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의 세계12(feat. 가타카)

완전은 불완전을 잠식하는가?

by 김통

동시다발적인 일이 두 가지가 생겼다. 하나는 예술에 ‘예’ 자도 관심 없던 신랑이 첼리스트가 되었다. 또 하나는 동생이 둘째를 낳았다. 이상하게 둘째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윤리적 문제를 모두가 암묵적으로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둘째 아이는 금방 쑥쑥 자랐다. 방금 태어난 아이라고 믿기 힘들 만큼 바로바로 자랐다. 마치 배양 식물의 유전자 조작을 한 것처럼 말이다. 동생의 큰 아이는 자신의 동생이 그렇게 빨리 커가고, 모두에게 있어 화제의 중심이 된 것에 대해 난처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아이는 고작 이제 6살이다.


신랑에게는 음악도 관심 없는 사람이 무슨 뜬금없이 첼리스트가 되었냐며 의아해했다. 그러던 신랑은 독일로 떠났다. 음악을 위해서. 난데없는 신랑의 새로운 인생이 당황스럽긴 했지만 내심 부럽기도 했다. 자신의 재능을 뒤늦게라도 발견하고 기뻐하는 건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그렇게 떠날 거면 나도 데려가라고 했다가, 난 병원 다녀야 하니 안된다고 했다가 갈팡질팡하다 깨어났다.


아무래도 동생의 출산과 관련된 꿈은 어제 들은 온라인 강의와 관련이 있는 듯하다. 어제는 미디어 센터에서 진행하는 ‘결핍에 직면하는 세 가지 시선’이라는 주제로 김원영 변호사께서 다양한 화두들을 던져주셨다.

가령, 트랜스 휴머니즘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지. 자신의 결핍 또는 장애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자신의 정체성을 그 안에서 찾아야 하는지 아니면, 과학의 힘을 빌려 ‘장애’와 ‘결핍’을 극복하고 ‘완전’한 ‘인간성’을 확보해야 하는 것인지 말이다. 당연히 정답은 없다.

사람마다 가치관에 따라 그 판단은 달라질 것이다. 2002년 미국의 청각장애 레즈비언 커플들이 자신의 아이도 똑같이 청각장애를 지녔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청각장애인 남성의 정자를 기증받아 임신에 성공하고 출산하였다. 자연스럽게도, 아이도 청각장애인으로 태어났다. 하지만 사회에서는 거센 비난이 쏟아졌다.

왜 아이에게 그런 삶을 물려주는가?

하지만, 그 커플은 자신들의 세계는 불완전한 게 아니라 인종, 종교, 종족처럼 하나의 그냥 소수자들의 집단일 뿐이라 반박하였다. 난 그 커플들의 말을 전적으로 이해한다고 말하기 힘든 입장이지만, 어느 정도 수긍이 간다.


2007년인가 그 무렵, 특수교사로 재직하고 있던 친구는 나에게 예술의 전당에서 진행하고 있는 ‘어둠 속의 대화’ 전시회를 꼭 가보라고 했다. 부연 설명은 없었다.

어떤 전시인지는 티켓을 사고야 알았다. 과연 내가 빛이 없는 ‘어둠’ 속에서 1시간을 잘 버티며 돌아다닐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을 안고 체험장에 입장하였다. 입장을 안내하는 직원부터 마지막까지 그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은 시각장애인들이었다. 하지만, 이 전시는 단순히 ‘시각장애인 체험’이라는 마치 ‘완전무결한 정상인’이 적선을 베풀 듯, 동정을 가장한 채 그들의 삶이 얼마나 힘든지 알아보라는 관점의 행사가 전혀 아니었다.

한 시간 동안 어둠 속에서 나는 나 자신의 상상력을 키워나갔고, 소리를 듣고 따라가면서 평상시에 들리지 않았던 소리의 미세한 떨림 등을 느꼈으며 시각을 제외한 나머지 감각들이 살아나는 신비로운 체험을 하게 되었다. 그 소리와 상상력, 물건들을 잡을 때 느꼈던 그 감정들은 고스란히 나의 뇌 속에 깊게 각인되어 있다.

