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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재경 Sep 07. 2022

나는 왜 칭찬이 부담스러울까



내가 쓴 기사의 조회 수가 꽤 잘 나온 적이 있다. 여러 플랫폼에 공유가 됐고, 덕분에 주변에서 기사 잘 봤다는 연락도 많이 받았다. 그러나 별로 기쁘지 않았다. 페이스북 페이지에 공유된 내 기사의 댓글에서 악플을 보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회사 동료들은 이번 기사 재미있다며 축하 인사를 건네주었다. 나는 고맙다는 말 대신 기사에 악플이 달렸다며 하소연을 쏟아냈다. 기사 내용을 이렇게 말고 저렇게 써볼걸 그랬다며 후회의 말도 덧붙였


다. 그렇게 동료들에게 한참을 푸념하다 듣게 된 말은 “괜찮아요. 기운 내세요!”였다. 그렇다. 정신 차리고 보니 어느덧 나는 축하가 아닌 위로를 받고 있었다. 분명 기사가 정말 유익하다는 좋은 댓글도 많았는데, 그런 내용은 쏙 빼둔 채 안 좋은 얘기만 편집해 전한 결과였다.


사실 이런 일을 겪은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축하받을 일을 해놓고도 위로를 받는 기이한 상황이 나에게는 종종 벌어졌다. 잘한 것보다는 못한 것에 더 집중하는 바람에 일어나는 일이었다. 내 잘못은 늘 어찌나 거대해 보이는지, 대형 사고를 친 것도 아닌데 실수 한 번 하면 대역죄인에 빙의해 석고대죄를 하고 다녔다. 사죄를 하다 보면 마음은 구멍 난 튜브처럼 쪼그라들었고, 그러면 나는 더 긴장해서 한 번 할 실수를 두 번 세 번 더 하기도 했다. 이 악순환의 피날레는 ‘역시 난 멍청이야.’라며 자책하고 또 자책하는 일이었다.


이런 피곤한 성격을 갖고 있다 보니 칭찬이나 격려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할 때가 많다. 내 눈에는 내가 잘한 것과 나의 좋은 점이 늘 나노 수준 정도로 작게만 보였다. 그래서 한때는 누가 나를 칭찬해주면 그 상황을 빠르게 모면하기 위해 “나도 알아~”라고 장난치듯 대꾸하며 넘어갔다. “오늘 좀 달라 보인다. 예쁜데?”라는 말을 들으면, “나 원래 예뻤는데?” 같은 어처구니없는 답변을 내놓아 상대로 하여금 다시는 그런 말을 입 밖으로 얼씬도 하지 못하게 만드는 수법이었다. 효과가 확실해서 내 반응을 들은 몇몇 지인은 “뭐래? 미쳤나 봐.” 하며 꺼낸 칭찬을 다시 회수해갔다. 그제야 나는 안도하면서도 약간은, 아주 약간은 섭섭했던 것 같다.

어떨 땐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칭찬을 강력 부인하기도 했다. 마치 임금에게 고개를 들어보라는 말을 들은 백성처럼, “아이쿠, 아닙니다요!”를 외치며 고개를 한껏 떨구는 식이었다. 그럼 나를 칭찬해주던 사람도 덩달아 민망해했다. ‘이게 이렇게까지 몸 둘 바를 몰라 할 일인가?’ 그쪽도 당황스러웠을 거다.


이 외에도 꽤나 다양한 방법으로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받은 칭찬을 부지런히 환불해줬다. 담백하게 “고마워.”라며 칭찬을 받아들이는 것만이 내가 유일하게 못 하는 거였다. 가장 평범한 리액션을 하는 대신, 뻔뻔한 인간이 되거나 성은이 망극한 백성이 되기를 택했던 거다. 고맙다고 말하면 내가 진짜 그 칭찬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같아 쑥스럽게 느껴졌던 탓이다.


몇 달 전 회사 워크숍에 참석했다. 그때 ‘팀워크 다지기’의 일환으로 자신의 강점을 찾는 일종의 테스트를 진행했는데, 그 결과 내 자신감 지표가 평균 이하로 굉장히 낮게 나왔다. 다른 팀원들의 그래프와 비교해 보는데, 내 것만 한없이 떡락 중이었다. 더욱 충격적이었던 건 외부 강사의 부연 설명이었다.


“다른 지표는 스스로의 노력으로 높일 수 있지만, 자신감 지표는 혼자 열심히 한다고 올라가지 않아요. 주변의 칭찬과 격려, 즉 외부 요인에 의해서만 올라갈 수 있어요.”


우씨! 내 노력으로 안 되는 거면 나더러 어쩌라고? 2차로 절망했다. 그러나 집에 돌아와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말은 틀린 말이었다. 적어도 내 경험에 비춰봤을 때는 그랬다. 물론 지금까지 살면서 내 자신감을 훔쳐 가는 사람이 없었던 건 아니다. 그렇지만 잠깐만 떠올려봐도 내 주변에는 나를 격려하거나 칭찬해주는 사람이 더 많았다. 문제는 내가 그걸 현란한 기술로 탁탁 쳐낸다는 거였다. 결국 나의 자신감 지표가 낮은 이유는 내가 주변의 칭찬과 격려를 지독하게 방어하고 있어서였다. 상대가 무색해질 만큼 격렬하게. 누군가가 나에게 100만큼 칭찬을 해주면 나는 내가 이 칭찬에 걸맞지 않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려는 사람처럼 각종 핑계를 대며 그 칭찬을 깎고 깎아 30 정도로 만들고는 했다. 그렇게 한껏 작아진 30만큼의 칭찬마저 누가 볼세라 뒷주머니에 욱여넣는 게 나였다.


솔직히 그 전까지는 실수해놓고도 “앗! 미안해.” “어머, 죄송해요.” 정도로 퉁치고 넘어가는 이들이 뻔뻔하다고 느낄 때가 많았다. 똑같은 실수를 내가 했다면, 아마 나는 또 대역죄인이 되어 여기저기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을 텐데, 저 사람들은 어쩜 저렇게 자기 실수를 산뜻하게 넘기지 싶었다. 그땐 왜 몰랐을까. 실은 그들이 뻔뻔한 게 아니라, 가볍게 사과하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을 내가 크게 부풀리고 있었다는 것을. 지혜로운 사람들은 자신이 잘못한 딱 그만큼만 사과하며 산다는 것을 늦게야 깨달았다. 지나치게 미안해하는 일은 스스로에게도 미안한 일이라는 것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앞으로는 덜 미안해하고, 칭찬은 주는 대로 잘 챙겨 받아야지. 잘한 일과 못한 일을 재는 저울의 기준점을 공평하게 조정해서 잘한 게 가벼워 보이지 않고, 못한 게 무거워 보이지 않도록 딱 알맞게 말이다. 잘한 일 앞에서는 “아니에요, 아닙니다.” 손사래 치지 않고, “고맙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기를. 못한 것 앞에서는 죽을죄를 지은 무기수가 되지 말고, 그저 “미안합니다.”라는 말로 깔끔히 정리할 수 있기를. 아직은 그렇게 하는 내 모습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민망하지만, 연습하다 보면 언젠가는 되겠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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