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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싸프디 May 17. 2021

허우 샤오시엔 <카페 뤼미에르> (2003년 작)

판단하지 않는 따뜻한 시선

어떤 영화들은 끝을 전혀 짐작하지 못했는데 끝나버린다. 허우 샤오시엔의 <카페 뤼미에르>도 그러했다. 그 끝의 내용은 이러하다. 요코(히토토 요 분)가 전철을 타고 좌석에서 꾸벅꾸벅 졸면서 어딘가로 가고 있다. 어떤 역에 정차하는데 우연히 하지메(아사노 타다노부 분)가 요코와 같은 칸에 탑승한다. 하지메는 졸고 있는 요코를 한동안 바라본다. 카메라는 전철 밖으로 나가 역으로 들어오는 전철을 찍는다. 문이 열리고 요코와 하지메가 내린다. 하지메는 요코와의 만남이 일상의 일부라는 듯 평소처럼 전철이 내는 소리를 녹음한다. 요코도 가만히 그 곁에 서 있는다. 카메라는 전철을 사이에 두고 반대편에서 그 둘을 찍는다. 역을 지나치는 전철의 유리창을 통해 그들의 모습이 보였다 안 보였다 한다. 다음 쇼트. 이리저리 엉킨 철로 위를 달리는 전철들. 이때까지만 해도 이게 영화의 마지막 쇼트가 될 줄은 몰랐다. 엔딩 음악이 나올 때서야 '설마 끝이야?'라는 생각을 했다.


그럼에도 내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건, 이 영화가 나를 감동시켰기 때문이다. 감동이라는 말이 일견 값싼 감상이라고 느껴질 수도 있다. 흔히 말하는 신파극을 보며 눈물 몇 방울을 흘리는 모습이 연상되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는 감동은 그런 게 아니다. 영어로 표현하는 편이 이해가 쉬울 것 같다. touched, moved 등등. 영화가 내 마음을 건드렸고 움직였단 뜻이다.


왜 나는 이 영화를 보고 감동을 받았을까. 영화를 굳이 감상적 영화와 지적인 영화로 구분했을 때 감상적 영화는 왜 감동을 받았는지 금방 알 수 있는데 반해 지적인 영화의 경우 말 그대로 지적으로 사유해야만 이유를 알 수 있다. 이 영화가 바로 후자에 속했다. 그래서 평론을 읽고 짧지 않은 시간 사유하며 감동의 이유를 정리해봤다. 이 짧은 글은 그 사유의 흔적이다.


가장 좋았던 부분은 카메라와 인물의 거리이다. 카메라가 억지로 인물의 사적 공간에 발을 들여놓지 않는다. 전부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쇼트들은 미디엄 쇼트 이상으로 인물에게 가까이 가지 않는다. 예를 들어 요코가 임신 사실을 새엄마에게, 그리고 관객들에게 처음 고백하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동요하지 않고 원래의 자리를 유지한다. 다른 영화였다면 충분히 두 인물의 클로즈업을 잡았을 거다. 하지만 이 영화는 꿋꿋이 그 거리를 유지한다. 그 거리를 나는 인물에 대한 존중이라고 느꼈다. 그리고 거기서 은근한 위로를 받았다.


허우 샤오시엔의 다른 작품들도 대체로 인물과의 거리를 유지하려 애쓴다. <비정성시>의 장례식 장면에서 카메라는 제례의식을 관조할 뿐 인물의 감정을 포착하려 카메라를 들이대지 않는다. <자객 섭은낭>에서는 대부분의 쇼트들이 비단 휘장에 가려져 인물이 위치한 공간과 구획 지어진 다른 공간에서 그들을 관조한다는 걸 명시한다. 그 관조가 나는 좋다. 판단하지 않고 그저 바라본다.


"영화는 결국 세상에 대한 예의입니다." 정성일 평론가가 허우 샤오시엔의 집에서 그에게 "영화가 결국 당신에게 갖는 의미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돌아온 대답이다. 거장의 짧은 문장에 담긴 깊은 뜻을 모두 헤아릴 순 없겠지만, 나름의 해석을 해보자면 이렇다. 쉽게 판단하지 않고 관조하는 것, 그 시선. 그것이 이 문장이 품고 있는 의미의 일부이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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