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습니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연설로 익숙한 위 문장은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어 극심한 갈등을 겪고 있는 국민들에게 단합을 호소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단합의 대척점에 죽음이라는 극단적 결과를 대입하여, 단합의 중요성을 극적으로 강조하는 표현이다.
이렇게 특정한 주장을 강조하기 위해 그렇지 않으면 죽음이라는 결과와 비교하는 표현은 역사 속에서 종종 활용되어 왔다.
미국의 100달러 지폐에 등장하는 '벤저민 프랭클린'은 미국 '건국의 아버지(Founding fathers)' 중 한 명이자, 번개가 가진 전기적 성질을 증명한 '연날리기 실험'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의 연설보다도 2백여 년쯤 전에, 그가 발행하던 펜실베이니아 가제트紙에 아래와 같은 유명한 만평을 남겼다.
“Join, or Die (뭉치지 않으면 죽는다)”
단합을 호소한 목적은 식민주의 주민들에게 함께 연대하여 프랑스-인디언에 맞서 이기자는 취지를 담았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의 단합은 이후 미국 독립전쟁으로 이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8개 토막으로 잘린 뱀의 이미지는 단합하지 못할 때 이어질 죽음의 결과를 강렬한 시각적 이미지로 전달했고, 위 만평은 미국 역사 속 최초의 정치적 만평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역시 미국 '건국의 아버지(Founding fathers)' 중 한 명인 패트릭 헨리도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하며 죽음과 대비하여 자유를 주장한 바 있다.
“Give me liberty, or give me death!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이렇듯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간절히 호소하거나 주장할 때, 'A 아니면 죽음(A or Death)'이라는 표현이 자주 활용되는 건 아마도 죽음이라는 것이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결과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누군가 죽음을 언급하며 주장을 펼칠 때는 간절함이나 절박함이 묻어나고, 때론 비장함 마저 느껴지고는 한다.
앞서의 예시에서 '죽음(Death)'이라는 극단적 상황과 비교하여 지키려 하는 것은 '국가의 안정', '승리를 위한 단합', 그리고 '자유'라고 하는 숭고한 가치였다.
그래서 이런 연설이나 만평이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의미 있게 기억되고 평가받는 것이리라.
하지만 어느새 우리들은 죽음이라는 옵션을 너무 쉽게 입에 단 채 살고 있다.
"힘들어 죽겠네", "더워 죽겠네", "졸려 죽겠네", "배불러 죽겠네"...
이렇게 죽음이라는 단어가 가볍게 사용된다면 그와 비교되는 숭고한 가치들 마저 하찮게 여겨질까 걱정스럽기도 하다.
게다가 어떤 경우 죽음이라는 경고는 '우리'라는 공동체를 향하지 않고, 특정한 '상대방'에게 한정하여 전달되기도 한다.
즉 "이렇게 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나와는 아무런 상관없지만) 당신은 죽습니다."라고 말하는 셈이다.
결국 그런 얘기라면 "내 말대로 하지 않으면, 넌 죽어"라는 의미와 다를 바가 없다.
문장의 순서만 바꿔 말한다면 "죽기 싫으면 내편이 돼라/ 내 말대로 해라"라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요즘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는 진영 간 갈등을 보고 있자면 진짜 이런 얘기를 듣는 것 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
"우리 편이면 우리말만 믿어라"라는 식의 정치는 "다른 편이면 죽어라"라고 말하는 것과 달라 보이지 않는다.
결국 안전하기 위해서는 한배에 탄 운명공동체가 될 것을 강요받는 사회
전체주의를 만들어가려는 갈등은 "죽기 싫으면 내 편이 돼라 (Die, or Join)"는 말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역사 속에 남은 선인의 지혜를 다시 되새겨본다.
'죽음'을 앞에 두는 소통보다는 그만큼이나 중요한 '목표와 가치'를 앞에 두어 이야기하는 게 자연스럽다.
Join, or Die ----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