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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랜덤초이 Feb 15. 2024

눈 오르는 교실

다운패딩은 추운 겨울이면 온 국민의 필수 방한 의복이다. 


오리 또는 거위의 솜털과 깃털을 섞어 충전한 다운패딩은 가볍고 보온성도 높아서 다른 어떤 소재를 압도하는 인기 방한의류로 자리 잡았다.


겨울철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사람들을 둘러보면 십중팔구 다운패딩을 입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멋을 위해 일부러 모직 코트를 챙겨 입는 사람들조차 얼죽코(얼어 죽어도 코트)란 말을 할 정도이니, 방한능력에서 만큼은 다운패딩이 원탑이란 점이 분명하다.


이렇게 모두가 즐겨 입는 다운패딩이 내가 어릴 적에는 전혀 흔한 옷이 아니었다.

우리 집의 경우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었을 무렵에야 아버지를 위해 덕다운 패딩을 처음 샀던 것 같고, 패딩이 포멀(formal)한 느낌은 아니었어서 직장인들도 많이 입고 다니지는 않는 것 같았다.


당시로서는 꽤나 비쌌던 가격 때문에 학생이 다운패딩을 입는 사례가 드물었고, 대부분의 경우 다운 소재가 아니라 폴리에스테르나 아크릴 같은 합성소재가 충전된 방한복을 입고 다니곤 했다.


중학생이 되어서야 소위 있는 집 자식들이 하나 둘 다운패딩을 입고 다녔는데, 어느새 특정 브랜드의 패딩이 등골브레이커라는 말을 들으며 학생들의 필수품이 된 걸 보면 우리들 삶이 당시에 비해선 꽤나 풍족해진 것 같다.


나는 요즘처럼 빵빵한 다운패딩을 입고 다닐 때면 가끔 중학교 시절 경험했던 교실의 한 장면이 생각난다.


당시의 교실은 지금처럼 난방이 잘 되지 않았고 교실 중앙에 난로를 두어 갈탄을 태우던 시대였다. 

반마다 당번을 정해 아침이면 학교 뒤편 창고에서 갈탄을 배급받아와서 난로에 불을 지폈다.


난로에 가까울수록 따뜻한 기운을 느낄 수 있지만 구석 자리로 가면 한기를 느낄 수밖에 없었고 그 때문에 같은 교실 안에서도 누구는 외투를 벗고 있고 누구는 항상 외투를 입고 있어야 하는 환경이었다.

나는 키 순서로 정해지는 자리 때문에 늘 뒷자리에 앉아 외투를 입고 공부하는데, 우리 반 상우라는 친구는 중간 키의 혜택으로 난로 주변에 앉을 기회가 많았다.


내가 기억하는 그날은 상우가 난로를 바로 뒤에 두고 교탁을 바라보는 자리에 앉게 된 날이었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밝게 비쳐 들어오는 오후의 햇살 때문에 선생님 목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리던 5교시에 있었던 일이다. 


난로 위에는 주전자의 물이 끓고 있었고 선생님은 칠판에 글을 쓰고 계셨는데, 갑자기 교실 뒤쪽에 앉아 있던 아이들이 "와아 ~~~" 하고 환호성을 질렀다. 

아이들의 눈이 향한 곳에는 마치 영화 ‘웰컴 투 동막골’에서 수류탄 때문에 팝콘이 터지던 장면처럼 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하얀 눈이 올라가고 있었다.  오리털이 날아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상우가 더워서 벗어 의자에 걸쳐놓은 다운패딩 등판이 난로의 열기에 녹아버렸고, 뜨거운 난로의 열기가 상승기류가 되어 옷에서 빠져나온 다운볼들을 위로 날린 것이었다.

뒤돌아 상황을 파악한 상우는 깜짝 놀라 옷을 챙겼지만 이미 수습하기 어려운 상황이었고 급우들의 한바탕 웃음 뒤에는 상우의 걱정 어린 얼굴이 겹쳐 보였다.


친구들은 상우의 속도 모르고 저마다 손을 뻗쳐 오리털을 잡아 옷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이제 자기 옷도 ‘오리털 파카’라고 재미있어하기도 했었다.



수십 년이 지난 일이 머릿속에 그대로 그려지는 것은 하얀 다운볼이 교실에 휘날려 오르는 모습이 꽤나 시각적인 임팩트가 있었던 때문인 것 같고, 한편으로는 상우가 이제 집에 가면 얼마나 혼나게 될까 생각했던 게 마치 나의 일처럼 심각하게 느껴졌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상우가 당시의 일을 어떻게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그 광경을 마치 비현실적 판타지처럼 재미있고 유쾌하게 기억하는 나 같은 친구도 있으니, 당시의 기억을 너무 나쁘게만 기억하고 있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덕분에 우리 반 친구들은 다운패딩에 얼마나 많은 오리털이 들어있는지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체험 학습의 기회도 되었으니, 지금처럼 추운 날씨에 패딩을 꺼내 입을 때면 오리와 거위들에게 더욱 특별한 고마움을 느끼며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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