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제사 직업병
꾸준히 글을 쓰는 건 어렵다. <관제사 이야기>라는 주제로 몇 년간 브런치에 글을 발행해 왔지만 이제는 남은 소재도 많지 않다. 다른 사람들의 아이디어를 빌려볼까 싶어 가끔은 누군가에게 이제 무슨 주제로 글을 쓰면 좋을까? 하고 물어보기도 한다. 은근히 관제사의 ‘직업병’이 뭔지에 대해 궁금해하는 의견이 많았다. 문제는 내게는 소재거리가 될만한 재미있는 직업병이 얼마 없다는 것이었다. 다른 동료들에게 물어보기도 하고 하면서 드디어 몇 가지 사례를 발견해 냈다.
우선 내가 갖고 있는 습관에 대해 말해보고 싶다. 항공에서는 우리가 평소에 쓰는 대한민국 기준시(KST)가 아닌 국제표준시(UTC)를 사용한다. 비행기는 계속 하늘에서 움직이므로, 위치를 기반으로 정한다면 사용하는 시간대가 시시각각 변하기 때문에 하나의 기준으로 UTC를 정해놓은 것이다. 당연히 관제교신도 UTC를 기반으로 한다. UTC는 우리나라 기준시와 비교했을 때 9시간 느리다. 한국의 일시에다가 9시간을 빼면 국제표준시를 계산할 수 있다. 우리가 실제로 사용하는 장비인 IIS에서는 항공기의 출발예정이나 도착예정시각들이 보통 KST로 표기되어 있기 때문에, 조종사에게 목표 엔진시동시각(TSAT) 같은 걸 말해주기 전에 머리를 굴려서 UTC를 계산해야 한다.
여기에 야간근무를 하다 보니 그냥 ’ 9시‘라고 하면 오전인지 오후인지 필연적으로 헷갈리기 때문에 나는 시간을 보통 24시간 체계로 사용한다. 핸드폰으로 보는 시간 형태도 반드시 24시간제를 적용시킨다. 친구들하고 약속을 잡거나 할 때에도 오전/오후라는 말 대신 24시간제로 시각을 얘기하곤 한다.
우리 팀 차장님의 시간 관련 직업병도 있다. 언젠가 차장님이 운전하는 도중에 앞쪽에서 다른 차들끼리 작게 접촉사고가 났다고 한다. ‘그때 내가 바로 무슨 행동을 했을 것 같아?’라는 말씀에 ‘혹시 구급차를 부르셨어요?’라고 했는데, 돌아오는 대답이 놀라웠다.
‘아니... 바로 시계를 확인했어.’
우리 관제사가 관할구역 내에서 항공기 사고를 목격하면 바로 취해야 하는 행동들이 있다. 일단 발생 시각을 확인하고, 기상도 확인하는 등 정보를 수집해야 한다. 그래서 차장님은 차량 사고를 목격하자마자 무의식적으로 시계에 눈이 갔던 것이다.
좁게는 시간에 집착한다면, 넓게 보면 숫자 전체에도 집착하게 되는 것 같다. 특히 2터미널 탑승구 번호인 231부터 268까지의 숫자를 보면 자꾸 인천공항 지도를 머릿속에서 그린 뒤 주기장 위치를 짚어낸다든지, 각 주기장에 맞는 후방견인 절차를 곱씹고 있다. 우리 집 앞에 가끔 가는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주문번호 265번 같은 게 적힌 종이를 받아 들면 내적 친밀감을 느끼면서 표준 후방견인 절차 같은 걸 자동으로 떠올린다. 그리고 실제로는 없는 주기장 번호인 244 같은 숫자를 보면 뭔가 찜찜하고 기분이 이상하다.
언젠가 한 번은 1터미널 주기장 중에 내가 좋아하는 주기장들을 꼽아서 로또를 수동으로 사 본 경험도 있다. 1터미널 주기장은 1번부터 50번까지, 없는 게이트와 버스게이트를 제외하면 총 44개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에 내가 좋아하는 주기장을 솔직히 말하자면 후방견인 했을 때 근처 유도로에 크게 지장이 없는 곳들이다. 예를 들면 가장 끄트머리에 위치해서 부담 없이 푸시백을 해도 되는 1,2번이나 50번 주기장, R7이라는 유도로와는 가까워 보이지만 후방견인해도 전혀 문제가 없는 37번 주기장 같은 곳을 좋아한다. 그런 숫자로 구성해서 로또 수동 용지에 열심히 마킹을 했는데... 결과는 영 좋지 못했다. 혹시 모르니 다음에는 별로 안 좋아하는 주기장으로 로또를 사봐야겠다.
관제 교신에서 숫자가 엄청나게 많이 쓰여서 그런지, 브런치 글을 쓰면서 이런 습관도 생겼다. 나는 어떤 주장에 대한 근거로 보통 ’통계 자료’ 같은 걸 확인하곤 한다. 숫자가 가장 명확하고 깔끔한 근거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숫자에 집착하다가 곧 숫자랑 결혼하게 생겼다.
숫자 말고 하나 더 신경 쓰이는 게 있다면 바로 ‘명령조 말투’이다. 우리는 조종사와는 영어로 소통하지만, 계류장에서 빈 항공기를 끌고 다니는 지상조업 직원과는 한국어로 소통하고 있다. 예를 들어 1번 주기장에서 R1 유도로를 지나 다른 곳으로 가는 견인이 나오면, 우리 관제사는 보통 ‘지상조업 0호, R1 17번 뒤 대기하세요.’라고 얘기하곤 하는데 맨 처음에는 적응하는 게 진짜로 힘들었다. 나는 여러 번의 서비스업 알바 경험을 토대로 갖가지 쿠션어를 사용해 가며 최대한 예의 있게 돌려 말하는 스타일인데, 그런 미사여구를 죄다 빼버리고 간결하고 명확히 말해야 하는 게 쉽지 않았다. 이제는 나름 익숙해져서 별 고민 없이 명령형으로 관제지시를 하지만, 조업사 직원들에게 뭔가 부탁해야 하는 평소와는 다른 상황이 오면 한국어로 ‘~해주시겠어요?’라고 말할 때가 있다. 말이 길어지기 때문에 권고하지 않는 관제지시다.
이렇게 평소에 일 할 때 ‘하세요.’라는 명령형 어미를 사용하다 보니 실제 생활에서도 자꾸 그런 말투가 튀어나올 것만 같아서 신경이 쓰인다. 친구를 만나다가 혹시라도 이유 없이 명령조로 얘기했다 싶으면 사과하고 때로는 직업병이라고 변명까지 한다. 숫자랑 친해지는 건 괜찮은데, 명령조 말투와는 영 친해지고 싶지가 않아서다. 혹여나 주변에 어떤 관제사가 자꾸 지시하듯이 이야기한다면 그냥 직업병이겠거니~하고 넘어가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