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성차별이 있나요?
어제는 꿈에 중학교 때 친구가 등장했다. 친구랑 뭐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오늘은 그 친구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친구의 이름은 매우 남성적인 이름이었다. 지금이야 남성, 여성 이름에 대한 기준이 모호해진 상태이지만, 그때만 해도 남, 녀 이름으로 성별을 구분 지을 수 있는 이름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기하게 그녀가 좋아하는 교회 오빠 이름은 여성스러운 이름이었다. 그래서, 난 그 친구를 볼 때마다 ‘박정희, 육영수’를 떠올렸다. 배경지식을 떠나서 보면, ‘정희’는 여성스러운 이름이고, ‘영수’는 남성스러운 이름이라는 고정관념이 있었기 때문일 테다. 어쨌든, 그녀는 그녀가 태어나기도 전에 아들을 바라는 가족들의 바람으로 ‘남자’ 이름으로 되었다며 늘 투덜거렸다. 또한, 그녀는 8살 차이 나는 오빠도 이미 있는 터였다. 문제는, 그의 어머니는 오빠만 늘 편애한다는 것이다. 여자 형제만 있는 집에서만 자라온 나는 ‘아들도 하나 없다’는 어머니의 탄식만 들었지, ‘편애’라는 개념은 나에게 너무나 추상적이고 모호했다. 하지만 그녀가 말하길, 어머니는 늘 자신의 오빠를 ‘우리 멋지고 잘난 아들’이라고 이름 대신 불렀으며, 오빠는 큰 일을 할 사람이라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는 가족에서 거의 없는 존재이다 시피 여겨졌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는 9살 차이 나는 언니 또한 있었다. 하지만, 언니는 약간의 지적장애가 있었기 때문에 부모님의 기대치는 매우 낮고, 그저 안타까운 마음일 뿐이라 했다. 그에 비해, 오빠는 공부도 잘하고 우등생이며, 부모님 말씀도 잘 듣는 매우 유순한 성격의 그야말로 자랑스러운 아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의 친구인 그녀는 늦둥이인 데다 기대했던 아들도 아니었기에 늘 존재감 없이 집에 있는다며 불평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그녀의 부모님은 동네에서 매우 큰 가게를 하고 계셨고, 동네 사람들은 그 00 가게 딸이라 하면 다 알 정도로 유명했기에, 난 그녀의 부모님이 그저 바쁘셔서 그럴 거라 생각했다. 실제로도 그랬을 수도 있다.
어쨌든, 그녀는 늘 오빠에 대한 푸념과 질투, 부러움 등이 가득 섞힌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어느 날, 그녀는 날 데리고 은밀하게 그녀의 오빠 방으로 데리고 갔다. “글쎄 말이야, 우리 오빠가 이런 걸 몰래 사서 가지고 있었어!” 라며 나에게 보여준 것은, 유명한 일본 모델의 나체 사진집이었다. 그때는 그런 게 유행이었다. 그런 거라 하면, 유명 모델들이 나체 화보를 찍어서 파는 일 말이다. 그녀는 오빠의 약점을 몰래 잡았다는 듯이 흐뭇해하면서도 신기해하고, 순진해 보이는 오빠의 색다른 면에 놀라움을 느끼는 것 같았다. 난 그저 그 소문만 듣던 나체 화보집을 본 게 더 신기했다. 오빠는 미대를 다니고 있었다. 미대에 간다고 했을 때 집안이 발칵 뒤집어졌다고 한다. ‘잘난 아들’은 의사나 판사가 될 줄 알았는데 엉뚱한 길로 간다고 하니 어머니는 몸져누우셔서 끙끙 앓으셨고, 유순했던 아들이 확고하게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결국엔 미대 입시 준비를 시작하고 미대에 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친구는 늘 얘기한다. “난 말이야, 내가 그렇게 미대에 간다고 해도, 우리 엄마가 그렇게 지원을 해주실까 모르겠어. 그것도 오빠가 그렇게 원하니까 해준 게 아닐까?” 난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정말 내가 알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녀와 보낸 짧은 몇 년의 시간을 돌이켜보면 그녀가 느꼈던 오빠에 대한 감정만 떠오른다. 그녀와 나는 다른 고등학교에 가게 되었고, 그 이후로 연락이 정말 두절되었다.
그렇지만 ‘아들’, ‘편애’라는 감정은 늘 궁금하지만 알 수 없는 감정으로 남겨져 있다. 물론, 엄마의 탄식, “아들이 하나 있어야 하는데, 아들도 없이 내 인생은.... 딸은 소용없다.”을 통해, 우리 집에 남자 형제가 없는 게 천만다행이다 여긴 적은 있다. 물론, 내가 더 자랑스러운 딸이 되거나 효도를 아주 잘하는 딸이었으면 엄마의 탄식이 사라졌을까 라는 의문이 들긴 하다.
그러다 얼마 전, 또 다른 친구를 만났다. 그녀와 알고 지낸 시간이 꽤 흘렀는데, 그녀 역시 오빠에 비해 ‘차별’을 받으며 자랐다고 했다. 그 ‘차별’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그녀는 깊은 한숨과 탄식을 내뱉었다. 더 이상 기대도 없다는 말과 함께.
그리고 주위 인물들을 떠올려보니, 아는 언니 역시, 넷째 딸 중 막내로 태어나서 거의 ‘방치’ 된 채로 자랐다고 했다. 넷째 역시 딸이라며 부모님의 실망은 매우 크셨고, 언니는 바쁜 엄마보다 언니를 돌봐주셨던 ‘아주머니’랑 더 친하게 지냈다고 했다. 그리고 또 다른 친구의 이름 역시 ‘남’ 자가 들어가는데 이 역시 아들이기를 바라는 마음에 미리 지어놓은 이름이라 했다. 그 친구도 셋째 딸 중 막내로 태어났다. 하지만, 다들 딸들만 있는 집은 비록 ‘탄식’은 있을지라도 ‘편애’라는 남녀차별은 없었을 것이다.
신기하게 요새는 엄마들이 아들보다 딸을 더 선호한다고 한다. 물론, 나보다 어린 나이의 아는 동생은 ‘아들’을 낳아야 ‘시댁 어르신’들이 좋아하실 거라고 언제까지 애를 낳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는 경우도 있다. 이미 그녀는 아이가 둘이 있는 상태이다. 누군가를 기쁘게 하기 위해 아이를 낳는다는 게 선뜻 이해가 가진 않지만, 사람들의 생활방식은 다양하니 그럴 수도 있구나 싶기도 하다가 2020년인데도 100년 전에나 했을 법한 고민을 하고 있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안타깝기도 했다.
뿌리 깊은 ‘젠더의식’은 쉽사리 바뀌기 쉽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구나 이유 없이 내가 태어난 ‘성별’에 의해 ‘차별’ 받는다는 건 너무나 서글픈 일이다. 오늘, ‘젠더(gender)’라는 용어를 도입하며 법의 다양한 분야에서 성차별 철폐를 위해 노력한 루스 배이더 긴즈버그 대법관이 타계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래서 그런 꿈을 꾸었나 보다. 그녀를 생각해보라고. 그녀의 87년의 험난했던 여정을 기려보라고. 참 나의 꿈은 너무 확장력이 넓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