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이들에 대한 이야기 <낙원의 밤>
*낙원, 죽음, 청춘을 이야기하다 (스포일러 포함입니다.)
1.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킨다.
박훈정 감독의 영화는 알 수 없는 영화적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킨다. 누군가는 클리쉐 같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박훈정 감독의 영화를 보고 있으면 알 수 없는 편안함의 안식이 느껴진다. 그건 그가 나에게 가장 익숙한 영화 문법의 원형을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가서 그럴 테다. 그래서 그런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가지고 이야기한다 한들, 그저 그의 이야기에 수긍하고 묘하게 설득당하게 된다. 그의 영화는 퀸틴 타란티노와 기타노 다케시 사이에 있지만, 그 사이에 특유의 정서를 만들어낸다. 그 정서에는 ‘한국적 누아르’라고 명명할 수도 있고, ‘박훈정 스타일’ 일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 사이의 균형과 평형이다. 하나라도 과하면 자칫 지루해지거나, 식상해 보일 수 있다. 박훈정 감독은 그 균형과 평형을 기가 막히게 잘 지킨다. 특히나 이번에 나온 ‘낙원의 밤’ 은 무엇보다도 그 평형을 잘 보여줬다. 단순한 스토리라인이지만, 그 하나하나 시퀀스를 채우는 건 연출, 미술, 조명, 음악, 배우들의 연기 등이다. 마치 거대한 그물의 둘레는 허술하게 짜여 있지만, 그물의 내부 하나하나는 매우 촘촘하게 얽혀있는 것 같다. 화폭에 빈 공간을 하나하나 씩 채워나가는 듯 한 그의 영화에는 마성의 매력이 있다. 물론, 이 역시 보는 이에 따라 식상한 느낌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익숙한 것에 끌리듯, 좋았던 것에 끌리듯, 자석같이 그의 영화에 항상 끌린다. 다 알면서도 속아주는 느낌인데, 그냥 오마주와 카피만 남무 했다면 이런 자석 같은 끌림은 없을 테니 이는 특유의 박훈정 화법과 스타일에 기인한 것일 테다.
2. 낙원의 밤 – <소나티네>와 <헤이트 풀 8> 어딘가에
기타노 다케시의 <소나티네(sonatine)>와 타란티노의 <헤이트 풀 8(hateful 8)>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낙원의 밤(night in paradise)>은 박훈정 특유의 스타일리시한 면모를 뽐내며 자신의 영화라는 낙인이라는 강하게 찍고 있다. 물론 영화를 관통하는 사고나 정서, 소재, 장면 등이 상당 부분 <소나티네>를 차용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이상하게 그런 유사성은 ‘한국화’, ‘박훈정 화’로 잘 소화되고 있어 독특한 아우라를 느끼게 해 준다.
1) 죽음과 청춘
-이 역시 <소나티네>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 무심코 던지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재연(전여빈 분)은 본인의 죽음에 대해 덤덤해하면서도 타인의 죽음에 대해서는 감정적 동요를 일으킨다. 이는 마지막 장면의 의미를 설명하고자 하는 장치이기도 하며, 그녀의 외로움이 결국엔 ‘남겨졌다’라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 대한 표현일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결국, 본인의 죽음에 대한 덤덤함과 막연함은 마지막 시퀀스에 가서야 퍼즐처럼 완성되고, 그 과정에 벌어진 여러 유혈 낭자함은 자신의 죽음에 가벼움을 선사해줄 뿐이었다. 이는 태구(엄태구 분)도 마찬가지다. 그는 죽음에 대해 내색하진 않지만, 항상 죽음과 가까이 살고 있다. 물회를 먹을 때도 어린 시절 엄마 이야기는 할지언정, 최근에 있었던 물회와 관련된 에피소드는 언급하지 않는다. 죽음과 관련된 감정 선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감정 선은 후반부 창고 씬에서 아이러니하게 폭발한다. 영화 구성의 흐름상 당연한 귀결이지만, 태구는 유독 ‘죽음’과 관련된 언어들을 내뱉는다. 이는 말 그대로 내뱉는 것인데, 상대방과의 의사소통의 도구로 사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죽음’ 들을 처치하고, ‘살려고’ 제주도에 내려온 태구가 또 다른 형태의 ‘죽음’들과 마주하게 되면서 ‘삶’과 ‘죽음’의 핏 비 내리는 도살의 현장을 ‘낙원’에 비유한 것은 그 경계의 잔인함에 대한 은유적 서사라 할 수 있다.
