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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정연 Jul 15. 2023

뚝, 비극은 적막 속에 남아 자리를 지킨다

시선 #4


뚝, 조명이 켜진다.

메디아는 남편 이아손과 대치 중이다. 바닥을 구르는 화려한 액션과 자극적인 총성. 점차 고조되어 가는 음악 소리. 치열한 대치 끝에 메디아는 결국 이아손을 죽였다. 메디아는 무대 앞으로 찬찬히 걸어 나와 승리에 찬 모멸의 웃음을 크게 내보인다. 찰나의 정적 속에서 이아손의 죽음을 깨달은 관객은 일그러진 혼란의 눈빛으로 메디아를 바라본다.

 

뚝, 조명이 꺼진다.

잠시 후 무대가 점차 밝아지며 신나는 코러스와 함께 오색 꽃 달린 드레스를 입은 화려한 메디아가 나타난다. 마치 인기 절정에 오른 60년대 트로트 스타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메디아는 인기를 잔뜩 끌어안아 한껏 부푼 모습으로 관객에게 다가간다. 관객은 그녀의 모습에 홀려 쉽게 환호를 내어주며, 메디아가 이끄는 노래 박자에 맞춰 손뼉을 쩍쩍 쳐 댄다. 메디아는 환호 속에 빠져 즐겁게 노래하고 춤춘다. 메디아를 바라보던 일그러진 눈빛은 스타를 바라보는 반짝이는 눈빛으로 변한다.

 

뚝, 다시 한번 무대 위 조명이 꺼진다.

열기가 내려앉은 불 꺼진 무대. 함박웃음을 짓던 코러스는 순식간에 무표정한 얼굴이 되었다. 어린아이 가면과 몸통. 메디아의 손수건과 총. 피와 축제의 상징인 듯, 흩뿌려진 반짝이 꽃가루. 그리고 무대를 둘러싼 폴리스 라인. 무채색 적막 속에 잔인한 팩트만 남은 채 무대는 끝이 난다.

 

관객은 현란한 시청각적 연출에 빠져 사건이 비극으로 치닫는지도 모른 채 비극을 마주한다. 갑작스레 마주한 비극이 혼란스럽지만, 이내 또 다른 현란함에 눈과 귀를 뺏겨 비극의 본질을 덮어버린다. 하지만 비극은 적막 속에 남아 자리를 지킨다.

 

우리에겐 적막을 직시할 힘이 필요하다.




(극단으로부터 본 공연의 초대권을 받아 네 명의 크루별 시선대로 자유롭게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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