그래서 그 전에는 ‘장애인’들이 얼마나 불편하고 ‘온전한 인간’으로 살지 못하는 거에 대한 안쓰러움, 더하기 내가 신체적으로 ‘자유’롭다는 것에 대한 안도의 한숨 등을 막연하게 지닌 채 살았다면 그러한 나의 시각, 관점들이 얼마나 올바르지 못하며 모든 그런 기준점들이 ‘완전함’에 대한 편견에서 그릇된 것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13년이 지난 지금도 난 그때 느꼈던 1시간이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답고 소중한 시간이었음을 기억하고 있다.

마치 아비정전의 장만옥과 장국영이 느꼈던 1분의 시간만큼!


한 가지 감각이 상실되면, 나머지 감각들이 놀라울 만한 능력을 발휘하여 또 다른 세계로 인도한다는 건 모든 게 완전하다고 느끼는 ‘비장애인’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하지만, 비록 한 시간뿐이었지만, 나는 시각을 제외한 나의 나머지 감각들이 되살아 나 또 다른 세계로의 삶이 있다는 걸, 그 삶 또한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 조금이나마 아주 미세하게 알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그 레즈비언 커플들이 청각장애인이라 해서 매우 불편하고 힘든 삶을 살고 있다고 여기는 것 역시 또 다른 형태의 보이지 않는 ‘폭력’ 일 수 있다. 그들은 그들의 감각(‘비장애인’이 결코 경험할 수 없을)의 아름다움으로 이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그 세계 속에서 아이를 키우고 싶어 한 것일 테고, 그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이치일 뿐이다. ‘비장애인’의 기준에서 ‘장애’의 기준을 정하고 그들을 ‘동정’하는 게 ‘완벽한 인간’의 기준을 ‘신체’적 기준으로만 들이대는 위험성과 잘못된 전제(신체의 아름다움은 언제나 고대시대 때부터 ‘미’의 근원이 되긴 하였다.)로의 출발이며 또 다른 형태의 ‘차별’과 ‘폭력’을 부추기는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물론, 그들의 삶이 그 누구보다 행복하고 불행하지 않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그 ‘행복’의 기준은 스스로가 만들어 내는 것이지 누군가가 지레짐작하고 ‘불행’한 삶일 거라 속단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변호사께서 보여준 두 가지의 영상 중 '휴 허'의 팀이 제작한 인공 관절로 춤을 추던 아드리안 하슬렛-데이비스의 공연보다 DV8 극단에서 제작한 The Cost of Living에서 열연을 펼쳐줬던 '데이비드 툴'의 무용이 더 아름답고 경이로웠다.

https://www.youtube.com/watch?v=NShJJr1ztkM (The Cost of Living - DV8 Physical Theatre)


이 강연의 화두는 그 유명한 ‘가타카(1997, 앤드루 니콜 감독)’로부터 출발하였다.

'유전자 편집'이라는 용어는 지금은 너무나 익숙하지만, 이 영화가 제작되었을 당시만 해도 상당히 파격적인 설정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 나는 너무 많은 스포일러를 여기저기서 들은 터라 이 영화를 보지 않았지만, 이번 수업을 준비하면서 보게 되었다. 지금은 모두들 중년이 된 배우들의 젊은 모습을 보니 감회가 새롭기도 하였다. ‘우주’에 대한 막연한 빈센트(에단 호크 분)의 꿈은 또 다른 세상에 대한 ‘판타지’ 일뿐일 테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설정해놓은 ‘판타지’에 이룩하고자 노력하였고, 결국 ‘판타지’는 ‘리얼’로 전이되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과연 그가 간 곳에는 그게 느꼈던 ‘결핍’들을 채워줄 수 있는 새로운 무언가가 있는가는 또 다른 문제일 것이다. 난 빈센트의 부모의 마음이 궁금해졌다. 자연적으로 태어난 아이이건, 유전자 편집으로 태어난 아이이건, 똑같은 부모의 아이들이지만 그 아이들을 바라보는 부모의 시선은 어땠을까?

