃과 비바람  

도이 노부히로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

흔히들 인생은 꽃다발 같다고 말합니다. 짧은 시간 동안 만개하여 스스로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뽐내지만, 그 시간이 지나면 그간 피워냈던 향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리고 마는. 그리워 하지만 돌아가지 못하는 그때의 추억을 꽃다발에 비유하곤 하지요.


한 사람의 인생에서 피워낼 수 있는 꽃다발의 시간은 가지각색입니다. 학창 시절이 될 수도 있고 어쩌면 노년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이 피워냈던 꽃다발은, 이 영화의 주인공들과 같은 20대 청춘의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영화는 일본의 평범한 대학생으로 생활하는 무기와 키누의 이야기입니다. 우연한 만남, 어색한 데이트, 달달한 연애로 이어지는 풋풋한 사랑 이야기는 지겹다고도 볼 수 있는 이야기이지요. 지금까지 수많은 영화, 드라마들이 이런 시나리오를 따라 만들어졌고 판타지적인 요소들까지 보충되어 관객들의 연애 감정을 만족시켜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다릅니다. 불필요한 소모품들을 사용하지 않고 어떤 영화보다도 현실적으로, 어떤 드라마보다도 가슴 아프게 관객의 감성을 자극합니다.


그렇기에 이 리뷰를 쓰고 있습니다. 다양한 매체들을 통해서 사랑이란 감정의 소모가 범란하고 있는 요즈음, 이 영화만큼이나 담백하게 써내려 나간 작품을 만난 건 오랜만인 것 같아요. 영화의 기억과 제 추억을 비교하며 느낄 수 있던 감정들을 글로 하여금 남기고 싶은 마음이 조금씩 솟아났습니다. 

이제야 스무 살 중반에 들어가고 있는 제가 '추억'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게 맞는 표현일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만큼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감정의 힘이 강하다고 표현하고 싶네요.






1. 20대 초반의 무기와 키누는 그들만이 가지고 있던 낭만을 쫓습니다. 그들의 낭만이란 '본인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삶을 영위하는 것'입니다. 일러스트레이터라는 직업으로 수입을 얻고, 고양이 한 마리의 집사가 되고, 퇴근길엔 커피 한 잔을 들고 퇴근하는. 어쩌면 대다수의 청춘들이 꿈꾸는 삶이죠.

실제로 주인공 커플은 낭만을 지켜 나갑니다. 연애를 시작하기 전 3시간에 달하는 가스탱크 영상을 막연하게 보던 두 사람은, 서로의 몸과 마음에 반해서 당장의 고난은 이겨낼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낭만을 쫓아가는 삶

물론 언제까지나 이렇게 살아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안정된 직장을 구해야 하고 부모님과의 마찰 또한 해결해야 할 크나큰 문제라는 사실. 결혼은 막연히 이루어질 꿈으로 알고 있습니다.

청춘이란 꽃다발 속에 숨어 생활을 지켜냈을 뿐, 그들의 실상은 연약한 꽃 한 송이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2. 그들이 걷던 낭만의 길에는 점점 먹구름이 드리웁니다. 부모님과의 마찰로 인해 생활비는 끊기게 되었고, 일러스트레이터 일은 '너 아니어도 할 사람 많아' 식의 갑질에 아무 대응도 할 수 없습니다.

꽃다발이 조금씩 시들기 시작하는 시간이 오고 나서야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차디찬 현실이 보이기 시작했죠.

나름대로의 책임감을 느끼던 무기는 곧바로 취업에 뛰어들고 상대적으로 여유롭던 키누는 묵묵히 무기를 응원할 뿐, 여전히 아르바이트로 삶을 이어갑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들 사이에 작은 균열이 생기게 됩니다.


여기서 무기와 키누를 이어지게 해 준 매개체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연한 첫 만남 이후에 서로의 말을 틔어주었던 '오시이 마모루' 감독. 또한 수많은 영화, 만화, 문학 등의 '예술'이 그들을 연결해 주는 매개체였습니다.