결국, 태구와 재연은 죽음에 대해 태연하면서도 두려워하고, 외로워한다. 마치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젊은 청춘들에 대한 이야기 같다. 미래가 없으며 그냥 하루하루 살아갈 뿐이다. 하루살이처럼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인생인 것이다. 그렇기에 덤덤하고 ‘괜찮냐?’라고 물어보는 말에 위안을 받기도 한다. 그래서 ‘괜찮냐?’라고 물어보는 말은 그들의 키워드가 된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관객은 재연이 무슨 병명으로 죽어 가는지는 알 수가 없으며, 알 필요조차 없다. 그저 ‘죽어간다’라는 것에 방점이 찍혀 있음을 확인하면 된다.
2) 한 편의 무대 – 창고
창고는 이미 한차례 죽음에 대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따라서 후반부에 창고에서 벌어지는 한바탕의 액션 씬은 이전에 나온 죽음에 대한 변주이자 완벽한 무대가 될 뿐이다. 이 완벽한 무대에 박훈정 감독은 거한 연극 한 편을 선사한다. 이는 마치 타란티노의 <헤인트풀 8>의 챕터 3 이후의 분위기와 흡사하다. 한 명씩 자신의 위치에 서서 연극배우들처럼 자신의 역할을 수행한다. 이를 부각하는 것 역시, 카메라 워크이다. 카메라는 배우들의 클로즈업 대신, 롱쇼트나 롱샷으로 흘러간다. 마치 한 명씩 번갈아 가며 몇 걸음 앞으로 나와 연기를 하는 연극처럼 배우들은 한 명씩 돌아가며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고, 나머지 인물들은 그들의 행동을 관객들처럼 찬찬히 지켜볼 따름이다. 물론, 추임새는 존재한다. 그러나 이런 연극적인 연출은 전체 흐름에서 이 장면들을 두드러지게 만들며, 더 비현실적 또는 현실적으로 만든다. 그래서 이 창고 시퀀스들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뒤에 나올 다른 액션씬과는 전혀 다른 결의 형태로 보이게 한다. 특히, 이 클라이맥스 같은 창고 액션씬은 다른 액션씬들보다 더 길고 원시적으로 이어진다. 이 드라마틱하지만 드라마틱하지 않은 액션씬들은 청춘들의 불행한 자화상이자 그들 앞에 내몰려진 예상된 귀결의 현실일 뿐이다. 그렇게 한 편의 무대 같은 현실은 길고, 지루하게 이어지다가 서서히 끝난다.
반편, 바로 이어지는 재연의 짧은 총격전에서 박훈정 감독은 모든 것을 무참하게 살육하는 판타지 적인 장면들을 연출함과 동시에 카타르시스적인 위안을 안겨주며 그들의 청춘에 위로하고자 한다. 따라서 창고 시퀀스가 있었기에 식당 시퀀스가 존재할 수 있으며, 와이드 앵글로 찍은 식당 액션씬은 강한 임팩트를 선물처럼 선사해준다. 마치, 이는 남겨짐이 없는 삶에 마지막 흔적을 남기고 싶은 재연의 삶에 대한 강렬한 욕구이자, 죽음을 내몬 자들에 대한 통렬한 복수인 셈이다. 자신의 불행을 이끈 이전 세대 (마이사(차승원 분)는 재연 보고 예전에 봤을 때 쪼그마했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며, 재연과 다른 세대임을 암시적으로 보여준다.)에 대한 거세를 통해, 본인의 죽음에 의미를 되찾게 되고, 순응해야 할 운명처럼 사라지기 전에 자신의 방법으로 거행된 의식은 그 청춘 세대가 할 수 있는 최소이자 최대의 방법으로의 저항인 것이다. 결국, 식당에서의 짧고 굵은 통쾌한 액션씬은 재연, 태구가 지니고 있었던 암울, 죽음, 불안에 대한 기존 세대에 책임을 묻는 서사이자, 그 복수를 통해 세대와 단절하고 스스로 나아가고자 하는 적극적 함의의 결과물인 셈이다.
3. 박훈정식 누아르
1) 수미쌍관 법 적인 대사 사용
이 영화에서 두드러진 것은, 수미쌍관 법 적인 대사들과 장면들의 차용이다.
