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이 좋은 이유
부산은 첫사랑 같은 도시다.
신중년이 되어 단순해진 일상이 지겨운 날은 바다로 간다. 처음에는 부산이 바다가 있어서 좋은 줄 알았다. 살다 보니 사계절이 덜 춥고, 덜 덥고 밤낮없이 외출할 수 있어서 좋았다. 고만고만한 사람들이 살아가기에 무난한 환경이라 더욱 좋았다. 나이를 더해 가면서 부산에서 살아온 날이 고향에서 살아온 날보다 더 많아지면서 고향이 낯설고, 부산이 익숙해서 부산이 좋아졌다. 특히, 요즘은 기장 해안로를 따라 대형카페가 문을 열면서 카페에 머무는 일상 또한 부산이 좋은 이유다.
낯섦
처음은 산과 들판을 보고 자라서인지 바다가 있는 부산이 낯설었다. 부산은 타향에서 철새가 날아들 듯 어느 날 찾아온 나를 감싸 안고 40여 년을 품고 설레게 한다. 스물여섯 해 2월, 결혼 전까지 부모 슬하에서 살았다. 중매결혼으로 만난 남편과는 서먹해서 이방인처럼 겉돌았다. 남천동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신혼이지만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남천동과 광안리의 경계인 도로를 따라 10분 거리에 광안리해수욕장이 있어서 외출준비 없이 편하게 다녀올 수 있었다. 부산에 온 지 한 달이 지났을 즈음 광안리해수욕장으로 내려갔다. 멀리서 온 여행자처럼 신발을 벗고 모래사장을 걸었다. 다음에 갔을 때는 바다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그다음에는 넘실거리는 파도를 바라봤다. 바다는 이방인에게 다가왔다. 바다는 은빛 금빛 물결로 보드랍게 낯선 이의 마음을 다독였다, 부산도 살만한 도시라고. 그렇게 부산의 첫 바다는 새댁에게 첫사랑이 되었다. 지금도 그곳에 가면 한산했던 광안리 바다의 잔잔한 파도를 기억하며 자그마했던 그 바다를 겹쳐보곤 한다.
그리움
2년 남짓 광안리해수욕장을 벗 삼아 친숙해질 때쯤 동래로 이사를 하게 되자 바다는 멀어졌다. 당시만 해도 자가용이 없고 동래에서 광안리까지 거리는 멀게 느껴지는 현실 앞에서 광안리해수욕장은 일상에서 사라졌다. 남천동 대궐 같은 멋진 테라스가 있는 2층 단독 신혼집에서 동래 온천장 꼭대기 단칸방에 내버려진 초라한 삶이 시작되었다. 공무원이자 야간대학생인 남편의 외벌이로 3년을 채 버티지 못하고 신혼이랄 것도 없이 결혼생활은 날로 궁색해졌다. 안간힘을 다했지만 1살, 3살 두 아이의 육아로 손발이 묶인 채로 견뎌야 했다. 낯설었던 부산은 새댁이라는 호칭마저 무색하게 두 아이의 엄마로 현실에 주저앉혀 허덕이게 했다. 이후 몇 년을 바다는 그리움만 남기고 삶에 지쳐 시들어가고 있을 때, 다시 해운대 신시가지로 집을 옮기면서 바다와 다시 만났다. 광안리 바다와 해운대 바다는 품이 달랐다. 광안리 바다는 작지만 따뜻했다. 해운대 바다는 이미 온도가 달라졌다. 수많은 사람을 품고 있어 반가운 기색조차 하지 않았다.
또 다른 즐거움
해운대 해수욕장에는 어쩌다 나들이를 간다. 아무래도 첫 바다가 좋아서 정을 붙이지 못한 까닭이다. 그러다 7년 전 아침이 좋은 도시 기장으로 이사를 왔다. 기장의 바다는 또 다른 즐거움을 준다. 누군가 첫사랑은 다른 사랑으로 채워야 한다고 했듯이 첫 바다가 멀어져 간 이후, 가까워진 또 다른 바다에 지극정성을 다 한다. 아침에는 아침 바다가 좋아서, 비가 오면 비 오는 바다가 좋아서, 바람 불면 파도가 좋아서 바다로 간다. 기장의 바다는 심심한 신중년을 부산하게 한다. 아침 산책을 하는 날은 공수항 끄트머리 작은 동그라미 해변에서 시작해 공수항의 파도 소리에 이끌려 물양장까지 걷다가 자연스럽게 아침 7시 공수마을 입구 스타벅스로 들어간다. 바닥까지 가라앉는 날은 윤선도의 한이 서린 죽성리 두호항으로 달려간다. 드림성당에서 어사암바위를 거쳐 두호마을 수호신 · 죽성리 해송의 자태를 올려다본다. 나라 사랑 죽성교회의 십자가에 눈이 꽂힌다. 역사의 흔적을 따라 걷는다. 아무리 내 삶이 팍팍한들 ‘고산 윤선도 선생에 비하랴’ 하고 마음을 고쳐먹는다. 또 어느 날은 일광 바다에서 오영수 작가의 흔적을 따라 이천리까지 걷는다. 삼삼오오 모임이 있는 날은 붕장어가 유명한 칠암항으로 간다. 그렇게 부산은 돈에 대한 기준도, 사람에 대한 경계도 없었던 나를 할퀴고, 오랜 세월 동안 쪼그라든 채로 부산을 견디게 하더니, 예순을 넘기자 시들어가는 오래된 새댁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낯선 도시, 남천동에서 2년간의 추억은 40년을 사는 내내 첫사랑처럼 설레고, 그리운 바다로 남았다. 가끔은 광안리 밤바다를 찾아간다. 지금은 세계적인 관광지가 된 광안대교의 화려한 조명과 레이저쇼까지 더해 광안리해수욕장은 처음 만난 바다가 아니듯, 철부지였던 새댁 또한 삶의 파노라마를 펼치며 다채롭던 일상을 살아내고 예순 언저리에 와서야 그나마 삶이 단순해졌다.
아낌없는 사랑
지금은 40년의 추억과 넘실대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좋은 사람들과 함께 속닥거리는 일상 또한 부산이 좋은 이유다. 게다가 동해 해안로를 따라 즐비하게 들어선 대형카페를 여행하듯 찾아다니며, 사람과 커피와 이야기가 있는 공간의 위로는 빼놓을 수 없는 부산의 매력이다. 그 공간에서 신중년은 오늘의 여백을 채운다.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지만, 또 다른 바다를 만나 아낌없는 사랑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부산이 좋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