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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랜덤초이 Sep 28. 2024

나는 어떤 사람일까

초/중/고등학교 학생 시절,

등교하면서 가장 자주 듣는 얘기는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라’는 얘기였다. 


그런데 대학생이 되고 처음 생소하게 느꼈던 것은 담임 선생님의 부재(不在)였다.

선생님 말씀을 잘 듣고 싶어도 담임 선생님이 안 계시니 누구 얘기를 들어야 할지 모르겠었다.


담임 선생님께서 알려주시던 시간표가 없으니 스스로 수업을 선택해 수강신청을 해야 했다. 

앉아서 기다리면 선생님들이 오시는 게 아니라, 여기저기 흩어진 강의실을 스스로 찾아다니는 시스템은 영 적응하기 힘들었다. 

게다가 조회나 종례시간도 없다 보니, 궁금한 게 있어도 누구에게 어떻게 물어봐야 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알음알음 동기나 선배들에게 물어봐서 적응해 갔지만, 내가 하는 선택이 맞는 것인지 혹시 더 나은 선택은 없는 것인지에 대해 확신이 들지 않을 때도 많았다.


자유로운 환경에서 자율적으로 생활하는 건 생각만큼 쉽고 편하지 않았고 즐겁기만 한 일도 아니었다.

오히려 때로는 누군가 나를 가이드해 주거나 통제해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시키는 대로 생활하는 게 편한 사람인가 싶었다.



그래도 어찌어찌 자율적인 생활에 조금씩 익숙해져 갈 무렵 군대에 입대했다.


모두가 알다시피 군대라는 곳은 자율과는 가장 먼 성격의 사회이다. 

초/중/고등학교 보다도 훨씬 통제된 상황 속에서 지시에 복종하고 정해진 규율에 맞춰 생활해야 했다.


심지어 공식적인 군율 말고도 사병들 간의 암묵적 규율까지 있다 보니, 군생활 시절은 살면서 경험해 본 가장 타율적인 삶을 경험하는 시기였다.


밥 먹으러 가는 길에도 인원 확인 후 줄 서서 발맞춰 이동했고, 정해진 시간이면 불을 끄고 다 같이 잠을 자야 하는 것도 영 어색한 방식이었다.


그렇게 강한 통제 속에서 생활하다 보니 나는 시키는 대로 하는 게 편한 사람이 아니란 걸 알게 되었다.

오히려 군대에서 나는 시키는 대로 생활하는 죽어라고 싫은 자유로움을 동경하는 사람이었다.




자유가 주어지면 통제가 그립고, 통제가 강해지면 일탈을 추구하게 되는 건 

마치 여름이 되면 겨울을, 겨울이 되면 다시 여름을 견딜만하다고 느끼는 것과 같았다.


적당하게 봄과 가을 같은 날씨가 이어지면 좋으련만 우리나라의 사계절은 이상하리 만치 여름과 겨울의 지분이 높다. 예전엔 이 정도로 심했던 것 같지 않았는데 정치적 양극화처럼 계절의 양극화도 지긋지긋하게 삶을 괴롭히고 있다.


양극으로 느껴지는 계절처럼 내게 주어지는 자율의 정도마저도 적당히가 없다고 느껴지곤 한다.

무작정 자율이 주어져도 불안하고 조금만 참견해도 답답하니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모를 때가 많았다.



회사라는 조직은 참 재미난 부분이 있다.

주인의식을 갖고 자율적으로 열심히 일하라고 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조직이 커지고 관료화되어 갈수록 정해진 원칙과 기준, 절차에 따라 일하라고 강요받기도 한다.

어떤 상사는 나에게 생각은 하지 말고 본인만 믿고 따라와 달라고 하고 

어떤 상사는 나에게 알아서 잘해달라고 자율과 함께 책임까지 미룬다.

 

그래서인지 나는 아직도 내가 어떤 환경에서 더 편안하게 일할 수 있는 사람인지를 알지 못한다.


분명히 나는 내가 스스로의 자유의지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일해왔다.

그리고 그렇게 일한 결과로써 나름의 성취를 경험하며 살았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옳고 그름의 기준이 누군가에게는 이익과 손해의 기준에서 다르게 판단될 수 있다는 걸 경험한 후로는 자율이 다 무슨 소용이냐 그냥 시키는 대로 하고 살자는 자포자기적인 생각이 들기도 했다.


자율이란 허울 뒤에서 교묘하게 다른 사람을 통제하고 이용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세상이다.


나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그냥 시키는 대로 하고 생각 없이 살면 편하다고 한다.

괜히 깊게 생각하고 스트레스받지 말라고도 한다.

나 역시 초등학생이라면 선생님만 믿고 그렇게 살아도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의중을 고민하여 타인의 이익을 살피는 식으로 자율적으로 행동하라는 것은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나는 나를 걱정하는 사람들의 충고를 이해하려 해도 아직은 몸이 그렇게 움직여지지 않는다.

요즘은 덥고 길었던 여름이 지나가면서 앞으로 다가올 추운 겨울을 걱정하기 전까지 짧은 청량함을 느끼고 있다. 

직장에서 겪고 있는 길고 긴 고민의 시간도 계절 가듯 지나가며 잠시나마 청량함이 찾아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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