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과 현실의 거리
아마도 내가 8살, 티비가 브라운관이던 시절. 명절 특선으로 미국 영화가 방영되고 있었다. 한국말로 더빙되어있어도 잘 모르겠는 이야기와 파티 장면들이 드문드문 기억난다. 여자 주인공은 밖으로 나와 어떤 신사가 덮어준 재킷을 걸치고서 벽에 기대었다.
어린 나에게 두 가지가 눈에 띄었다. 입김이 나도록 추운데 여주인공은 왜 재킷을 어깨에만 걸치고 있는가. 그리고 그녀의 조그마한 체구의 두배는 충분히 되는 정장 재킷.
30대의 나는 재킷을 멋지게 소화할 ‘크리스 헴스워드’나 ‘브래들리 쿠퍼’를 상상하겠지. 그리고 그 옷의 주인이 누군지 알기 위해서라도 영화를 계속 볼 것이다. 하지만 어린이였던 나는 잘생긴 남자 배우에게 관심이 없었다. 다만 ‘아 나중에 크면 어른들은 저런 파티를 하는 모양이군!’ 하고 환상을 가졌다. 화려함이란 본능처럼 끌리는 거니까.
살면서 참 많은 환상을 갖고 살았는데 현실은 환상을 깨는 일의 연속이었다. 화려한 삶을 사는 일은 불가능하니 포기하자는 패배주의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현실 속 내가 맞이할 어른의 모습은 내 옆에 팔을 괴고 누워서 같이 티비를 보던 아빠랑 더 가까웠다는 걸 몰랐을 뿐. 그 중요한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탓에 나는 무척 우울하고 방황하는 20대를 살았다.
살고 싶은 미래의 삶을 그려보는 일. 영원히 채워지지 않을지도 모를 두 시간의 간극을 참 많은 감정으로 채웠다. 이 간극은 우울의 크기만큼 멀게 느껴졌다. 어떤 날은 우울이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 같아서 공포와 불안에 떨기도 했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미래를 상상하는 일에 내 하루의 꽤나 긴 시간을 쓰고 있다. 그러나 공상의 시간을 갖는 일에 20대 때와 큰 차이가 있다. 이제 나는 내가 서있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는 것. 웃프게도 내가 어디에 있는지 인정하고 나니 어디로 가고 싶은지, 또 어찌 갈지 길이 더 선명히 보이기 시작했다. 우울의 바다에서 여전히 발이 땅에 닿지 않지만, 가라앉지 않고 헤엄칠 수 있게 되었다. 길을 찾아 나아가는 것은 나의 몫이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인가? 누구나 아는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해서, 내가 나를 너무 오래 괴롭혔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다. 나는 잘하고 있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나는 환상을 등대 삼아 한걸음 한걸음 살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