과연 우월한 아이에게 더 높은 기대를 품으며 이상향을 꿈꿨을까? 빈센트의 아버지(엘리어스 코티스 분)는 빈센트에게 ‘네가 가타카에 들어가는 건 청소부 일 뿐이다’라고 했다. 아버지는 현실을 알았고, 빈센트에 대한 별 기대도 없었을 것이다. 반면, 안톤은 모든 게 우월한 아이이기 때문에 모든 기대를 걸었을까? ‘결핍’이 없이 자란다는 건, ‘향상’이나 ‘발전’의 가능성도 그만큼 낮아진다는 뜻과 같은 맥락일지도 모른다. 완벽한 이들은 완벽한 이들 속에서 경쟁해야 한다. 강남의 아이들이 강남의 아이들과 경쟁하듯이.

하지만, 세상은 불행하게도 ‘서열’이라는 것이 매겨진다. 원하든 원치 않든. 완벽은 완벽 속에 또 다른 완벽을 찾아야 하고, 그 완벽은 그 완벽의 완벽을 주어지지 못한 유전자의 또 다른 경쟁 구도로 전환된다.

결국, 끝없는 이 ‘무한 루프’ 같은 생활은 이어질 것이며, 빈센트의 부모는 평생 그걸 모른 채 행복하게 안톤만 바라볼 수도 있고, 아픈 손가락이라며 빈센트만 챙길 수도 있다. 그것 역시 부모들이 선택해야 할 몫이지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감독의 주제의식은 명백하다. ‘주어진 대로 노력하며 살아라. 결핍은 신체가 아니라 정신에 달려있다.’ 그 단적인 예로 손가락이 12개인 피아니스트의 공연을 보여준다.


하지만 ‘정신’이 인간의 고유 영역이 아닌, ‘인지과학’의 빠른 발전으로 ‘정신력’까지 향상할 수 있는(지금도 일종의 보조 약물들이 많이 쓰이긴 하지만) 세상이 온다면 그야말로 앞서 이야기한 대로 완벽의 완벽의 완벽을 추구하고자 하는 열망들로 무한 루프처럼 세상은 돌아갈 것이고, 그 서클에서 일탈되거나 낙오된 이들은 빠르게 다른 사회 계층으로 떨어질 것이다. 과연 이러한 삶들을 ‘인간성’이라는 화두 안에서 해결 가능한 지점이 될 것인가?라는 물음이 생기게 된다. 다시 근본으로 돌아가서 과연 ‘인간성’이란 무엇인가 하는 원초적인 궁금증이 생기게 된다. 이 역시 여러 누군가들이 자의적으로 정해놓은 기준일 뿐이며,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그 기준들을 답습하고 있는 건 아닌지, 뭔가 나 스스로가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에 담긴 태아’가 된 기분이 든다.


그래서 그런지, 그런 꿈을 꾸게 되었다. 동생이 우월한 아이의 둘째 아이를 낳고 모두들 알게 모르게 당황해하는 꿈.


신랑은 주말에 밤을 새워서, 프로그래밍을 완성했다고 한다. 나는 잘 모르는 AI, 데이터 에널리스, 빅 데이터 뭐 그런 분야이다. 정교하게 이루어진 프로그래밍을 완성한 게 정교하게 활로 연주하는 첼로와 같다고 나의 무의식은 느꼈나 보다. 그리고 그는 독일로 떠났다. 난 그가 이번 기회로 자신의 능력을 더 높게 펼치고 더 넓은 세계로 원하는 곳에 도약하길 지지하는 마음이었나 보다. 하지만, 난 그 세계로 갈 수 없었다. 무엇인가가 내 발목을 잡고 있으므로. 꿈속에서도 아쉽고, 깨어나서도 아쉬웠다. 나도 도약할 수 있는, 지금은 미지로 남아있는 그 세계로 올라가고 싶다. 물론, 난 그처럼 열심히 노력하며 살지는 않는다. 갑자기 카잘스의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1번이 듣고 싶어지는 날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KX1YtvFZOj0&list=RDKX1YtvFZOj0&start_radio=1&t=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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