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40대는 그랬다. 묶여 있는 상황에서 뭔가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려 지옥 같은 시간을 보냈다. 지금 그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는 큰딸이 재작년 여름 친정나들이를 왔을 때
- 요즘 어떻게 지내니
- 엄마, 내가 멈춰 있는 것 같아.
- 그렇지. 지금은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잖아.
- 그래서 그냥 살아요.
그날 이후 그 말은 나를 멍하게 했다. 문득문득 그 말에 걸려 넘어져 가슴이 미어진다. 왜 그 마음을 모르겠는가. 일과 육아, 가사를 도맡아 했던 내가. 지금 되돌아보니 그 나이에는 전쟁을 치르듯 한 순간을 안 놓치려고 안간힘을 다 했지만, 열악한 환경에 열정만 그득해서 현실에 안주하지 못하고 늘 안절부절했다. 뭔가 해야 하는데 앞 뒤를 둘러봐도 틈은 보이지 않고, 머물러 있자니 남들보다 뒤처진 느낌으로 늘 마음을 지옥으로 끌고 갔던 것 같다.
육아와 가사, 일을 병행하면서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총총거려도 늘 그 자리. 열정이 앞서 오만가지 갈등은 나락까지 떨어뜨리고 마음은 콩밭에 가 있지만, 꼼짝달싹 못하고 붙박이로 살아가는 현실이 얼마나 답답하고 우울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외동딸을 둔 맞벌이 학부형이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애쓰지 마라.
40대, 불타는 열정을 추스르고 주어진 그 시간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갈등 없이 애쓰지 말고, 그 순간에 충실하고 감사해라. 금쪽같은 그 시간은 네 딸에게 그 무엇과 바꿀 수 없는 그 무엇으로 채워질 테니. 그 소중함을 잊지 마라. 지금 당장 얼마나 절실한지 가늠해 보고 시도든 도전이든 해라. 무모한 열정은 현실을 혼란스럽고 우울하게 하더구나. 지금 할 수 없거나, 지금 꼭 해야 할 일이 아니면 오늘은 그냥 머물러도 좋다. 그 시간 또한 그만큼 성장해 갈 테니.
지금 생각하면, 왜 그 당시 그렇게 불안했는지, 그렇다고 달라질 것도 없었는데 말이다. 차라리 그날을 내버려 두었어도 괜찮았는데, 오히려 이럴까 저럴까 뭘 해볼까 갈등만 하지 않았어도 주어진 그날을 알차게 보냈을 텐데. 할 수 없는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버겁게 꾸역꾸역 왔더라. 얼마나 어리석게 살아왔는지 이제야 내가 보이더구나. 늘 다른 사람으로 인해 피해 본 듯, 끙끙거리는 동안 내 인생은 그야말로 찌그러져 있더라.
물론 40대는 생애 가장 활발한 시기다. 그만큼 정신적 육체적 왕성한 시기이기도 하고 능률적인 성과를 올릴 수 있는 황금기가 아닐까 싶다만, 일과 삶(육아, 경제, 가족테두리)을 동시다발적으로 지치지 않고 자기 계발을 위한 시간을 원하는 시기인데, 발목을 잡는 걸림돌이 많은 시기와 맞물려 있더라. 그때는 뭔가 해야 할 것 같은 욕구가 강했던 것 같다. 당시는 정답이 하나였다. ‘잘 살아보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거, 지금은 인생에 정답이 없더구나. 애쓰고 산다고 인생이 특별해지는 게 아니더라. 우리네 인생이 거기서 거긴데, 왜 그토록 아등바등 전쟁 치르듯 좋은 나이를 속절없는 열정에 사로잡혀 갈피를 못 잡았던지.
헛헛한 날은 떠나라.
떠나라. 언제든 버거울 때 떠나라. 그렇다고 늘 반복해 오던 일상에 구멍이 나는 것이 아니더라. 일상을 떠나 마음을 비우면 여행에서 또 다른 뭔가가 채워지기 마련이다. 떠나는 마음보다 돌아오는 마음은 뭔가 해보자는 것이 아니라 이제 할 수 있겠다 싶더구나. 마을 여행을 통해 내 삶이 풍요로운 지금 감히 말할 수 있다. 여행은 삶을 말랑말랑하게 나를 다독이더라.
마음이 웅크리고 있을 때 떠나라. 앙금을 쌓지 말고 떠나서 비우고 다시 채워지는 일과 삶의 균형을 여행에서 찾아라. 그리 멀지 않은 곳, 인적이 드문 작은 마을에서 헝클어진 내 마음을 오롯이 빼앗겨 나를 곶추 세우고 힘을 얻고 돌아오게 되더라. 어쩌면 그 나이에 모든 것을 이룰 수 있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을 테지만, 한심하고 무료한 시간들이 또 다른 길을 안내할지도 모른다.
지금이 딱 좋은 나이
살아오는 동안 늘 미안했다. 40대에 열정을 짓누르고 너희들한테 좀 더 여유롭게 다가가서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으면 좋았겠다는 미안함이 문득 떠오를 때마다, 너희들은 오늘 그 아이들과 함께 더불어 행복한 시간을 갈등 없이 보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요즘은 그렇더라. 오늘, 지금이 그렇게 소중할 수가 없더라. 마냥 쉬어가도 좋고, 친구를 만나서 촉촉한 수다를 하는 날은 더 좋고, 문화강좌나 영화 한 편을 보고 들어오는 날은 더욱 좋더라. 그러면서도 내일, 미래의 시간을 촘촘히 기록하지 않아도 마음이 불편하지 않는 걸 보면 지금이 딱 좋은 나이로구나.
내 나이 40대는 하루를 준비하는 분주한 새벽을 열고 종일 일에 지친 심신을 쉴 틈 없이 긴장 속에서 일과를 마무리하는 시간이 대중이 없이 대부분은 자정을 넘겨서야 한 시름 놓았다. 매일이 허송세월을 보낸 듯 헛헛했던 날들은 내 안에 나를 위한 뭔가가 도사리고 있어서였던 것 같다. 그 뭔가는 불가항력의 나였는데도 말이다. ‘피 할 수 없으면 즐겨라’는 말이 그런 까닭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니,
40대 언저리에 있는 딸들아, 애쓰지 말고 주어진 오늘에 감사한 마음이면 그 나이가 딱 좋은 나이다. 지금이 딱 좋은 나이는 그날그날이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