삶의 방식이 달라진 이들은 문화생활을 즐기는데에 있어서 멀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만큼 낭만과 현실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존재하지요. 처음에는 단순히 연극 한 편을 못 볼지도 모르지만 언젠가부터 퇴근을 혼자 하게 되고, 고양이를 혼자 기르게 되고, 게임을 혼자 즐기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들은 조용히 그들을 짓누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교감 통로가 비틀어진 순간부터 서로의 마음이 조금씩 떨어져 나가기 시작한 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릅니다.



  

3. '예술을 사랑하던 커플이 가지고 있는 꿈과 현실 사이의 고민'이라는 이야기를 보면서 많은 관객들이 영화 '라라 랜드'를 떠올리셨을 겁니다. '라라 랜드'의 미아와 세바스찬의 상황과 '꽃다발~'의 무기와 키누의 상황은 묘하게 닮아있습니다. 특히 그들 각자가 지닌 가치관적 공통점의 묘사가 말입니다.

비슷한 상황속에서 해메는 미아&세바스찬(왼쪽)과 무기&키누(오른쪽)

하지만 위 영화들이 가지고 있는 차이점은 명확히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크게 느껴졌던 건 '라라 랜드'와는 결이 다른, 너무나도 현실적인 갈등 상황 묘사였습니다.

라라 랜드에서 볼 수 있는 갈등은 폭발하는 감정입니다. 조금씩 싸여가던 앙금이 그들 사이에 벽을 만들고, 깜짝 이벤트가 되어야 했을 저녁 식사 시간에 모든 걸 무너트려버리고 맙니다. 천천히 고조되던 감정의 앙금이 폭발하는 순간은 갈등의 절정이었습니다.


반면에 꽃다발~에서 볼 수 있는 갈등은 차갑게 베이는 감정입니다. 작은 균열이 생기는 상황까지는 같아요. 하지만 서로가 마주하는 장면에서 차이가 명확하게 두드려집니다.

감정이 폭발하는 듯한 갈등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서로를 존중하고,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사이이기에 상대방의 감정을 최대한 배려하고 싶은 모습을 보입니다. 너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지만 나의 감정도 이해해 줬으면 좋겠어라고 말하는 듯이.

누군가와 말다툼을 하는 상황이 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성적으로 대화하려고 노력합니다. 상대방에게 상처주기 위해 마구 내뱉지 않죠. 특히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조심하게 됩니다.


이때 관객들은 기억 속에 묻어났던 추억을 뒤돌아 볼 수 있습니다. 영화를 보는 모든 관객들은 이런 경험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살얼음판 같았던 연인과의 갈등. 답답하고 이해할 수 없지만 차마 욕설을 내뱉고 무시할 수는 없었던. 어설펐던 고등학생 때의 추억일 수도 있고 나름 진지했던 대학생 때의 추억일 수도 있겠죠. 이런 갈등들이 쌓이고 쌓여서 어떤 결말을 맞게 되었는지는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 작품은 관객들의 마음속에 남아서 큰 울림을 남길 수 있는 겁니다.

 

  



4. 영화는 그때 그 시절의 사랑 이야기를 제외하고도 감정을 자극하는 다양한 장면들을 비춰줍니다.

위에서 언급했던 일러스트레이터 관련 갑질 장면은 현실의 수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일일 겁니다.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 이것밖에 없기에 하기 싫으면 관둬 식의 갑질 앞에서 저항하지 못합니다.

쳇바퀴와 같은 현실 속에서 지쳐가는 무기

직장에 대한 부담감에 짓눌려 지쳐가는 무기를 위로해 줄 수 있는 건 스마트폰 게임뿐입니다. 업무의 부적응, 연인과의 갈등, 후배의 무시는 끊임없이 무기의 어깨의 짐을 늘려놓고 있는 상황이지만 진심으로 그를 위로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감정의 고립 속에서 길을 잃어가는 무기의 모습은 현대의 많은 직장인들 속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관객들은 이런 장면들을 보며 어떤 감정을 가질까요? 단순한 로맨스물을 예상하고 들어온 극장 안에서 씁쓸한 감정이 되살려지는 상황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관객들도 물론 존재할 겁니다. 하지만 관객들의 감정을 어떤 예술보다도 유려하게 위로해 주던 이 영화만의 연출은, 영화의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만 느낄 수 있는 감정, 오롯이 '영화'라는 매체만이 전달할 수 있는 특유의 감성을 가지게 해 줍니다.     




