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랜덤초이 Nov 07. 2024

정녕 태평성대란 말인가

요즘 1950년대 '여성 국극'을 소재로 한 드라마 '정년이'를 보고 있다.


평소 믿고 보는 배우였던 '김태리'가 주연을 맡은 드라마라 관심을 갖고 찾아봤지만, 

나에겐 사실 '여성 국극'이란 소재가 매우 생소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창이나 판소리 혹은 마당놀이라면 TV에서 몇 차례 본 기억이 있었지만, 여성 국극은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도 도무지 본 기억이 없어서다.


익숙하지 않은 공연예술 장르를 소재로 한 드라마라서, 혹시 작품 몰입이 어렵지 않을까 생각도 들었지만 그건 내 기우에 불과했다.

당시의 시대와 공간을 아름답게 재현한 화면 구성과 출연 배우들의 열연 때문인지, 나는 정신없이 드라마에 빠져 몰입하고 있다.

처음 보게 된 '국극'의 장면 역시 현대의 뮤지컬 못지않은 몰입감을 자아냈다.




드라마 '정년이'에는 국극 공연 '자명고'가 자주 등장한다.

'자명고'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흔히들 기억하는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이야기가 모티브가 된 작품이다. 

주인공 정년이가 난생처음 극장에서 보게 되는 공연이 바로 '자명고'였다.


'자명고' 공연 중 매란국극단의 스타 문옥경이 나오는 장면은 삼십여 년 전 본 '패왕별희'의 이미지를 연상시키기도 했다. (※ 남성만 출연하던 중국의 경극과 여성만 공연에 참여하던 우리의 여성 국극은 배우의 성별 구성이 정반대이지만, 성역할을 바꾼 중성적 이미지의 배우가 등장한다는 점에선 유사한 면이 있다.)  


자명고의 하이라이트로 소개되는 장면은 호동왕자 역을 맡은 문옥경이 시종(侍從)의 말에 정색하고 자신의 생각을 노래하는 장면이었다.


[시종]  아이들이 노래를 부르는구나. 참으로 흥겹도다.

          하 이것이 다 우리 전하의 은덕 덕분이 아닌가.  하하하 하하하.

[호동]  (못마땅한 듯) 핫!

[시종]  아니 왜 그러십니까? 왕자님

[호동]  정녕 태평성대인가?

          위에서는 한나라가 들이쳐오고 동에서는 낙랑국 견제해 오니 내 나라 신세 가련 타.

          (♬ 노래 ♩♪~~)

          (단호하게) 이 어찌 태평성대란 말인가?



비분강개(悲憤慷慨)한 표정으로 자신의 생각을 노래하는 호동의 모습에서는 '죽느냐 사느냐'를 고민하는 햄릿의 독백이 겹쳐 보였다. 


그리고 윗사람에게 이야기하는 잘 포장된 좋은 소리를 듣지 않고, 자신의 안목과 이유를 힘주어 설명하는 모습에서는 지금의 리더들에게도 바라는 멋진 리더의 모습이 느껴지기도 했다.




사실 높은 자리에 있는 리더의 주변에서 직언(直言)을 하는 사람을 찾기는 참 힘들다.

대개는 듣기 좋은 말만 하려들 노력하고, 직언이 꼭 필요한 경우에도 뉘앙스를 조심해 가며 윗사람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노력을 하게 된다.


용기 내어 직언을 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런 사람들의 말로(末路)가 그리 괜찮아 보이지 않기 때문에,

결국은 상사의 기분을 살펴 듣기 좋은 말만 하는 것이 많은 조직에서 생존을 위한 Best Practice로 취급받게 된 것이다. 


하지만 조직이 안정된 발전을 지속하려면 누가 뭐래도 제대로 된 상황판단과 이에 바탕한 의사결정이 필요한 점은 분명하다.


리더가 아부(阿附)를 위해 포장된 진실에만 귀를 기울이면, 조직의 문화는 점점 더 그런 포장된 사실을 경쟁하는 문화로 공고해진다. 


모두들 상사가 가진 의중과 기분만 살피면서 스스로는 판단을 위한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다면, 나치의 전체주의가 보여줬던 광기(狂氣)도 다시 나타나지 말란 법이 없을 것이다. 


리더가 일부러 잘못된 생각을 하지는 않더라도, 무관심 / 무지 / 무능 그 어떤 이유로건 간에 리더가 가진 한계 안에 조직 전체를 가둬버리는 결과가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주인공 호동 왕자가 시종의 말을 듣고 불쾌해하며 비장하게 스스로의 생각을 노래하는 장면이 더욱 멋져 보였다.


'정녕 태평성대란 말인가?'를 외치는 장면에서는 속 시원한 카타르시스가 느껴지기도 할 정도였다.

정년이도 아마 나와 비슷한 마음이었던지 매란국극단의 자명고 공연을 본 이후로 '정녕 태평성대란 말인가?'라고 외치는 장면을 마음에 두고 따라 한다.




내가 직장생활을 하면서 겪은 가장 이해 못 할 일들은 신사업이나 M&A 같은 새로운 과업에 대한 평가이다.  신사업이 그리고 M&A가 정말로 의미 있는 결과로 이어지려면 그 성과가 시장에서 고객에게 인정받아야 하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어떤 신사업들은 한두 해면 자리를 바꾸는 경영진의 아이디어에 과분한 의미를 부여하고, 조직을 갖춰 준비하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정작 경영진이 자리를 옮기거나 관심을 거둘 때쯤 조용히 사라지기도 한다.


또 어M&A는 시대적 사명이란 말까지 들이대며 온갖 장밋빛 전망으로 밀어붙이다가도, 결과에 대해선 외면하고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십수 년을 루틴처럼 반복되는 신사업과 M&A의 실패를 보면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사실을 도외시하고 리더의 새로운 관심을 쫓아 쉬운 과정을 택한다, 


그렇게 리더의 흥미에 기대어 현실을 외면하는 사람들을 보면 호동왕자가 다시 한번 소리칠만하다.


"정녕 진심으로 일하고 있단 말인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