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AM_그랜드_챌린지_후기도_조금.txt
봄이 오는 줄 알았는데 아직 날이 쌀쌀하다. 내가 남쪽 땅에 내려오자마자 세찬 비가 줄곧 내렸고, 서울에 잠시 올라갔다가 고흥에 복귀하니까 또 하늘에 구멍 난 듯 비가 온다. 타워를 잠시 벗어나 고흥에 오니 새로운 얼굴도, 익숙하면서 반가운 얼굴도 있다. 대학교 교양 수업에서 만났던 과 선배는 졸업하고 오랜만에 만났는데도 어색함이 없다. 네가 오자마자 고흥에 자꾸 비가 내린다며 왜 구름을 몰고 다니냐 한다. 진짜 내가 비를 내리게 하는 걸까?
여수 옆의 고흥군은 ‘항공우주 그 자체‘로 유명한 곳이다. 가장 유명한 건 고흥 남쪽에 있는 나로호 발사대겠지만 나는 UAM 실증비행에 참여하기 위해 고흥에 잠시 머물렀다. 우리 회사와 몇 개 회사는 함께 컨소시엄을 구축해서 <한국형 도심교통사업 그랜드 챌린지 1단계 실증사업>에 참가하고 있다. 직접적으로 UAM에 관련된 팀에 속한 건 아니지만 고흥에 내려와 실증사업에 함께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주어졌다. 고흥항공센터에서 우리 회사가 수행하는 역할은 교통관리사업과 버티포트 운영 두 개로, 내게 주어진 역할은 완성된 시나리오를 기반으로 ‘관제’를 하는 임무였다.
솔직하자면 나는 하늘에 떠 있는 비행체를 관제해 본 게 거의 6년이 넘었다. 여기에 오기 전에 미리 시나리오를 받아보았지만 당시 스케줄이 너무 바빠 제대로 독파할 시간이 없어서 폐를 끼칠까 조금 걱정되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미 한 번의 실증을 마친 이곳 전문가들이자 동료들은 대부분 시나리오에 익숙한 상태였고, 우리 회사의 실증이 모두 마무리되었을 때쯤엔 그야말로 UAM 마스터가 되어있었다. 외부에 그랜드챌린지의 세부내용이 공유되지 않아 더 자세히 말할 수는 없지만, 모든 이들의 도움 덕에 걱정이 무색할 만큼 체계적이고 안정적으로 시나리오가 진행됐다.
고흥에 오기 전에는 이렇게 바쁠 거라고 상상을 못 했는데, 오히려 관제하러 출근할 때보다 더 바쁘고 개인 시간이 없었다. 아침에 일찍 만나서 오전 브리핑을 하러 이동하고, 브리핑 후엔 오전 실증비행, 오전 디브리핑 후 잠깐 점심 먹은 뒤 오후 브리핑, 오후 실증비행, 오후 디브리핑 후 해산하면 하루 일정이 끝난 것 같지만 저녁을 먹은 후에는 다음 날의 시나리오를 다듬고 재정비하기 위해 다시 한 곳에 모여 자체 브리핑을 진행했다. 이렇게 바쁜 일정을 견딜 수 있게 해 준 건 아마 여기에 모인 사람들 덕분일 것이다. 아마가 아니라 분명히 그렇다.
여기 따뜻한 남쪽나라 고흥에는 다정한 동업회사 식구들이 있다. 팀원들에게 참 리더라고 칭송받는 부장님, 본인 일을 사랑하고 대단한 성과를 보여주는 과장님들, 오랜만에 만났지만 여전히 재밌고 똑똑한 과 선배, 이미 몇 년간 개발자로 일한 다정하고 예쁜 동갑내기 친구.
여기 따뜻한 고흥에는 나와 같이 관제교신으로 합을 맞춘 비행 전문가들이 있다. 웃는 모습이 발랄한 점프슈트 기장님, 언젠가 라디오에서 목소리를 들어본 것 같은 진중하고 젠틀한 기장님.
여기 고흥에는 우리 실증비행을 발 벗고 나서서 도와준 동료들이 있다. 바깥 모임에서 만나고 업무 현장에선 처음 만난 책임님, 진짜 고흥 개그맨이었던 매니저님, 우리에게 부족한 부분을 직접 채워주기도 하고 여러 가지 팁을 알려준 항공전문가 부장님과 차장님, 헬멧을 비뚤게 쓴 모습까지 이 고흥의 마스코트였던 부장님, 알잘딱깔센의 슈퍼 엣티제인 과 후배.
마지막으로 여기 고흥에 올 수 있게 도와주고 일주일 동안 재밌게 지낸 우리 회사 차장님, 과장님, 입사 순서로는 선후배지만 느낌은 동기 같은 좋은 친구.
내일 고흥역을 떠날 때 그리운 유자향이 진하게 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