5. 조금 사담일 수도 있지만, 예술을 사랑하는 관객들을 위한 서비스 같은 장면들도 존재합니다. 위에서 언급했듯 '공각기동대'로 유명한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깜짝 출연으로 시작하여 대만 영화 불후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이 언급되기까지, 스쳐 지나가듯 언급되는 영화들을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하죠.   


영화뿐만 아니라 소설, 음악 등 마니아들의 귀에 익는 다양한 작품들이 언급되지만 다른 부분에 있어서는 문외한이었기에 알고 있던 작품이 몇 없었습니다. 조금만 더 알고 있었다면 '꽃다발~'을 훨씬 더 감미롭게 즐길 수 있었을 거라는 아쉬움과 동시에 감독이 '예술'이란 존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수 있던 부분이었습니다.





6. 이제 이들의 이야기는 어떤 결말을 맞이하게 될까요? 무기와 키누의 진심 어린 대화가 이루어지던 후반부 카페에서의 장면은 영화 전체를 요약해주고 있습니다. 이미 감정의 골이 깊어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 지금과 풋풋한 연애를 시작하던 과거의 이미지가 카페라는 공간 안에서 동시에 비칩니다.

 

그들의 시작과 끝이 만나는 순간. 그 장소

희로애락의 기억 속에서 조금씩 젖어들던 마음은 비단 영화 속 인물들 뿐만이 아닙니다. 영화를 보고 있는 관람객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의 이야기가 매듭지어지는 해 질 녘의 카페에서, 관객들의 추억 여행도 끝나게 됩니다. 무기와 키누의 처음과 끝을 동시에 지켜보면서 관객 스스로의 여행을 끝마치게 되는 셈입니다.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를 보면서, 예전에 써 내려갔던 일기를 다시 읽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글쓴이의 감정이 한 행 한 행에 녹녹히 배어있는 스스로의 일기를 말입니다.

과거에 썼던 일기를 읽어보면서 이미 사라져 버린 추억을 되살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을 때도 있습니다. 절대로 돌아오지 않는 추억에 빠져 우수에 젖는다는 건 한심한 행동이라고도 생각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저는 그렇게만은 느끼지 않습니다. 흔히들 사람은 추억을 먹고 버틴다고 말하잖아요? 화려한 꽃다발 같던 그때의 기억이 어지러운 현실을 극복하게 해주는 매개체가 되어줄지 누가 알겠습니까.


사람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고비와 맞닥트리게 됩니다. 온갖 고비들이 우리를 괴롭히겠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흔하게, 그리고 강하게 만날 수 있는 건 무기와 키누의 이야기처럼 취업의 이야기와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저는 이 영화가 그러한 고비에 지친 스무 살의 청춘들에게 바치는 자그마한 선물이라고 보였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영화관), 생각지도 못한 영화를 통해 위로받은 경험은 처음이었으니까요.      


이 글일 읽고 있는 여러분들도 이런 고비를 맞닥뜨린 적이 있나요? 이미 만난 적이 있다면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나요?   

수많은 청춘들은 이러한 고비에 휘말려 길을 잃지만, 그들은 만개했던 꽃다발 같은 청춘의 기억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또한 그 기억을 버팀목 삼아 이겨낼 수도 있고 이정표 삼아 답을 찾아갈 수도 있습니다.


이제 눈이 쌓이고, 그 아래서 꽃봉오리가 만개를 준비하는 계절이 왔습니다. 지금 당장은 길을 찾을 수 없다고 할지라도 결국 당신의 꽃은 화려하게 피어날 것을 모두가 알고 있기에 너무 좌절하지 말고 차근차근 길을 찾아가기를, 이 영화는 소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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