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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현우 Dec 27. 2019

9,288km 위의 마음들 #3

강현우 드림

54개의 마음들, 밤

침대로 빼곡히 차 있는 열차 안에 나를 위해 허용된 공간은 몸 하나 뉠 정도의 작은 침대가 전부였다. 그 작은 침대 위로 나의 하루가 모두 담겨 있었다. 이불을 허리까지 당겨 덮은 뒤 책을 읽노라면 침대는 작은 도서관이 됐다. 콧수염 아저씨가 나눠준 홍차에 건너편 남자가 나눠준 설탕 결정을 녹여 마시면 달달하니 그만한 카페가 따로 없었다. 때때로 창문은 큰 액자가 됐다. 창밖 풍경들은 그림처럼 걸려있다가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다. 근사한 전시장이 부럽지 않았다. 그러다가 잠이 들고 싶으면 다시 이불을 덮고 누우면 그만이었다. 침대 위 도서관과 카페와 전시장은 언제나 내 마음대로 열고 닫았다. 

54개의 침대 위로 지나는 하루는 모두 달랐다. 침대가 모자랄 정도로 키가 큰 남자는 하루 온종일 잠으로 시간을 보냈다. 곤히 잠든 아이의 목에 뜨고 있던 목도리를 대보며 흐뭇하게 바라보던 엄마는 온종일 뜨개질을 놓지 않았다. 콧수염 아저씨는 허기지는 게 싫었는지 해바라기 씨를 연신 까 입속으로 던졌다. 2층 침대를 쓰는 소년은 작은 책을 읽다가 자고 다시 깨 읽다가 자기를 반복했고, 한쪽 침대에는 여섯 명이 모여 신중하게 카드를 고르고 있었다. 모두에게 같은 스케치북을 줘도 다 다른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54개의 침대에는 저마다의 하루가 채색되고 있었다.

각자의 시간에 집중하는 동안 하늘은 종이에 스며드는 물감처럼 서서히 색을 바꾸고 있었다. 파랗던 하늘에 분홍 물감이 스며들었고 분홍 물감이 파랗던 하늘을 점점 밀어냈다. 완전히 분홍빛이 돌던 하늘에 이번엔 짙은 남색의 물감이 뚝- 하고 떨어졌다. 밤이 왔다. 빛 하나 없는 숲속을 달리면 창 위로 새까만 어둠이 내렸다. 그럴 때면 창문엔 눈을 감고 있는 아저씨의 모습이, 몰래 페트병에 담긴 보드카를 행여나 승무원에게 걸릴까 조심스럽게 마시는 남자의 모습이, 가만히 앉아 창밖 달을 쫓은 여성의 모습이, 그리고 어느덧 32살이 된 나의 모습이 켜켜이 쌓여 비쳤다.

밤을 가르는 당신의 숨들
선로 위에 버린 9,288km만큼의 불안함

초등학생 시절 겨울방학이 오면 의자와 이불로 방 구석진 곳에 비밀스러운 공간을 만들곤 했다. 이불 아래로 기어들어 가 작은 전기방석을 틀어놓고, 랜턴을 한쪽에 세워 비밀스러운 공간을 밝혔다. 나름대로 내부 인테리어를 마친 나는 '외출 중'이라고 서툴게 적힌 종이를 방문에 붙이고 서랍 자물쇠를 열어 과자를 꺼내왔다(그때 당시엔 여동생과 과자 쟁탈전이 있어 서로 어딘가 숨겨 놓기 바빴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비밀스러운 공간에 들어가 가장 편안한 자세로 숨을 죽이면 주변 소리가 천천히 귓가에 앉았다. 창밖 멀리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대화 소리, 안방에서 들려오는 TV 소리, 그 앞에 앉은 할아버지가 나무를 조각하는 소리.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으면 마치 부드러운 빗자루로 가슴을 쓸어주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 느낌이 좋았다.

어릴 적 하루라도 결석하면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가슴이 쿵쾅거리는 아이였다. 아직도 집구석에 쌓여있는 파일 중 하나에는 '개근상'이 수두룩하게 채워져 있다. 어느 순간부터 늘 걸어야만 했다. 멈추는 순간 제자리가 아니라 뒤로 끌려가는 느낌까지 들었다. 이미 시선은 내가 아니라 내 주변으로 향해 있었다. 상대방이 계속 나아가는 모습이 나를 초조하고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런 생각들이 허리춤에 묶인 줄을 계속 당겼다. 나는 발자국이 움푹 파일 정도로 다리에 힘을 주고 앞으로 걸어야 했다. 지칠 수밖에 없었다. 비밀기지에 웅크리고 누워있던 어린 날의 나는 어쩌면 본능적으로 잠시 숨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건지도 모른다. 방문만 열면 보이는 어설픈 비밀기지였지만, 아무도 나를 발견 못 할 거라는 믿음 덕분에 그 안에선 한없이 게을러질 수 있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에서 보낸 시간은 어린 시절 비밀기지 안에서 보낸 시간과 닮아 있었다. 복도를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소음과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열차의 기계음, 온종일 잠만 자는 남자의 코 고는 소리는 이상하게도 나를 편안하게 만들었다. 그 속에서 나는 오롯이 내 몸이 원하는 대로 하면 된다. 배가 고프면 먹었고, 눈이 감기면 잤다. 기차 안에서 나는 한없이 나태해졌다. 나태해진 나 대신 열차가 성실하게 달리고 있었다. 그래서 괜찮았다.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나는 7일 동안 몸을 숨겼던 열차에서 내렸다. 키가 2cm는 준 것처럼 몸이 찌뿌둥해 기지개를 크게 폈다. 관절 마디마디에서 소리가 나는 것만 같았다. 날은 여전히 추웠지만, 마음은 타기 전과 사뭇 달라져 있었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은 어떤 것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걸음걸이에 다시 힘이 붙었다. 내가 없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도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열차는 어떤 이의 고독과, 어떤 이의 게으름과 어떤 이의 일상, 그리고 나의 낭만을 싣고 출발하고 있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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