특히나, 이러한 극본의 흐름은 전체적인 스토리 라인의 얼개와 상관없이 이 영화의 극적 구성을 보다 세밀하게 만들고 있다. 다소 진부한 측면이 있긴 하지만, 같은 대사들의 변주들은 이 영화에서 캐릭터들의 감정적 동요가 어떤 식으로 이루어졌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치들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방식들은 이 영화가 지니는 하드보일드함과 유머러스함 사이의 다리 같은 존재라 할 수 있다. 또한, 이 영화를 관통하는 ‘키워드’ 같은 역할을 한다. 중요한 점은 이런 식의 극본 구성은 자칫 뻔해 보이며, 진부해 보일 수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박훈정 감독은 그 점을 알면서도 이런 식의 극본을 통해 그들의 진정성과 당위성을 끌어내고자 한 듯하다. ‘나이’, ‘죽음’, ‘괜찮나’, ‘갚을 빚’ 등의 이런 키워드에 대한 여러 번의 변주 및 대조적인 배치는 앞서 언급한 그런 키워드들이 어떤 식으로 변형되는지, 읽히는지 보여줌으로 해서 예상 가능한 답변을 미리 관객들에게 제시해줌과 동시에, 그런 키워드들을 계속 되새이게 만드는 스타일리시 함을 보여준다. 나이를 따지는 ‘태구’에게 죽음이라는 키워드로 맞받아치는 ‘재연’, (이 역시 기성세대에 대한 불만의 은유적 표출이다.) ‘갚을 빚’을 따지는 마 이사이지만, 마지막 재연에겐 당연히 갚을 빚에 대해 수긍한다. (기성세대로서 젊은 세대들에 대한 속죄의 마음이다. ) 따라서 이 영화는 전형적인 한국적인 정서를 바탕으로 깔고 있는 한국적 누아르이다. 이게 감독의 스타일이자, 기저에 깔린 욕망과 현실에 대한 자조 섞인 시선인 것이다. 그래서 진부해 보일 수 있는 영화를 박훈정 스타일로 새롭게 변주되는 순간, 이 영화는 새롭고 다른 영화가 되는 것이다.
2) 현실적인 액션 시퀀스와 판타지 같은 초월적 능력의 액션 시퀀스
창고에서 태구는 그저 박치기로 양 사장(박호산 분)을 제압하고자 한다. 여러 번 자신의 머리를 양 사장을 가격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태구의 절박함, 좌절스러움, 분노 등을 한꺼번에 느낄 수 있는 액션 배치이다. 그전과 다르게 창고에서 태구가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박치기 밖에 없으며 이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이자 최선의 선택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그는 박치기를 수차례 하며, 이는 보는 사람도 고통스럽게 만든다. 이런 액션 구성들은 매우 현실적으로 태구가 처한, 태구 세대들이 처한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으며, 현실의 젊은이들처럼 처절하게 고통스럽게 저항할 따름이다. 그에 비해, 재연의 화려한 액션의 기술을 보여줬던 식당 액션씬들은 짧고 굵고 강렬하게 끝을 낸다. 이는 거의 판타지적이고 초월적인 능력치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해 보이는 만렙 슈터 같은 면모를 보여준다. 마치 번개가 지나간 듯 후다닥 해치운 듯 한 식당 시퀀스는 마치 현실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모습을 보여줌으로 해서 어떤 환상적인 대리만족을 이끌어낸다. 이런 양 극단의 액션 씬들을 사용함으로 해서 감독은 현실과 이상의 극단을 보여준다. 이런 차별화된 액션 구성과 연출은 영화를 자칫 구차하게 보일 수 있는 후반부를 산뜻하게 마무리해준다. 이 대조적인 액션 시퀀스 들은 박훈정 누아르의 결정판이며 재치 있는 연출력을 보여준다.
4. 한국적 누아르를 꿈꾸며
다케시와 타란티노 어딘가에 위치하고 있는 박훈정은 그 어딘가에 자신의 색깔들을 꼼꼼하게 메꾸며, 한국적 정서, 사회 등을 켜켜이 쌓아 올리고 있다. 그래서 그의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수긍하게 된다. 초월적 능력을 가진 소녀가 존재하건(마녀), 말도 안 되는 총격전을 벌이는 젊은 여성이 있건 말이다(낙원의 밤). 그의 이야기들은 늘 확장되고, 진일보하며 공감대를 쌓아가고 있다. 이 영화가 제주도를 배경으로 한 건 ‘낙원’이라 불리는 곳에서 ‘낙원 같은 삶’을 살지 않은 이들이기 때문이다.
마치 대한민국 사회가 세계가 관심 있는 ‘한류’ 열풍의 중심지이지만, 그 중심지에 있는 이들은 그런 ‘열풍’과 관계없이 힘겹게 살아가야 하는 이들인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가장 ‘한국적인 누아르’이고, ‘박훈정식 하드보일드’이다. 앞으로 또 들려주게 될 박훈정 감독의 이야기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 <소나티네>에서 히사이시 조의 음악이 영화와 잘 어울러져 여운이 많이 남았듯, 이 영화 역시 모그의 음악이 상당히 인상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