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말라에서 만난 순환의 시간

- 『뻬드로 빠라모』를 읽고

by 김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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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말라에 왔다.'로 시작하는 후안 룰포의 『뻬드로 빠라모』. 이 기묘한 소설의 잔상이 오랫동안 남아, 이를 글로 토해내지 않고서는 길을 잃어버릴 것 같아 이 글을 쓴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며 진행되는 서사 속에서 현재는 어느새 과거가 되고, 과거는 현재가 되는 뒤죽박죽이 주는 마법 같은 즐거움이 이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이다. 아마도 우리가 너무 직선적인 시간 관념에 익숙해진 탓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죽은 자기 자신이 자신의 근원을 찾아 떠나는 여행기였던가? 모호하면서도 매력적인 지점은, 주인공이 도대체 언제쯤 죽었을지에 대한 분명한 이야기가 생략되어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는 순환적인 시공간 개념을 가진 문화권이 더 많이 존재하지 않을까? 남미의 환상문학 자체가 시공간을 넘나드는 서사 방식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동양에서도 명료하지 않은 형태의 시공간 개념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김시습의 『이생규장전』이나 『홍루몽』을 떠올려보자. 모두 죽음, 과거, 현재, 내세, 현세, 삶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결국 이러한 것들이 맞물려서 원형적인 흐름으로 서사가 흐른다.


이승우는 『고요한 읽기』에서 '세상의 끝'은 자기 자신이라 명명했다. 도저히 쉽게 알 수 없는 곳. 출발점과 도착점이 일치하는 곳. 자기 자신과 마주할 때야 진정한 '세상의 끝'이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뻬드로 빠라모』를 다시 살펴보면, 아버지 '뻬드로 빠라모'를 찾아 '꼬말라'로 향했던 주인공은 세상의 끝 같이 황폐한 지역에서 자기 자신을 만나게 된다. 그것도 죽은 자기 자신을!


여기서 '아버지'라는 존재는 생물학적 의미보다 멕시코라는 나라의 정체성과 역사성을 연상시킨다. 뻬드로 빠라모는 잔인하게 지역민들을 내쫓아 부를 축적해서 '아시엔다'의 지주가 되었다. 멕시코 혁명 때도 술수를 써서 살아남았으며, '크리스테로' 전쟁에서도 빗겨나갔다. 그는 농민들과 지역민들의 피를 빨아먹고 살았다. 그렇기에 주인공의 어머니가 말한 '당연히 갚아야 할 것을 하나도 갚지 못한' 인간이 된 것이다. 하지만 '구걸하지 말고 당당히 요구해라'라는 어머니의 말에는 따를 수 없었다. 뻬드로는 이미 죽은 자가 되었기에, 멕시코인들은 빚을 받고 싶어도 채무자가 이미 죽어버린 셈이다. 결국 역사의 굴레를 겪고, 목격하고, 증언을 들었던 주인공인 프레시아도는 죽음이라는 문턱을 넘어 다시 태어날 수 있다. 멕시코인들에게 죽음은 부활이 되는 순환의 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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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지금, 2022년 10월(구글 지도에서 나오는 최신 시각이다) 의 꼬말라로 떠나보자.

화면 속 꼬말라는 생각보다 너무 화창하고 밝은 곳이었다. 분명 소설 속 황폐함과 쓸쓸함, 모두가 죽어갔던 풍경과는 사뭇 다르다. 하지만, 저 끝없이 이어진 집들과 한참을 걸어가야지만 나올 것 같은 지평선. 이 모든 것들은 후안 룰포가 상정한 이미지들이었을지도 모른다.

멕시코의 역사적 상처가 이 땅의 지형 속에서 숨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 위에 여전히 흐르고 있는 삶의 흔적들. 꼬말라라는 황량한 땅에서 발견한 것은 결국 죽음 너머의 부활 가능성이었다. 페드로 빠라모가 상징하는 낡은 질서의 종말과, 그 폐허 위에서 다시 시작하는 새로운 삶의 순환. 그렇기에 멕시코인들은 후안 룰포를 사랑할 수밖에 없나보다.


이런 순환의 알레고리 속에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명료한 메시지가 나에게 깊게 와닿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 역시 『고요한 읽기』에서 말한 '세상의 끝'에서 나 자신과의 대면 끝에 다시 태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이 강하기 때문이 아닐까?

꼬말라에서 만난 것은 결국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나 자신의 가능성이었다. 이것이 바로 룰포가 우리에게 전하고자한 순환의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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