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서(秩序)'는 '혼란 없이 순조롭게 이루어지게 하는 사물의 순서나 차례'를 의미한다.
유사한 뜻을 가진 단어로는 규율(規律), 기율(紀律)이 있고, 반대의 뜻을 갖는 단어로는 혼란(混亂)이 있다.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사는 사회에서 '질서'는 매우 중요한 가치이다.
만약 우리가 사는 사회에 아무런 질서나 규율이 없다고 상상해 보자면 그런 상황은 끔찍할 것이 분명하다.
가족과 식사를 하기 위해 유명한 식당 앞에 줄지어 서있는데, 험한 인상의 싸움꾼 같은 사람들이 새치기를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만삭의 임산부가 지하철의 전용석을 이용하려는데, 젊고 건장한 청년이 자리를 비켜주지 않으면 어떡할까?
합의된 사회적 질서에 익숙한 곳이라면 그런 시비가 생길 리도 애초에 없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회에선 참고 피하거나 싸우거나 선택을 강요받게 될 것이다.
아주 조금만 상상해 봐도 질서 없는 사회를 살아가는 건 힘든 일일 수밖에 없다.
특히 사회적 약자들에게는 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유튜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외국인들의 한국 여행 브이로그에서는 그들이 한국의 밤거리가 안전한 것에 놀라는 것을 자주 보게 된다.
우리가 당연하게 느끼는 질서가 그들에게는 얼마나 생소하고 또 놀라운 지를 새삼 체감하게 되는 장면이다.
반면에 나는 '90년대 중반 유럽 배낭여행에서 겪었던 인상 깊은 일이 있었다.
독일 그리고 스위스에서도 경험한 일인데, 정류장의 승객들이 올라타고도 버스가 한참을 출발하지 않는 것이었다.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답답해지려는 찰나, 멀리서 할머니들이 천천히 걸어와 버스에 타셨다.
기사분께서는 거동이 불편한 노인분들을 태우기 위해 정류장을 출발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기사분은 할머니들이 버스에 오르고서도 자리에 안전하게 착석하시는지를 확인한 후에야 운행을 시작했다.
물론 지금은 우리나라의 버스도 친절한 기사분들을 자주 볼 수 있지만, 90년대의 서울 버스와 비교하면 이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버스를 타려고 손을 들고 뛰어오는 승객을 보고도 마치 따돌리려는 듯 출발하는 버스도 많았고, 승객이 자리에 앉건 말건 무조건 출발 액셀을 밟는 게 일상이었다.
그 과정에 힘없는 노약자가 휘청이고 넘어지는 모습을 본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도 장애인의 이동권에 대해서는 우리나라가 다른 서구 선진국에 비해 인식과 그 기준이 낮은 편인 것 같다.
아마도 효율을 강조하는 사회적 질서 속에서 마이너리티, 약자에 대한 배려는 뒤로 밀리는 경우가 빈번한 것이다.
결국 곰곰이 생각해 보자면 질서라는 건 그 자체로 완벽한 가치일 수 없다.
질서나 규율은 어떤 일에 우선순위를 두느냐에 따라 커버하는 범위가 달라진다.
그렇게 형성된 사회적 질서에 순응할 수 있을 때는 그런 질서의 혜택을 보고 살 수 있지만, 그 예외의 경우에 해당되게 된다면 질서는 오히려 약자들을 질서의 혜택에서 배제시키는 결과로 작용하게 된다.
최근에 병원에서 재활 중이신 어머니를 대리해 몇 군데 은행일을 봐야 할 일이 있었다.
휠체어로만 이동이 가능한 상황에서 최소한의 동선으로 필요한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아들이 대리인으로 처리하는 방식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미리 은행에 연락해서 가족이 대리인으로 방문할 때 필요한 서류들을 확인했고, 대리인 방문에 필요한 위임장에는 인감도장을 날인하고 명의자 본인이 직접 발급받은 인감증명서가 필요한 것을 알게 되었다.
다행히 병원과 주민센터는 가까이 위치해 있어서 조금 힘들었지만 무사하게 어머니를 모시고 인감증명서를 뗄 수 있었다.
하지만 은행에 방문하자 상황은 또 다르게 전개되었다.
가족관계증명서에 주민번호 뒷자리가 표시되어 있지 않으니 다시 서류를 준비해서 와라.
다시 서류를 준비해서 가니, 서류를 갖춘 것과 무관하게 명의자 본인과 직접 확인해야 한다며 업무처리를 지연했다.
은행 내부 규정에 따르면 고객에게 안내된 내용보다도 훨씬 철저한 신원 확인이 필요하다는 이유였다.
어려워하는 기색을 내비치자 은행에서는 그러니까 명의자를 모셔오시면 편하다고 얘기했지만, 내가 편하자고 어머니를 힘들게 하란 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일부러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사람의 입장은 고려하지 않는다고 느껴질 뿐이었다.
처음부터 제대로 안내되었으면 그나마 괜찮았겠지만 안내된 규정대로 준비를 했어도 또 다른 내부규정을 들이대며 거동이 불편하신 부모님을 다시 모셔오라는 소리에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나 역시 직장인으로서 회사의 규정을 내세우는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었지만,
처음부터 필요한 모든 일을 안내하지 않고서는 하나씩 하나씩 추가적인 보완 기준을 요구하는 것은 거동이 불편한 환자의 가족에게 가혹한 일이었다.
질서나 규율 같은 것들은 보통 빈번히 일어나고 많은 사람들과 관계된 일에 대해 정의되어 있다.
그러나 예외적인 일이거나 가끔씩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그런 상황을 가정하여 충분히 꼼꼼하게 정의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많은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경우를 마주했을 때, 질서를 강조하면서 사전 정의된 질서를 따르기 어려운 사람들을 몰아세우는 것은 폭력과 다를 바 없다.
최저임금 인상과 주 52시간 근무제의 도입으로 인건비 부담이 커지자, 요즘 대부분의 식당에 가면 키오스크가 자리를 잡고 있다. 뿐만 아니라 테이블 오더를 위해 태블릿이 비치된 곳도 많다.
스마트 디바이스에 익숙한 젊은 사람들에게는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여지는 뉴노멀이지만, 나이 많으신 분들에게는 키오스크가 새로운 장벽처럼 느껴지게 마련이다.
AI 붐과 함께 도입되고 있는 AI 상담사도 역시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다.
새로운 질서가 필요하더라도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수용 역량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지만, 세상은 다수의 편에서만 질서를 만들고 강요한다.
때문에 소통을 통해 설명과 이해를 필요로 하는 노인분들은 디지털 장벽으로 인해 더욱 빠르게 세상과 단절되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질서는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분명히 필요한 가치이다.
하지만 질서를 강요하면서 질서에서 소외되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면, 그런 질서는 폭력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한번 정해진 질서라고 영원한 것일 수는 없다. 또 누구나 언제든 질서와 규율의 경계 밖에 위치하게 될 수 있다는 점을 상기하자.
그러니 질서를 적용하고 강요하는 데는 반드시 배려와 융통성이 함께 작동되기를 바란다.
그게 지금의 갈등 깊은 사회를 보다 성숙하게 변화시키는 방식이 아닐까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