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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여기, 선택없는 집중력

진리란 방법이 있는 것도, 스승이 있는 것도 아니다.

by stephanette

*사진: Unsplash


진리는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라는 사건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를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그는 사상가라기보다 하나의 ‘사건’이다. 어떤 체계도 남기지 않았고, 교리도 없으며, 수행법조차 부정했지만, 그가 남긴 흔적은 현대 영성·철학·심리학의 지형을 근본에서 흔들었다. 그는 답을 준 사람이 아니라, 질문 자체를 다시 구성한 인물이다.


1. ‘세계의 스승’으로 길러진 아이, 그 자리를 부정하다

크리슈나무르티는 신지학회에 의해 어린 시절부터 “인류를 이끌 스승”으로 양육되었다. 이미 준비된 언어, 의자, 신도, 기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스무 살 무렵, 그는 이 모든 전제를 공개적으로 해체한다.

그의 선언은 간결하지만 파괴적이었다.

“진리는 길 없는 땅이다.”

이 한 문장은 스승–제자, 교리–수행, 단계–도달이라는 구조 전체를 무너뜨린다. 그는 권력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권력의 형성 구조 자체를 부정했다. 이후 크리슈나무르티는 누구의 스승도 되지 않았고, 자신을 따르지 말라고 반복해서 말했다. 이 지점에서 그는 이미 종교가 아니라 급진적 인식론의 영역으로 이동한다.


2. 문제는 감정이 아니라, 감정을 다루려는 ‘생각’이다

크리슈나무르티 사상의 핵심은 단순하지만 불편하다.

우리가 고통스럽다고 느끼는 것은 분노·질투·두려움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감정을 통제하려는 생각의 개입이라는 주장이다.

우리는 보통 이렇게 배운다. 감정은 다스려야 하고, 극복해야 하며, 더 나은 상태로 나아가야 한다고. 그러나 그는 묻는다.

통제하려는 ‘나’는 어디서 왔는가

그 ‘나’는 실제로 실재하는가

아니면 기억과 비교로 구성된 하나의 이미지인가

여기서 크리슈나무르티는 ‘관찰자와 관찰 대상의 분리’를 문제 삼는다.

분노를 바라보는 나와, 분노라는 대상이 분리되는 순간, 이미 갈등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이 갈등이 곧 에너지의 누수이며, 심리적 고통의 핵심 구조다.


3. ‘바라봄’은 수행이 아니다

그가 말하는 ‘관찰’은 명상 기법도 아니고, 훈련도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의도를 가진 관찰이 아니다.

고치려 하지 않고

해석하려 하지 않고

결론을 내리지 않고

다음 단계로 이동하려 하지 않는 상태

그는 이 상태를 ‘선택 없는 주의력(choiceless awareness)’이라 불렀다. 여기에는 발전도, 성취도, 성공도 없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그는 역설적인 자유를 말한다. 생각이 생각을 통제하지 않을 때, 의식은 처음으로 에너지를 회수한다고.

이는 심리학적 언어로 번역하면 이렇다.

자기검열과 자기개선이 멈출 때, 인식은 분열되지 않는다.

분열되지 않은 인식은 더 이상 자기 자신과 싸우지 않는다.


4. 그는 왜 ‘방법’을 끝까지 거부했는가

크리슈나무르티가 가장 강하게 경계한 것은 방법(method) 이었다.

방법은 항상 미래를 전제한다.

‘지금이 아닌 나’,

‘아직 되지 않은 상태’를 상정한다.

그는 이 구조 자체가 비교와 결핍을 강화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말했다.

수행은 시간의 연장이다

시간은 심리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시간이 개입되는 순간, 진실은 과거의 기억이 된다

이 지점에서 그는 불교·요가·심지어 심리치료와도 결을 달리한다. 그는 치유를 약속하지 않았고, 변화의 보장도 주지 않았다. 단지 지금 일어나는 것을 왜곡 없이 볼 수 있는가를 물었을 뿐이다.


5. 크리슈나무르티는 왜 지금 다시 읽히는가

현대인은 너무 많은 자기관리, 자기개선, 자기서사를 요구받는다. 우리는 끊임없이 더 나은 ‘나’를 만들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감정은 관리 대상이 되고, 삶은 프로젝트가 된다.

크리슈나무르티는 이 흐름에 정면으로 반한다.

그는 말한다.

당신은 고쳐질 대상이 아니다.

이 말은 위로가 아니라, 책임의 회수다.

누군가를 따르지 말라는 그의 주장은 자유의 선언이 아니라, 스스로를 직접 마주하라는 요구다.


6. 마무리 — 그는 가르치지 않았다, 드러냈을 뿐이다

크리슈나무르티를 이해했다는 말은 어불성설에 가깝다.

그는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사유의 습관을 흔드는 충격이기 때문이다.

그의 글과 말은 독자를 이끌지 않는다. 다만 멈추게 한다.


그리고 묻게 한다.

지금 보고 있는 것은 사실인가

아니면 생각이 덧씌운 해석인가


그 질문 앞에 서는 순간,

이미 그는 스승이 아니다.

당신이 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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